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9)화 (79/96)
  • 79. 돌아오다.

    연 상궁은 찻상을 내려놓으며 두화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이내 중전의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중전의 표정이 놀람과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되었구나. 잘 되었어.”

    “예, 소인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두 사람은 정말 기뻐하는 얼굴로 두화를 다감하게 바라봤다.

    “연 상궁, 저기 내 함을 가져오거라. 그리고 먼젓번에 들어온 비단 있지 않더냐?”

    “예, 최고급 비단으로 5필 들어왔사옵니다.”

    “다 가져오거라.”

    “예? 다요?”

    다소 놀란 듯 연 상궁이 되묻자, 중전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어여 가져오라고 손짓한다.

    “그래. 얼른!”

    또 중전의 급한 성격이 나온다.

    가만히 중전을 지켜보던 두화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간다.

    ‘분명 내가 승격되어 저리 좋아하시는 것이겠지?’

    연 상궁이 비단과 함을 가져오자, 중전은 함과 비단을 두화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며느님, 종3품 양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하는구나.”

    “예, 중전마마.”

    “어? 뭐야, 알고 있었느냐?”

    고개를 갸웃한 중전의 미간이 좁혀져 물었다.

    “중궁전에 들기 전에 들었나이다.”

    “한데도 내게 귀띔도 안 해줄 참이었더냐?”

    “말씀 올리려 하였는데, 못난이처럼 우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중전은 두화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웃었다.

    “되었느니라. 간밤 네 공을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세자빈에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만, 반란군 때문에 조정이 당분간 시끄럽겠지. 전하께옵서도 상황을 고려해 그리 명하신 것일 게야.”

    “망극하옵니다.”

    두화의 손을 맞잡은 중전이 웃으며 말하였다.

    “왕자를 낳거라. 하면 내 반드시 너를 세자빈에 올릴 것이야.”

    “중전마마!”

    “공주를 낳아도 세자빈으로 올릴 것이니라. 하나, 이왕지사 왕손이 귀한 왕실이니 왕자를 낳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구나.”

    이러다 왕자가 아닌 공주가 태어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두화의 표정에 그려졌다. 그것을 읽은 중전이 웃으며 손등을 다독였다.

    “뭐, 공주든 왕자든 난 상관없다. 그저 건강한 아기 울음소리가 궁에 퍼졌으면 좋겠구나.”

    “이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마마.”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다.

    “에고, 또 우는구나. 배 속 아기가 어미 닮아 울보이면 어쩌누?”

    또 농으로 마음을 편케 해주려 하는 중전 때문에 두화는 부러 활짝 웃었다.

    “이제부터는 마음 편하게 태교하면서 세자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무탈하신지 걱정이옵니다.”

    “무탈할 것이다. 세자가 막 누구한테 지거나 할 성품은 아니지 않더냐?”

    히죽 웃는 중전이다.

    “저, 중전마마.”

    “응?”

    “감히…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두화가 조심스레 말하자, 중전도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와 두화를 바라봤다.

    “무엇이기에 이리 무게를 잡을꼬? 편하게 말해 보아라.”

    “아버지를 뵙고 오고 싶사옵니다.”

    “춘부장을?”

    “예. 전날 그리 가셔서 마음이… 편치 않사옵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지라 중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느니라. 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만 출궁을 허락할 것이야.”

    “예.”

    출궁 허락을 받은 두화는 동백궁으로 돌아와 궁을 나설 채비를 했다. 평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수수하게 틀어 올렸다.

    “마마, 아직은 위험하지 않겠사옵니까?”

    “익위사 둘을 데려갈 것이야.”

    “그래도….”

    “이참에 너도 바깥바람 좀 쐬고, 사가에도 다녀오거라.”

    “…소인은 사가가 없나이다.”

    궁인들도 궁 밖 사가가 있어, 달에 한번 삭료를 받으면 사가로 보내고, 외출도 할 수 있기에 당연히 맹지도 그런 줄 알았다. 가만 돌이켜 보니, 그동안 맹지가 사사로이 궁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아, 생각도 못 했구나. 이런.’

    괜히 아픈 마음을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한 두화는 풀 죽은 맹지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 뭐, 그럼 나랑 종일 다니는 영광을 주마, 어떠냐?”

    우스갯소리로 마음을 풀어 주려 부러 웃으며 말하였다.

    “예, 그리하겠나이다.”

    “그래, 가자.”

    동백궁 중문을 열자, 웬 가마가 떡하니 놓여 있다. 그리고 가마 뒤로 검을 든 호위무사 열 명과 궁인 다섯이 두화를 향해 예를 취했다.

    “좌익위, 이들은 누구인가?”

    “예, 마마. 중궁전에서 보낸 사람들이옵니다. 가마가 땅에 닿기 전까진 가마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 엄명이 있으셨나이다.”

    해솔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아….”

    중전마마의 넘치는 호의와 배려에 두화는 버거운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이 가마에 올랐다.

    가마와 따르는 이들을 본 맹지는 괜히 우쭐하여 발걸음이 신났다.

    하지만, 정작 두화 곁에서 호위해야 할 랑과 성무는 그 뒤로 멀찍하니 따라나섰다.

    ***

    한편 한 번의 쉼 끝에 밤을 새워 이동하기를 여러 날, 자한은 드디어 도성의 문턱에 들어섰다.

    “저하, 드디어 도성이옵니다.”

    “그래, 돌아왔구나.”

    자한은 궁이 있는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뚫어지게 바라본들 뭔 사태가 일어났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저 마음이 조급해 눈으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내 말 머리를 돌려 도헌에게 다가갔다.

    “난 먼저 궁으로 갈 터이니, 승전고를 울리며 서둘러 따르게.”

    “조금만 더 가면 되오니 함께 가시지요. 만약 궁에 일이라도 생겼다면….”

    “하니, 내가 먼저 가는 것이다.”

    이내 사림과 함께 빠르게 사라지는 세자의 뒷모습을 본 도헌은 기분이 가라앉는다.

    분명 병사는 이쪽에 있거늘 무슨 자신감으로 저리 서둘까?

    ‘두화가 걱정되어 그러는 게지. 나 또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거늘.’

    “자, 모두 서둘러라.”

    둥, 둥!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의 승전고가 도성에 울리기 시작하였다.

    너도나도 길거리로 나와 빠르게 궁으로 향하는 병사들을 향해 환호하였다.

    “허이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는데 우째 저리 서두는감?”

    “자네는 모르는가 보네? 밤새 난리였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라님 계시는 궁에 좌의정이 역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데 글쎄.”

    “허허, 그랴? 해서 어찌 되었는감?”

    “어찌 되긴! 내 듣자 하니, 중전마마의 사가에서 막아냈다지 아마.”

    대화를 나누던 두 사내의 사이로 허름한 차림의 덩치 큰 사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것도 맞는디요. 실상은 어찌 되었는가 하면, 그 뭐냐. 개방의 방주가 개방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가 반란군을 제압했다는디, 여기서 놀랠 노자는!”

    “뭔데?”

    “그랴, 뭔디 그리 말을 끊어, 사람 답답허고로.”

    헛기침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저 멀리 울리는 승전고 소리보다도 더 작게 속삭였다.

    “흠흠, 그 개방 방주란 사내가 바로… 20여 년 전 억울하게 역모죄로 처형되었던 천씨 가문의 천대감이래요!”

    두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뭣이여, 그거이 참말인감?”

    “허이고, 그거이 참말이면 다행이제. 그분 같은 분만 있어도 우리 같은 놈들이 굶주리는 법은 없으니께. 귀신이 되어 돌아오셨다고 해도 다행이제.”

    듣던 사내는 그의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맞네, 맞아. 근데 정말 참말인감?”

    “맞다니께요. 내가 소금 장수인디 새벽에 떠날 차비 하려는데, 궁 있는 곳이 하도 시끌시끌거려 봤더니, 전쟁통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니께요. 한데 복면인들이 그 높은 궁 담과 지붕을 가볍게 타고 넘어가서는 와….”

    이야기를 듣던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쨌든 잘 되었네. 욕심 많은 좌의정 같은 놈 끌어내리고, 천대감이 돌아오셨으니 이제 화월국도 제대로 돌아가는겨.”

    “그려, 맞네. 어찌 돌아가신 분이 살아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신령님이 돌봐 주셨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제. 허이고, 이리 좋은 날 가만 있을 수 없지. 탁주나 한 사발 들이켜자고. 이런 기쁜 소식은 도성 내 사람들이 죄 알아야 하지 암만.”

    “그려, 그려.”

    두 사내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주막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들을 지켜보던 막돌의 입 끝이 살짝 올라갔다.

    ‘방주님이 아무리 거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왕이 방주님의 신원을 복권한다고 명하셨다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 더 큰 뜻으로 백성을 살피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돕겠습니다, 방주.’

    하늘을 올려다보던 막돌이는 인파 속으로 금세 사라졌다.

    ***

    한편 말을 타고 빠르게 다가오는 이가 세자임을 안 궐문 수위가 서둘러 궁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이내 궁 안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세자와 사림을 본 숙위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도성의 거리를 울리는 승전고와 저 멀리 보이는 기나긴 대오의 모습에 궐문 수위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전쟁에서 승리하셨구만.”

    “잘 되었네. 이제 되었어.”

    “한데 저하께서는 어찌 저리 먼저 가셨지?”

    “글쎄, 혹 반란군에 대한 것을 전해 들으셨나?”

    궐문 수위들이 주거니 받거니 할 동안 자한은 이미 편전까지 당도하였다.

    안쪽에서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꽤 시끌시끌한 소리가 밖까지 들렸다. 편전 앞을 지키던 내시가 반가운 표정으로 고하려 하자 자한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되었다, 내 직접 들어가마.”

    “저하, 무탈하게 돌아오시어 다행이옵니다.”

    “고맙구나.”

    한껏 들숨을 삼킨 자한은 직접 편전 문을 열며 들어섰다.

    한참 옥신각신하며 반란군을 추국하지 않고, 서둘러 처형하자고 언성을 높이던 이들 중 하나가 세자를 보고 소리쳤다.

    “세자 저하!”

    그러자 옥좌에 앉아 눈을 감고, 대신들의 피곤한 소리를 듣고 있던 왕이 눈을 번쩍 떴다. 정말 아들이다.

    벌떡 일어나 성큼 내려온 왕이 자한의 어깨를 잡아 살피고는 이내 끌어안았다.

    “전하, 소신 정갈하지 못하여….”

    “되었다. 이리 무탈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과인은 기쁘기 그지없구나.”

    “승리하였나이다. 소신과 병사들이 그리고 수많은 개방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성라국을 물리쳤나이다.”

    자한의 말에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탈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여겼거늘 전혀 가망성 없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다니, 실로 놀랍지 아니한가.

    왕 또한 놀라 물었다.

    “수적으로 밀리는 그들을 어찌 이겼느냐?”

    “모두 개방의 방주 덕분이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소신도 그리고 병사들도 모두 그곳에 묻혔을 것이옵니다.”

    개방의 방주라는 말에 왕의 동공이 흔들렸다.

    ‘일랑, 그대는 과인과 세자를 살렸구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는가, 일랑?’

    대신 중 누군가 소리쳐 외쳤다.

    “주상 전하 만세, 세자 저하, 만세! 화월국 만세!”

    잠시나마 대신들도 이때만큼은 체면 생각하지 않고 만세를 외치며 기쁨을 누렸다.

    내부의 반란을 막았다 하더라도, 만약 전쟁에 패하여 성라국이 도성까지 진입한다면, 그땐 화월국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한데 그 큰일을 세자가 막아냈다.

    “고맙구나, 큰일을 하였어.”

    “전하, 그동안 고생한 병사들과 개방 사람들에게 상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하나, 일단 간밤 일어났던 반란에 대해 논의를 마치고, 마저 말하자꾸나.”

    “…!”

    ‘결국 일어났군.’

    서둘러 온다고 왔거늘 이미 벌어졌다니, 자한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전하께옵서는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왕을 두루 살피는 자한의 모습에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승휘… 아니지, 양원이 중전과 과인을 구했느니라.”

    “예?”

    ‘양원?’

    “그 이야긴 차차 하자꾸나. 일단 세자는 봐야 할 이가 있지 않으냐?”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왕은 지금 순간만큼은 어느 아비와 같았다. 무탈하게 돌아와 다행이고, 나라를 지킨 아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

    동백궁으로 달려가는 자한에게 그동안 아무렇지 않던 갑옷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체통도 생각지 않고 달려가면서, 하나씩 벗어 던졌다.

    그 뒤를 따르던 사림이 세자가 늘어놓은 갑옷을 챙겨 따라갔다.

    ‘아바마마께서 두화를 양원이라 칭하셨다. 두 분을 구했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동백궁 중문에 다다라서야 자한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기침이 나올 지경이다.

    익위사들은 별안간 나타난 세자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모두 바닥에 반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세자 저하를 뵙사옵니다!”

    “그래, 다들 고생하였다. 일어들 나거라.”

    좌익위가 다가오자, 자한은 손을 들어 만류하였다.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는 추후 보고받도록 하지. 일단 먼저 봐야 할 이가 있다.”

    그제야 좌익위가 웃으며 자리를 비켜섰다.

    “예, 하오나 저하!”

    좌익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자한은 중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두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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