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6)화 (76/96)
  • 76. 천지가 개벽할 일

    ‘이젠 정말 힘에 부치네.’

    두화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반란군이 내려치는 검을 막아냈다.

    이젠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또 한 번의 함성과 함께 대전의 중문에서 그리고 높은 지붕에서 수많은 복면인이 몰려와 반란군을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두화는 갑자기 나타난 복면인들이 개방 조직원임을 금세 눈치챘다.

    하여 속으로 안도하였다.

    ‘살았… 다, 이제.’

    반란군의 수보다도 훨씬 많은 복면인은 금세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모두 제압하여 정중앙에 꿇어 앉히고서야 일랑은 여식을 찾느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곳곳을 비추는 횃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복면인들 속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두화의 외침에 일랑이 고개를 홱 돌려 바라봤다.

    그는 여식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괜찮은 것이냐? 정보원이 널 놓쳤다고 하여, 일단 동백궁부터 찾아갔지만 없어서 걱정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

    훌쩍이며 웃는 여식의 모습에 일랑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 버텨 주었구나, 두화야. 이리 무탈하여 고맙구나.’

    일랑은 두화를 안아 천천히 다독였다.

    한편 그런 두 사람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왕이다.

    복면으로 그 얼굴을 가리고 있으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왕은 그가 자신이 두 번이나 버린 일랑임을 알았다.

    ‘자넬 그토록 찾아 죽이려 했더니, 자네 여식이 바로 내 그늘에 있었어.’

    멍하니 바라보는 그때 일랑의 눈과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놀란 왕과 달리 일랑은 무표정인 채로 왕을 바라봤다. 마치 작금의 사태에 대해 꾸짖는 것 같았다.

    “20여 년만이군요, 전하.”

    일랑은 왕에게 보란 듯이 복면을 천천히 벗어 던졌다.

    “…일랑!”

    “충신을 버리고, 간신을 곁에 둔 20여 년 동안, 전하가 이루신 세상의 결과가 고작 이것입니까?”

    담담히 묻는 목소리인데도 그 말의 무게가 왕의 가슴을 짓눌렀다. 저를 능멸하는 말인데도 왕은 호통은커녕 대꾸하지 못했다.

    “벗으로서 충신으로서 전하를 모셨나이다. 하나, 저를 그리고 저희 가문을 버리셨던 20여 년 전 그날, 소신 또한 전하를 버렸나이다. 하여, 소신은 이제 지난날의 원한을 갚으려 합니다.”

    왕을 향해 낮게 읊조린 일랑이 검을 치켜세우려 하자, 왕의 호위무사 명이 일랑을 향해 덤비려 하였다.

    하나 그전에 놀란 두화가 그 앞을 두 팔 벌려 가로막았다.

    두화의 돌발 행동에, 일랑과 두화 그리고 왕의 그 중간에 명이 어중간하게 서 버렸다.

    “아버지, 지금은 일단 반란군부터 처리해요, 네?”

    “두화야, 비키거라.”

    낮게 깔리는 부친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배 있었다.

    “아버지.”

    “이 아비의 원한을 네가 아느냐?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모진 고문에 네 어미는 핏덩이인 널 낳자마자 죽었다. 이 아비는!”

    억울하고 원통함이 느껴지는 부친의 울부짖음에 두화는 그대로 달려가 부친을 끌어안았다.

    “알아요. 저도 다 알고 있어요.”

    “…알면 비키거라.”

    “하지만 아버지, 이제 전하도 저에겐 가족이에요.”

    “…!”

    생각도 못 한 여식의 말에 일랑은 둔탁한 뭔가에 머리를 맞은 듯 어지러웠다.

    일랑의 뒤에서, 두화의 말을 들은 무영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두화야, 네가 방주님께 어떻게 이래! 왕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충신이든 아무 죄 없는 가문이든 손가락 하나로 파멸하던 자다. 그런 자를 가족이라 하는 것이냐 지금!”

    “무영 오라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너까지 방주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 이때까지 왕이 제 욕심 마음껏 부리며 궁 안에서 호의호식하면서 편하게 지낼 동안, 방주님은 화월국 곳곳을 돌며 힘없고 배곯는 백성을 지키셨다. 이기적이고 허울뿐인 왕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하니 이리 와.”

    무영 역시 좌의정의 모함으로 가문이 풍비박산되어, 역적으로 몰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 어린 나이에 뼛속까지 원한이 사무친 무영은 방주의 심정을 이해한다.

    호되게 질책하며 호통치는 무영의 목소리는 비단 두화만 들은 것이 아니다.

    중전과 익위사들도 그리고 왕도 들었다. 허울뿐인 왕은 필요 없다는 말에 왕은 충격을 받은 것인지 비틀댔다.

    무영이 강제로라도 두화를 데려오려고 몸을 움직이자 일랑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지금, 저들을 가족이라 하였느냐?”

    슬픈 듯 침울하게 들리는 부친의 하문에 두화는 입 안이 텁텁하니 마르고 속이 탔다. 가문을 풍비박산 만든 왕을 원망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하여, 부친을 이해한다. 하지만 두화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부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두 놀라 두화를 바라봤다. 누구보다도 일랑이 놀라 두화를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두화는 그 손길을 조심스레 거부하고, 이내 바닥에 고개를 세 번 박으며 절을 올렸다.

    “무슨 짓이냐?”

    “아버지, 소녀를 용서하지 마세요.”

    “두화야!”

    “가문을 몰락시킨 전하를 소녀 또한 원망해요. 하오나 소녀가 은애하는 분의 아이를 가졌어요, 아버지. 처음엔 소녀도 세자 저하를 연모하나, 결코 전하를 용서할 수 없어서 이 궁에서 나가려고 했었어요.”

    “…!”

    “하지만 세자 저하보다도 이젠 소녀가 더… 저하를 연모해요. 분명 제 마음인데도 그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아버지께 죄를 지었네요.”

    제 배를 감싸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아이를 아비 없이 키울 수 없어요.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소녀가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는지….”

    “두화야, 그렇다고 어찌 원수를!”

    여식의 눈물 앞에 일랑은 목이 메어, 뒷말을 할 수가 없다.

    “예. 알아요. 머리로는 아는데… 여기… 가슴에서 안 된다고 하는 걸 어찌해요? 도저히 저하를 놓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

    “그래도 안 된다. 왕족은 이기적인 사람들이야!”

    두화는 도리질을 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궁에서 세자빈의 핍박과 흉계에도 견디고 살 수 있었던 것이 중전마마의 호의와 전하의 배려에 이리 무탈할 수 있었는걸요. 분명 저분들 또한 소녀의 진짜 출신이 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을 터인데… 그런데도 소녀에게 진심으로 대해 주셨어요.”

    “…!”

    “절 잘 알잖아요, 아버지?”

    “너….”

    “저요,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받은 대로 반드시 돌려주잖아요. 만약 주상전하와 중전마마께서 평소 절 업신여기고 핍박했다면, 이 난리 통에 소녀는 살고자 진즉 궁을 나갔을 거예요. 하나, 은혜를 입으면 그 크기가 어떻든 갚는 것이, 금수와 다르다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지그시 눈을 감고 여식의 말을 듣고 있는 일랑의, 뒷짐 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애써 참고 있는 듯 주먹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상전하와 중전마마께서는 이 넓은 궁에서 제게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대해주셨어요. 아버지, 저는 저분들이 잘못되시는 걸 볼 수 없어요. 하여 죽을 줄 알면서도 검을 들고 이곳에 있었던 거고요.”

    참다못한 무영이 굳은 인상으로 나서려 했지만, 역시나 일랑의 손에 가로막혔다.

    “하여 넌… 우리 가문을 몰락시킨 저들을 용서하였단 말이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용서하지 못해요, 저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무뎌지듯 원망스러운 마음도 그리 무뎌지지 않을까요? 아버지.”

    “그게 그리 쉬운 거였다면 이 아비가 예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부친의 상처뿐인 마음에 두화는 마음이 아프다.

    “우리만 생각한다면 아버지의 결정을 소녀 또한 어찌 막겠어요? 하오나 백성을 늘 우선시하던 아버지가 아닙니까?”

    “너!”

    일랑도 두화가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왔다.

    영특한 아이니, 회임하였다고 왕을 제 앞에서 이리 두둔하진 않을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였더니 역시였다.

    “백성을 더 혼란케 하지 마세요. 전하가 없다고 하여 백성이 편해질까요? 아니요. 주상전하가 안 계시면 화월국은 혼란에 빠질걸요. 모두 제 배 불리기 바빠서 도적과 화적떼가 날뛰고, 백성은 더 배곯고 아프고 고통스러워할 거예요.”

    “그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과, 원수를 앞두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한 일랑은 감정이 격해져 여식의 목을 겨누려 다가왔다.

    곁에 있던 무영이 막으려 나서지만, 일랑의 살기가 너무도 강하게 뻗쳐 나왔다.

    하나, 이미 두화를 감싸며 지키려 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왕과 중전 그리고 맹지였다.

    검을 들고 무섭게 다가오는 일랑의 모습에 맹지가 냅다 두화를 끌어안았고, 그 위를 중전이 감싸고 그들을 왕이 몸으로 막아냈다.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모습에 일랑은 순간 당황하였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죽이려 한 자에게 여식이 보호를 받으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으리오.

    “뭐 하는 짓입니까? 전하.”

    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격분해 날카롭게 소리치는 일랑을 바라봤다.

    “나도 왕실의 일원인 우리 며느리를 지키는 걸세. 며느리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라면 그대에게 상처를 준 내가 원흉이고, 내가 죄인이지.”

    “몇 마디 말로 지난날의 과오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버럭 소리치는 일랑의 목소리가 대전 앞뜰을 쩌렁쩌렁 울렸다.

    반란군을 진압한 개방 사람들과 중전의 사람들, 그리고 숨은 반란군이 있나 소란스럽게 찾던 사람들도 모두 이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털썩!

    왕이 두 무릎을 꿇었다.

    천지가 개벽하지도 않았는데 한 나라의 왕이 신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이 광경에 놀라 그저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일랑 또한 왕의 돌발 행동에 꽤 놀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잘못했네. 화월국을 자네와 같이 좀 더 나은 나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내 마음에, 사사로운 욕심이 더해졌네.”

    “…!”

    “왕권이 강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고, 내 후손이 다음 보위를 오를 때, 설변도와 같이 권력욕 많은 대신들을 누르고, 좀 더 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겼네.”

    “…!”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은 왕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괴로웠다네. 밤마다 죄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충신들이 과인을 찾아와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하더군. 다 내 업보네. 이리되지 않으려 그렇게 애를 쓴 것인데… 결국엔 이리되었어.”

    허심탄회하게 지난날을 뉘우치며 말하는 왕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저 목을 내리쳐 억울하게 몰락한 가문을 대신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건만, 이상하게도 검을 든 손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무거운 쇳덩어리를 들고 있는 것처럼 검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일랑은 왕 뒤로 여식을 감싸고 함께 눈물 흘리고 있는 중전과 다른 사람들을 훑어봤다.

    ‘하아, 어째서 이러는 겁니까? 차라리 날 잡아들이라 명을 내리면, 아무 거리낌 없이 전하의 목을 벨 터인데, 어찌… 옥루를 흘리며 지존이 무릎을 꿇어 이리 난처하게 만드는 겁니까? 대체 왜!’

    여식의 마음을 아는데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가문과 죽은 어미를 생각한다면 저 속에서 나와 제 곁으로 와야 맞다. 한데 여식은 제 손으로 왕을 구하고, 왕을 구함으로써 백성까지 구하려 애쓰고 있다.

    두화는 고심하는 부친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비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하여 죄스러운 마음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라봤다.

    ‘아버지….’

    결국 일랑의 손에서 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부디…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

    “전하를 살리기 위해 절 끊어냈으니, 이제 저 아이는 제 여식이 아닙니다. 하니, 저 아이의 앞날은 이제 전하께 달린 것입니다.”

    “일랑….”

    일랑은 참담한 마음을 안고 몸을 돌이켰다.

    여식을 등지고 돌아선 일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무영 또한 마음이 착잡하였으나, 이날 이때 그랬듯 그저 방주를 따를 뿐이다.

    “아버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