80. 싫습니다!
동백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세자를 따라 좌익위도 뒤따랐다.
그런데 침소에도, 뒤꼍에도 두화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를 볼 생각에 들떴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저하, 소인의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하도 빠르게 이리저리 뛰는 세자 때문에, 좌익위는 이 작은 동백궁 안에서조차 숨이 차 헉헉거렸다.
굳은 얼굴이 되어 앞뜰로 돌아온 자한이 하문하였다.
“승휘… 아니 양원은 어디 있는 것이냐?”
차갑디차가운 목소리에 좌익위는 등골이 오싹하였다.
‘승휘 마마를 왜 양원 마마라 하시지?’
두화가 양원으로 승격된 것을 아직 몰랐던 좌익위는 잘못 들었거니 싶어, 일단 동백궁 주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리려 했다.
“저하.”
‘저를 보고자 살아 돌아왔는데, 어딜 간 것이야!’
혹, 반란군에….
이내 도리질을 쳤다.
만약 그랬다면 부왕이 편전에서 그리 말하지도 않았겠지.
‘아니면, 더는 궁이 싫어 도망이라도 간 것인가?’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에 좌익위를 다그쳤다.
“어디 갔느냐 물었느니!”
겨우 숨을 갈무리한 좌익위는 무섭도록 찬 바람 쌩쌩 부는 세자에게 고하였다.
“사가에 가신다고 하셨나이다.”
“…사가?”
“예.”
“하아!”
자한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훅 풀려 주저앉았다.
그러자 사림이 냉큼 달려와 주위를 둘러보며 일으키려 했다.
“체통을 생각하시옵소서.”
“체통이고 뭐고… 하아. 너도 좀 앉아.”
자한은 일으키려 하는 사림의 손을 밑으로 확 잡아끌어 앉혔다.
“나는 저 보려고 한숨 자지 않고 달려왔더니, 사가에 갔다고?”
거친 숨을 내쉬며 동백궁 침소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가만두면 세자 혼자 또 곡해하여 찬 바람 불겠구나 싶어서, 좌익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간밤 반란이 난 건 아시옵니까?”
“들어 알고 있다.”
“다급한 상황이라 소인이 궁 밖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마마께서는 부득부득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중궁전으로 가셨었나이다.”
“중궁전엘? 은혜는 또 무슨 말이더냐?”
언짢은 것이 확 느껴질 정도로 미간이 좁혀졌다.
“저하께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실 동안, 승휘 마마께서도 이곳에서 매일 목숨을 거셨나이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난 자한의 눈이 매섭게 희번덕거렸다.
“목숨을 걸다니, 그게 무슨 소리더냐!”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사람처럼 호통치던 세자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승휘 마마께서 회임하셨나이다.”
“개방 사람들에게 들어 알고 있다.”
“회임한 승휘 마마께서는 저하께서 출병한 날 이후로, 매번 세자빈궁으로 불려가 그때마다 고초를 겪으셨나이다.”
분노를 참는 듯 자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해솔, 숨기는 것 없이 전부 다 고하거라.”
“예, 한번은 영애들을 부른 자리에서 신분을 가지고 망신을 주려 했다는데, 자세한 사항은 소인들이 세자빈궁엔 들어가지 못하니 알 길이 없었나이다.”
“음.”
“같은 날, 회임한 마마께 쥐를 가지고 놀라게 하려 하시다가, 오히려 영애들과 세자빈께서 마마께 된통 당해 난리가 난 적이 있었나이다.”
쥐라는 말에 무슨 상상을 하였는지, 곁에 있던 사림이 웃음을 참느라 쿡쿡거렸다.
“그게 다이더냐?”
“매번 맹지 수규가 웃전에 알리려 하였지만, 그런 것은 별것 아니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시더이다. 하나, 이후 세자빈께서 각궁으로 마마를 쏘시어, 랑과 성무가 간발의 차이로 막았나이다.”
“허!”
기가 차다.
감히 두화를 사냥하려 해!
“또 찻잔에 독을 발라 독살하려 하였었고, 좌의정이 자객을 보내 동백궁을 급습하였었나이다. 다행히 무사히 위기를 넘겼지만, 익위사 셋이 부상당했나이다.”
“뭐라? 독살? 자객?”
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제 아비와는 그래도 다르겠지 여겼다. 한데 그 아비보다도 더한 짓들을 제가 없는 틈을 타 벌였다. 그것도 회임한 여인에게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행했다.
“해서 양원과 아이는 무사한 것이냐?”
“예. 잘 이겨내셨고, 매번 위급할 적마다 중전마마께서 도움을 주셨나이다.”
“중전께서?”
다른 사람도 아닌 중전이 두화를 감쌌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
“중전마마와 승휘 마마께서는 부쩍 가깝게 지내시고, 또 중전마마께서 마마를 무척 챙기시는 것을 소인들도 보았나이다. 하여 독살 사건이 발생한 날도 중전마마께서 세자빈궁에 납시어 중도에 막았기에, 승휘 마마께서 무탈하실 수 있었나이다.”
“흠.”
“중전마마께서는 세자빈이 죄를 은폐할까 싶어, 증좌가 되는 것들을 수거해 조사케 하시고, 그 사실을 주상전하께 고하시어 옥에 가두라 하셨나이다.”
정황상 앞뒤가 맞질 않는다.
“하면 좌의정은 어떻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냐? 옥에 갇혔다면서?”
“주상 전하께서 하옥하라 명을 내리신 날, 세자빈은 옥에 갇혔지만, 좌의정은 이미 도주하였다고 알고 있었나이다. 며칠 동안 잡히지 않았는데 기어이 전날 밤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옵니다.”
‘내가 없는 동안 두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구나.’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자한은 당장이라도 두화를 봐야 했다.
무사하다고 하였으나, 회임한 몸으로 그 고초를 겪었으니 어디가 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미칠 것만 같다.
“저하, 마마께서는 전날 주상전하와 중전마마를 구하셨나이다. 마마가 아니었다면 중전마마께서는 반란군의 손에 돌아가셨을 것이옵니다. 그 정도로 위급하였는데, 마마의 지혜와 결단력으로 결국 모두를 구할 수 있었나이다.”
“…”
자칫 중전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란 말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끔하다.
앙숙처럼 지내 온 나날이다. 하나, 결코 원수처럼 미워서 앙숙이 된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제 삐뚤어진 마음 때문에, 곁을 내주려 했던 중전을 계속 밀어낸 것뿐이다.
‘무탈하시다니… 다행입니다.’
“하옵고… 위기의 순간 중전의 사가 사람들과 개방 사람들이 반란군을 진압하여 모두 진압할 수 있었나이다.”
“개방 사람들이라면, 방주도 왔었느냐?”
“예. 하온데 방주라는 자가 무례하게도 전하께 검을 겨누는 일이 있었지만, 승휘 마마께서 막으셨고, 결국 돌아갔나이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직접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이렇게 답답하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자세한 것은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들을 수 없었으나, 감히 주상전하께서 방주라는 자에게 무릎을 꿇으셨나이다.”
“…!”
부왕이 방주에게 무릎을 꿇다니!
자한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대관절 부왕과 방주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기에, 왕이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사림아, 들었느냐?”
“예.”
“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자세히 알아 오너라. 난 나갔다 오마.”
“예? 저 없이 혼자요?”
“걱정되느냐?”
“아휴, 걱정은요 뭘.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에서도 사신 분인데 여기서 뭐가 위험하다고요. 다녀오십시오.”
“죽다 살아오니 예전의 건방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한쪽 눈썹을 찌푸린 세자의 모습에 사림은 몸을 사리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말씀을 또 그리하시옵니까? 소인은 맡기신 일을 처리하러 후딱 다녀오겠나이다.”
쌩하니 사라지는 사림의 뒷모습에 혀를 짧게 차고는 몸을 돌렸다.
“좌익위 해솔은 날 따르라. 세자궁에 가서 준비를 마치는 대로 출궁할 것이니라.”
“예, 저하.”
***
언덕에 도착한 두화가 가마에서 내려 개울가 움막을 눈으로 훑었다. 여전히 순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큰소리 내기 좋아하는 삼촌들의 버럭질까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마마, 소인이 모셔올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갈 것이야. 모두 다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 절대로 따라오지 말고!”
“아니 되옵니다. 중전마마 명이 있으셨다고….”
맹지는 난처한 표정으로 가마 뒤편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궁인을 흘깃 쳐다봤다.
“맹지야, 넌 내 사람이지?”
“예.”
“하면 누구의 명을 들어야 하지?”
“그야 마마의… 아니, 그게 아니지요.”
“다녀올게. 여긴 내가 살던 곳이고, 저들 모두 내 삼촌이고 내 조카들이야. 하니, 안심하고 예 있어.”
맹지와 호위들을 뒤로하고 두화는 언덕길을 조심해서 내려갔다.
난데없는 귀족 부인의 행차에 거지들은 힐끔거리며 수군덕댔다.
그때 개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두화 누이다! 두화 누이가 돌아왔다!”
그제야 모두 언덕길을 내려오는 귀족 부인이 바로 두화라는 것에 놀라 달려왔다.
“그동안 어찌 된 일이야?”
“그랴, 그동안 궁에 있었다며?”
“이제 돌아온 것이냐?”
저마다 반가워, 염려하는 그 마음이 담긴 안부에 두화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밖이 소란스러움에 일랑이 거적때기를 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곱게 차려입은 여식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한다.
‘부인의 모습을 쏙 닮았구나.’
궁에서는 급박한 상황이라, 여식이 무사한지만 보느라 급급하여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였다.
“아버지.”
“…어찌 왔느냐?”
일랑은 마음이 약해질까, 반가운 마음과 달리 매몰차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버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르는 여식의 목소리에 일랑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었다.
“…”
두화를 보고 반가워 몰려든 사람들은 방주와 두화 사이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모두 흩어져 눈치를 살폈다.
주위가 조금은 한산해지자, 두화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누가 아버지라고 그리 부르십니까? 이곳은 천것들이 있는 곳이니 돌아가십시오.”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네?”
“높으신 분께서 이런 곳 함부로 드나드는 것 아닙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움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부친의 옷자락을 잡았다. 낡고 낡은 의복이 손끝에서 까슬거린다.
‘나만 호의호식했구나. 아버진 이리 지내시는 것을….’
“아버지, 정말 이러실 겁니까? 정녕 소녀와 연을 끊으려고요?”
“놓거라.”
“싫습니다.”
“놓으래도!”
버럭 호통에 두화도 빽하니 소리쳤다.
“싫어요, 죽어도 못 놓습니다.”
“하아.”
저 소고집을 누가 말릴까.
일랑은 머리가 지끈댔다.
여식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여식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무리 반란군을 제압하여 공을 세웠다 한들, 대신들은 끝내는 여식을 궁에서 몰아낼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제가 먼저 확실하게 연을 끊어 남남이 되어 사라지면, 적어도 공을 세운 여식을 궁에서 내쫓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짐을 쌀 걸 그랬군.’
그러잖아도 오늘이 가기 전, 움막을 떠나 이참에 화월국 곳곳을 돌 계획이었다.
“아버지는 저 안 보고 살 수 있어요?”
“…그래.”
“거짓말! 아버지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전… 저는 그리 못합니다.”
“네가 끌어안을 몫이다.”
“싫어요. 내가 매번 아버지 말을 잘 들으니까 이번에도 그러겠지 하시겠지만, 어림없어요. 이번만큼은 아무리 아버지가 내쳐도 절대, 전 그리 못 해요.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과 연을 끊으려 합니까?”
허이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제 아비 가슴에 못질하고, 뭐 그리 잘했다고 이리 큰소리치며 억지를 쓰는지 원!
“너, 지금!”
두화는 목청을 높였다.
“예.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대드는 겁니다. 어디 연 끊어 보십시오. 나중에, 엄청 나중에 어머니 뵈면 다 이를 겁니다. 아버지가 하나뿐인 저… 버리셨다고.”
“뭐, 뭐라!”
어처구니없는 억지에 일랑은 기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그때 막돌이가 껄껄대고 웃으며, 움막의 거적때기를 치우고 나왔다.
“방주님, 고마 두화 용서해 주십시다. 아까지 가진 아를 저리 세워놓으면 씁니까?”
“자넨 좀 빠지고.”
“치, 막돌 삼촌도 아는 걸 아버지만 모르셔.”
툴툴거리는 두화를 찌릿 노려본 일랑이 막돌에게 손짓했다.
“와요, 두화 대신 날 패려고요?”
눈치만 빠른 덩치 큰 녀석 같으니라고!
일랑은 앓는 소리를 하며 아직 잡혀있는 옷자락을 내려다봤다. 거칠기만 하던 손이 여염집 아씨 손처럼 고와졌다.
‘가문이 그리되지 않고, 부인만 살아 있었어도 이리 곱게 자랐을 것인데….’
“참, 두화 너 그거 아냐?”
“…”
막돌이가 웃으며 두 사람 주위를 맴돌았다.
“아까 보니까 승전고 울리면서 세자가 돌아오던데?”
부친의 옷자락을 꼭 쥐고, 조금은 작아진 부친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두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가, 돌아오셨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