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8)화 (78/96)
  • 78. 많이 아프더냐?

    살기 어린 설변도의 눈빛 때문에, 호조판서는 그 기세에 눌려 편전 회의에서 있었던 것들을 죄 말하였다.

    “여기서 나가면 대신들의 움직임, 그리고 곧 돌아올 세자의 동태를 살펴, 무엇이든 내게 알려.”

    “아, 아니. 내가 왜 그래야 하는….”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내 죽더라도 네놈은 꼭 데려가 주지.”

    덜컹!

    순간 형형한 눈빛으로 나무 철창을 치는 바람에, 순간 흠칫 놀란 호조판서가 뒤로 물러났다.

    “무, 무슨 말을 그리 살벌하게 합니까, 대감.”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해. 뭐든 작은 거라도 좋으니 수상쩍다 싶으면 내게 알리란 말이다.”

    살고자 버둥대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내가 미쳤지. 왜 여길 와서는….’

    한숨을 내쉰 호조판서는 그리하겠다고 약조를 하고는 옥에서 나왔다.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치부책만 찾으면 이 짓도 끝이다. 아휴! 곧 죽을 마당에 뭔 기세가 저리 등등해서는….’

    옥사를 노려보며 혀를 찬 호조판서는 누가 볼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

    간밤 그 난리 통에 대비는 대비궁의 중문을 걸어 닫고, 한 상궁과 함께 작은 창고에 숨어 있었다.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에, 겁에 질려 동이 틀 때까지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비마마, 소인이 바깥 상황을 보고 올까요?”

    대비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고 밖으로 나가려는 한 상궁의 치맛자락을 잡아 도로 앉혔다.

    “아니 된다. 자칫 여기도 발각되면 놈들이 어찌 나올지 알고? 내 언젠가는 좌의정 그놈이 이런 일을 벌일 줄 알았지. 진즉 쳐냈어야 했는데… 우리 주상은 어찌 되었을꼬?”

    “무탈하실 것이옵니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대비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늙어서까지 권력이 뭐라고, 이깟 것을 움켜쥐고 있다가 내 아들마저 위험에 빠트렸구나! 내가. 어찌하면 좋으냐? 전쟁에 나간 귀한 우리 세자도 걱정이고, 당장 우리 주상도 걱정이고… 다, 내 업보구나. 업보야.”

    “대비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선조께옵서 굽어살피시어 이번 일을 무탈하게 넘기면, 내 우리 주상과 세자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모든 권력을 내려놓을 것이야. 하니, 부디 무사하기만을….”

    말이 끝나자마자 창고 문이 덜컥거리기 시작하였다.

    대비와 한 상궁이 동시에 문 쪽을 홱 바라봤다.

    “저것들이 이제 이 늙은 것을 잡으러 왔구나.”

    한 상궁은 자신도 겁이 났지만, 두 팔로 대비를 보호하려 들었다.

    “소인이 끝까지 함께 할 것이옵니다.”

    “내 자네와 오랜 시간 함께 했지? 고마웠다, 한 상궁.”

    “소인도 모시면서 행복했나이다.”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그때 소란한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부서져 떨어졌다.

    “여기 계시옵니다, 주상 전하!”

    병사가 소리치자, 왕이 달려와 먼지 쌓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비를 살폈다.

    “어마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주상? 정녕 주상입니까?”

    “예, 소자이옵니다. 소자의 불찰로 어마마마를 곤경에 빠트렸나이다. 용서하시옵소서.”

    왕이 눈물을 흘리자 대비는 왕의 팔을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어찌 주상 탓이겠소. 그 못된 좌의정 때문이지.”

    “반란군은 모두 제압하였으니, 그만 일어나시옵소서. 옥체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대비는 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관은 당장 어의를 부르고, 대비마마를 안으로 모시거라.”

    “예, 전하.”

    방 안으로 대비가 들어가자, 왕은 대전으로 향하였다.

    ***

    궁내 상황을 알아보러 나갔던 맹지가 돌아왔다.

    “마마, 소인 맹지이옵니다.”

    두화의 대꾸가 없다.

    맹지는 웃전을 걱정하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동백궁으로 돌아온 뒤 두화는 자리를 보존하고 누웠다.

    반란군을 진압하고 동백궁으로 돌아온 즉시 어의를 불러 진맥했을 당시, 조금 놀란 것 빼고는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한데도 웃전의 낯빛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멍하니 천장만 보고 누워있는 두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하께서 반란군을 직접 추국하신다고 하옵니다.”

    “그래….”

    “하옵고 마마의 가문과 춘부장의 신원을 복권하신다고 하옵니다.”

    “…!”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두화를 맹지가 부축해 앉혔다.

    “아버지를?”

    “예. 편전에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하옵니다. 천 가문과 춘부장의 신원을 복권하라 라고 말입니다.”

    눈물이 절로 차오른다.

    ‘아버지….’

    “또 마마를 승휘에서 종3품 양원으로 승격하신다고 직접 말씀하셨사옵니다.”

    “양원?”

    “예. 그리고 무엇보다 세자빈을 폐위한다고 하셨사오니, 실질적으로 이제 마마께서는 궁중의 여인 중 중전마마 다음으로 높으신 분이옵니다. 만약 마마께옵서 왕자 아기씨라도 생산하시면, 그땐 세자빈의 자리까지도 오르실 수도 있으실 것이옵니다.”

    “잘은 몰라도 나도 알 건 알아. 세자빈이 폐위되었지만, 또 다른 귀족 집안에서 세자빈이 될 여식을 들이밀겠지.”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두화의 말에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맹지는 두 눈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옵니다. 저하께서 어떤 분인데요. 마마께서 세자빈에 오르지 않으셔도, 분명 다른 세자빈 후보는 받지도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래. 정말 그러셨으면 좋겠다.”

    막상 두화가 이리 말하니, 순간 당황한 맹지가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투기하면 안 되는 줄 아는데, 세자빈 때문에 너무 힘들었나 봐. 저하 곁에 다른 여인이 없으면 좋겠어.”

    “분명 그러실 것이옵니다.”

    “그나저나 저하는 어찌 되신 걸까? 무탈하신지 걱정이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본다.

    선선한 바람이 창틀을 넘어 들어찬다. 기분 좋은 바람에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마마, 드실 거라도 차려올까요?”

    “됐어. 생각이 없네.”

    “어찌 이러시옵니까?”

    “…그냥.”

    전날 부친이 연을 끊자는 말과 함께, 차갑게 돌아서는 그 모습이 자꾸만 생각난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

    어찌해야 부친의 기분을 풀어드릴까, 지금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

    ‘본래의 신분이 복권되었으니, 한번 찾아봬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마치자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찌 일어나시옵니까?”

    “중궁전에 가야겠어.”

    “지금이요?”

    “응.”

    하루 사이 부쩍 수척해 보이는 얼굴이라 걱정이 앞섰지만, 어딘지 단호한 모습에 맹지는 일어나 웃전을 모신다.

    “소인이 앞장서겠나이다.”

    밤사이 전쟁과도 같은 시간이었기에, 그 잔해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핏물이 스며든 땅을 피해, 중궁전으로 향하는 두화의 발걸음이 사뭇 빠르게 움직였다.

    중궁전 앞뜰에도 간밤의 흔적이 남아 있어, 끔찍하고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다시금 떠오른다. 도리질을 친 두화가 마음을 가다듬고, 잔해를 치우는 궁인을 피해 안으로 들어섰다.

    “중전마마, 승휘 마마 납시었나이다.”

    “오오, 그래? 어서 들라 하라.”

    안쪽에서 중전의 반기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 상궁이 옅은 미소를 띠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두화는 세 번의 휘장을 걷고 들어가서야 중전의 앞에 당도하였다.

    한데 오늘은 낯선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멈칫 걸음을 멈추고 듬직해 보이는 사내를 힐끗 보았다. 어딘지 낯이 익은데 선뜻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서 저를 맞이하는 중전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중전마마, 어찌 서 계시옵니까? 좌정하시옵소서.”

    중전은 두화의 손을 맞잡아 상석의 자리로 이끌었다. 자신의 자리 옆에 앉히고도 손을 놓을 줄 몰랐다.

    “내, 승휘 덕분에 살 수 있었느니. 이 고마움을 어찌 갚아야 할꼬?”

    “아, 아니옵니다. 소인, 마마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옵니다. 저 혼자 살겠다고 어찌 부모를 두고 도망치겠나이까? 하온데 큰일을 겪어 혹 어디 미령한 곳은 없으시온지요?”

    염려하는 그 마음에 중전은 감복한 얼굴로 잡은 손등을 다감하게 다독거렸다.

    “이것 보세요, 오라버니. 우리 승휘가 이리 선합니다.”

    과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두화는 낯선 사내를 힐끔 바라봤다.

    “마마의 복이옵니다. 곁에 좋은 분이 계시니 이 오라비도 이제 한시름 놓겠습니다.”

    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하니, 저 사내가 바로 중전의 오라비인 모양이다. 간밤, 반란군과 맞서 싸우던 사내인 걸 그제야 떠올렸다.

    두화는 바로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승휘 마마, 예를 거두십시오. 예는 소신이 올려야지요.”

    중전의 오라비는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두화가 어쩔 줄 몰라 또 예를 갖추자 중전이 즐겁다는 듯 웃는다.

    “이런, 이런. 이러다 인사만 하다가 끝나겠습니다, 오라버니.”

    “흠. 승휘 마마도 오셨으니,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중전마마.”

    “예? 벌써요?”

    중전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소신, 중전마마께서 무탈하오니, 이제 제 자리로 가야지요. 부디 강녕하시옵고, 가끔은 사가에도 납시옵소서. 어머님께서 많이 보고 싶어 하시옵니다.”

    “예. 이제는 그럴 것입니다. 눈치 보지 않고, 어머니도 오라버니도 우리 장성한 조카들도 볼 것입니다.”

    “언제나 대문을 열어 중전마마 오시길 기다리겠나이다.”

    예를 취한 중전의 오라비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는 중궁전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중전의 눈가가 붉어진다.

    두화는 그 모습에 비단 손수건을 조용히 건네었다.

    “승휘 앞에서 주책없이 굴었구나.”

    “아니옵니다, 중전마마.”

    “내가 전엔 설변도 같은 이들 때문에, 사가와 연을 끊듯 스스로 그리 살았단다. 괜한 시비에 휘말려 나는 물론 죄 없는 내 부모와 형제들이 화를 당할까 봐, 거리를 두었었지. 한데, 이젠 그리 살지 않으려 한다.”

    “…”

    “너와 춘부장 덕에 살 수 있었지만, 또한 오라비와 가문이 제때 도와주러 왔으니 살 수 있었지. 해서 이젠 당당히 만나고 교류도 하려고 한다.”

    “예, 그러시옵소서. 혈육과 떨어져 지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그리움이 사무치는데, 얼마나 산다고 억지로 끊어내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같사옵니다.”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든 두화의 눈을 본 중전의 미간이 좁혀든다. 간밤의 일이 떠올라, 안쓰러움에 가만히 두화를 끌어안아 주었다.

    “…많이 아프더냐?”

    “아니라고는 못 하겠나이다. 마마.”

    “울고 싶으냐?”

    “…예.”

    “그럼, 울렴.”

    중전은 두화의 본명을 부르며 가만히 그 등을 천천히 쓸어 내려주었다. 작게 흐느끼는 몸에 중전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을까.

    부친에게 연을 끊자는 잔인한 소리를 면전에서 들었는데….

    “…우리의 인연도 참, 기막히구나.”

    “죄송하옵니다.”

    “네가 죄송할 것이 무에 있누? 그저 전하와 충신을 가만두고 보지 못하는 간신들의 못된 마음 때문이지. 내, 전하께 춘부장의 신원 복권을 부탁드렸느니라. 분명 들어 주실 거야, 하니 걱정하지 말고, 그만 울 거라.”

    두화는 가만히 중전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미 전하께옵서 그리해주신다고 공표하셨다고 하옵니다, 마마.’

    두화는 저를 생각해 주는 중전의 그 마음에 감사하여, 눈물이 자꾸만 났다. 알고 있다고, 또 자신이 종3품 양원으로 승격되었다고 고해야 하는데, 우느라 호흡이 딸려 말을 할 수가 없다.

    눈물 범벅된 볼을 본 중전은 혀를 짧게 차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인제 그만 울어야겠다. 이리 자꾸 울어 달덩이처럼 퉁퉁 부으면 언제고 세자가 돌아와 승휘를 몰라보면 어쩌려고?”

    힘들어하는 두화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케 해주려 중전은 웃으며 농을 건넸다.

    “그리 많이 부었나이까?”

    “아니니라. 못난이처럼 부었어도 내 눈엔 승휘가 제일 어여쁘구나.”

    “중전마마….”

    그대로 와락 중전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중전의 온기를 한참 느낀 뒤에야 두화는 떨어져 앉았다.

    잠시 후, 연 상궁이 눈치껏 따뜻한 차를 내왔다.

    “중전마마, 기쁜 소식이 있나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