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7)화 (77/96)
  • 77. 일랑의 눈물

    여식을 등지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던 일랑이 걸음을 멈췄다.

    “너와 난 오늘 부녀의 연을 끊었느니라. 이제 이곳이 네 집이고, 저들이 가족이니 부디… 잘 살아라.”

    조금은 쳐진 듯한 등에서 낮게 울리는 부친의 목소리에, 두화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대로 부친을 보내면 정말 끝일 것만 같다.

    그대로 뛰어가 부친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네?”

    “…놓거라.”

    “소녀가 잘못했어요. 어찌 부녀의 연을 끊으려 하셔요?”

    허리를 감싼 여식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 몸을 돌이켜 고개를 숙였다.

    “저하의 후궁이시니, 마마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찌 미천한 비렁뱅이와 연을 지속할 수 있겠나이까?”

    두화는 울면서 도리질 쳤다.

    “울지 마십시오. 그동안 궁 안에서 조금이라도 겪어봤으니 조금은 아시지 않습니까?”

    “흡, 아버지.”

    “궁이란 곳이 화려하지만, 한순간의 작은 실수로 죽어 나가기도 하는 무서운 곳입니다. 하물며 천한 거지가 부친이라 하면, 전하와 저하를 음해하려는 세력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어 마마를 곤란케 할 것입니다. 아니, 전하와 저하까지 무척… 곤란케 하겠지요.”

    그제야 부친이 왜 절 내치려는지 알았다.

    뜻이 같지 않아, 그 마음이 매몰차 내치는 것이 아니었다. 부친은 절 너무도 아끼어 부녀의 연을 끊어가며 절 보호하려 한 것이다.

    “아버지….”

    “이제 마마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니, 모든 이들 앞에서 오씨 가문의 화연으로 당당하게 서십시오.”

    “…!”

    어찌 아셨을까?

    아시고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두화가 주룩 눈물을 흘리자, 일랑은 아픈 가슴을 애써 숨기고 여식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며 속삭였다.

    “이리밖에 못 해 미안하구나.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딸아.”

    복수를 접었다고 하여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해가 뜨고 상황이 정리되면, 조정에서는 끊임없는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처벌을 논할 것이다. 더불어 20여 년 전 죽었어야 할 제가 살아남았고, 지금은 개방 방주이며, 세자의 후궁의 부친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연을 끊어낸다면, 적어도 전하가 여식을 보호할 수는 있다. 복수보다도 여식의 행복을 바라는 일랑의 눈이 붉어졌다.

    일랑은 여식의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왕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디 여식을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마치 일랑의 마음을 알아들은 듯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랑은 여식에게도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자리를 벗어났다.

    두화는 부친의 뒷모습을 뒤쫓으려 했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자리에 앉아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마마, 아기씨를 생각하시어, 고정하시옵소서.”

    맹지의 말에 두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밝아오는 여명 사이로 어디선가 꼭 부친이 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쉬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정신을 차린 왕은 호위무사 명과 함께 대전 앞뜰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 있는 반란을 일으킨 자, 모두를 옥에 가둬라. 금군은 당장 과인의 명을 받들어 시행하라!”

    근엄하며 강력한 왕의 하명에 금군은 고개를 숙이며 받들었다. 중전의 오라비도 그들을 도와 죄인들을 하옥하는데 끝까지 도움을 주었다.

    ***

    날이 밝아오자 왕은 의대를 갖추고, 대신들의 가택에 금군을 보냈다.

    -혹 남아 있을지 모를 반란군을 수색하는 한편 반란군에 해를 당한 충신은 없는지 살펴보라.

    왕의 하명에 금군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대신들이 반란군에게 감시당하며 가택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대부분 추포하였으나, 반란군 몇은 재빠르게 도주하였다.

    대신들은 서둘러 의복을 정제하고 입궐하였다.

    이미 옥좌에 앉아 기다리던 왕의 진노한 모습에, 대신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자리에 엎드려 죄를 청하였다.

    “전하! 전하를 보필하지 못한 소신들을 벌하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지은 죄가 있는 자들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자들은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내, 다 같이 잘살자고 그대들이 백성에게 저지른 자잘한 허물까지 눈감아 주었느니라. 한데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히!”

    “…”

    “감히, 역심을 품고 과인을 해하려 드느냐!”

    왕은 간밤 일어났던 반란에 대해 크게 격노하였다. 대신들을 향해 쉬이 말을 놓지 않던 왕이거늘, 호통치며 분개한 목소리가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믿지 못하겠구나.”

    “전하, 부디 성심(聖心)을 가라앉히소서.”

    “그대들은 모를 것이니라. 간밤 좌의정과 병조판서가 역심을 품고 과인과 중전을 그리고 승휘까지 죽이려 하였다. 과인이 역적으로부터 어찌 살아남았는지 아느냐?”

    격분하여 부들부들 떨리는 왕의 목소리에, 몇몇 대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다.

    특히 좌의정을 따르던 대신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왕의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다.

    개중 호조판서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하기 바빴다.

    ‘젠장, 좌의정은 일을 어찌했기에… 아니, 사전에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야. 잠깐, 그럼 전쟁은 어찌 되는 것이지?’

    분명 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전 모의를 할 적엔, 좌의정이 직접 반란을 일으킨다는 말은 없었다.

    다만 성라국과 입을 맞춰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따른 성의 표시를 하면, 조정에 자신들의 사람을 등용하고, 그렇게 권력을 키워 재물을 갈퀴로 긁듯 긁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염병, 이렇게 되면 진짜 전쟁이잖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좌의정의 가택에서 모인 자들의 이름과 가문을 적었던 치부책이 뒤늦게 생각이 났다.

    ‘하아, 제기랄. 그 치부책!’

    만약 치부책이 발견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좌의정 쪽 사람들 대부분은 파면에 그치지 않고 목숨을 잃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호조판서는 자신에게도 죄를 물을까 걱정되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고개 들 생각도 못 하고 제 살 구멍을 찾기 위해 눈알만 굴렸다.

    “과인의 목숨을 구한 이는 중전의 사가다. 그동안 그대들이 외척이라 등용하면 안 된다고 그리 외치던 중전의 사가 덕분에 과인이 살 수 있었던 말이다.”

    “…”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조금 전까지 분개했던 목소리와는 다른 어딘지 쓸쓸하면서도 낮게 가라앉은 왕의 목소리에, 대신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20여 년 전, 충신이었으며 과인에겐 벗이었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왕을 올려다보던 대신 중, 나이 지긋한 몇몇 대신들은 왕이 누굴 말하는지 단박에 떠올랐는지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저… 전하, 어찌 지금 죽은 이를 떠올리시옵니까?”

    “그래. 과인이 죽였었지. 한데 그자가 과인과 중전을 살렸느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소신 분명 기억하옵니다. 일랑, 그자는 20여 년 전, 죽었나이다.”

    믿기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하는 대신에게 왕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말을 이어갔다.

    “과인의 눈으로 확인하였다. 해서 과인과 중전을 구하고, 반란군을 잡아 공을 세운 천일랑의 신원 복권을 명하노라!”

    “…!”

    일랑이 충신임을 알고 있는 몇몇 대신들은 죽었던 그가 살아있다고 하니 놀라면서도 반기는 기색이다. 그에 반해, 좌의정 편에 있던 몇몇 대신과 중립을 지키던 대신들은 이내 수런거리기 시작하였다.

    중립을 지키던 대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소신 조한섭 아뢰옵니다. 듣기로 20여 년 전 천일랑은 이미 역적으로 기록이 남았을 터인데, 윤음을 번복하여 그자를 복권한다면 이는 역사적 사실을 적은 기록을 번복하여야 하며, 전하의 명예도 땅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대신의 말도 맞다.

    왕의 입에서 한번 나간 윤음은 번복하지 않는다. 이미 사관이 사실과 더불어 왕의 명까지 적어 기록한다. 한데 과거의 일을 번복하여 죽은 이의 신원을 복권한다면, 사서가 적은 기록 모두 다시 적어야 하며, 이 과정은 실로 번잡하다.

    “안다.”

    “…전하.”

    “사관은 과인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적거라. 과인은 왕이다. 왕이기에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잘못된 것 또한 바로 잡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느니라.”

    왕의 근엄한 모습에 대신들은 그저 경청할 수밖에 없다.

    “하여 과인은 과거에 과인이 벌인 과오에 대해 반성하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역적이 된 천일랑과 그 가문을 복권한다. 사관은 이 모든 것들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다시 적어 과인에게 직접 가져오라.”

    편전의 구석에서 왕의 명을 받아 적던 사관은 이내 일어나 고개를 숙여 왕명을 받들었다.

    “또한 세자의 후궁 승휘의 복권을 명한다.”

    여기서 세자의 후궁이 왜 거론되는지, 조금은 황당해하던 대신들이 왕을 올려다봤다.

    “오씨 가문의 화연 승휘의 진짜 신분은 천씨 가문 일랑의 여식 천두화이니라. 간밤 반란이 일어나 중전이 죽을 위기의 순간에 처했을 당시, 회임한 몸으로 중전을 구하고 과인을 구하기 위해 대전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왔도다. 이에 과인은 승휘를 종3품 양원에 봉한다.”

    왕의 말에 대신들은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세자의 후궁이 천씨 가문의 여식이라는 것에 놀랐고, 중전과 왕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썼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하여 승휘의 후궁 승격을 반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간 회임한 양원에게 갖은 흉포한 짓을 저지르고, 반란에 가담한 세자빈을 폐위한다. 옥에 갇힌 설변도와 병조판서 그리고 세자빈을 과인이 직접 추국할 것이니라!”

    대신들은 왕명에 고개를 숙여 받들었다.

    무겁기만 하던 편전 회의가 파하고 밖으로 나온 대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반란에 대해, 혹은 천씨 가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한편 좌의정 편에 있던 호조판서는 조심스레 그 자리를 벗어나 옥사로 향하였다.

    ‘치부책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찾아 없애야 해. 이대로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치부책을 찾기 위해 옥사로 향한 호조판서는 뇌물을 주고 옥사로 들어갔다.

    호조판서가 온 것을 본 병조판서는 설레발치며, 나무 창살을 잡고 매달려 울부짖었다.

    “이보게, 호판. 나 좀 살려주게!”

    나무 창살을 잡고 우는 모습에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거렸다.

    “거, 나잇살 먹은 양반이 징징대는 겁니까? 좀 조용히 하세요.”

    “호판! 우리 사이에 어찌 이러는 건가?”

    “우리 사이라니! 이 사람이 지금 뉘 가문을 망하게 할 작정인가! 에헴.”

    헛기침한 호조판서가 좁디좁은 옥사 안쪽에 눈을 감고 좌정하고 있던 설변도를 봤다.

    “좌상 대감.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주위를 경계하며 작게 말하였다.

    “왔는가?”

    “반란이라니요? 능윤군을 앞세워 반정이면 몰라도, 직접 반란을 일으킨다는 말은 없지 않았소이까?”

    호판의 말에 설변도의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내가 하는 일을 일일이 네놈에게 알려야 하겠더냐?”

    “…!”

    마치 자신이 왕이라도 된 듯한 어투로 말한다.

    호조판서는 어이가 없어 바라봤다.

    “내, 네놈이 예까지 온 이유를 모를 줄 아느냐?”

    “…흠.”

    “치부책, 그것 때문에 온 것이겠지?”

    호조판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리 말하는 걸 봐서는 치부책을 잘 숨겨둔 게야. 요사스러운 이무기 같은 놈 같으니.’

    설변도를 노려보던 호조판서는 헛기침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김윤석이 가지 말라고 그의 옷자락을 쥐고 놓지 않는다.

    “살고 싶으면 내 시키는 대로 하거라.”

    “뭐요? 아니 지금 옥에 갇힌 사람이 내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대감.”

    “필시 추국장이 설치되겠지. 게서 치부책을 발설하면 네놈과 네 놈 가문 또한 멀쩡할 수는 없을 것이니라. 어떻게, 내가 죄 토설하랴?”

    “이!”

    히죽 웃은 설변도가 천천히 일어나 뒷짐을 지고 나무 창살로 가까이 다가왔다.

    “편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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