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5)화 (75/96)
  • 75. 불맛을 보여줄 테다!

    설변도의 망언에 지척에서 듣던 왕은 치를 떨었다.

    ‘내 어쩌다 이런 굴욕을 겪는 것인지….’

    지난날을 한탄하며 후회했다.

    그러잖아도 대전을 나서기 전, 명에게 들은 말에 마음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전하, 일전에 명하신 그자를 찾았나이다. 거지들의 방주로 위장하고 살고 있었나이다.

    -그래, 편히 보내줬더냐?

    -그것이… 소신이 한발 늦었나이다. 찾아갔을 땐 이미 수환성으로 떠났다 하옵니다.

    -수환성? 거긴 어찌하여!

    제게 들이댈 칼날을 세자에게 들이대려고 간 것일까?

    세자를 잃을까 심장이 떨려 묻지 못 하는 말에 명이 말을 이었다.

    -화월국을 지키기 위해 전국의 거지 5천여 명을 동원해 갔다고 하옵니다.

    -…!

    살아있다는 말에 다시 한번 죽이려 한 저와는 달리 그는 제게 경고만 남기고, 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세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고 한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설변도를 택한 제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천일랑은 살아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랑, 미안하네. 미안하이.’

    설변도가 검을 뽑자, 주변 횃불에 비친 검날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두화는 그 모습에 시간이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사람, 당장이라도 전하를 해할 작정인 게야.’

    두화는 익위사와 중전에게 아주 작게 소곤거렸다.

    “이제 시간이 없어요. 될 수 있는 한 빛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 전하의 근처까지 가야 해요.”

    “하오나, 가기도 전에 반란군에게 발각될 수도 있습니다, 마마.”

    “아네. 하나 저자의 칼이 지금 전하를 가리키네. 내가 앞설 터이니, 모두 바짝 따라오게. 하옵고 중전마마께서도 제 치마끈을 꼭 잡으세요.”

    순식간에 검으로 치맛자락을 길게 잘랐다.

    너풀거리는 자락을 중전의 손에 쥐여주었다.

    출발하려는데 중전이 두화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화연아.”

    “…!”

    “중전으로 살아왔지만, 사가에 있을 적 내, 너처럼 이리 살고 싶었느니라. 해서 난 지금 누가 뭐라 하여도 검을 든 화연이 네가 멋있고 고맙구나.”

    마치 마지막을 앞둔 사람처럼 중전은 두화의 가짜 이름을 부르며 진심을 전했다.

    두화는 그 마음을 알기에 제 손을 잡은 중전의 손을 꼭 잡았다.

    “마마, 살 것입니다. 우리 모두 꼭 살 거예요.”

    “그래. 그러자꾸나. 해서 같이 설원도 보고 온욕도 하고 꽃피는 춘분에 꽃놀이도 가자꾸나.”

    결국 눈물을 글썽이는 중전의 모습에, 뒤따르던 익위사들의 눈시울도 벌겋게 물들었다.

    다들 중전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주 희박한 희망을 품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화도 눈물 한 자락을 흘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예. 그렇게 될 겁니다.”

    “응.”

    “하옵고, 전 화연이 아니라 두화입니다, 마마.”

    “두화?”

    “예. 두화.”

    중전은 제 이름을 밝힌 두화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잖아도 좀 전 왕과 설변도의 대화 중에 두화가 몹시 불안해한 듯 이상해 보였다.

    뭔가 사연이 있겠다 싶어 묻지 않았다.

    ‘이름이 뭔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난 그냥 너라서 좋았느니라.’

    잠시의 침묵 속에 모두 나름 각오하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면, 비겁하지 않게 끝까지 당당히 싸우다 죽으리라.

    이내 두화와 무리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어둠 속으로 은밀히 움직였다.

    설변도가 검을 들고 석계를 한층 한층 밟아 오르고 있다.

    그 모습에 두화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이려니, 아직 왕과의 거리가 꽤 있다.

    조금 더 빨리 움직이려던 그때!

    함성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전 앞뜰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느긋하게 석계를 오르던 설변도의 고개가 삐딱하니 돌아갔다.

    “저것들은 또 뭐야?”

    한 무리를 끌고 온 자들의 앞으로 풍채가 좋은 사내가 갓을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네 이놈! 설변도!”

    “으응? 뭐야 저건?”

    설변도는 상대가 잘 보이지 않는 듯 지척에 있던 부하에게 고갯짓하였다. 부하는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수십 명이 그 무리를 감싸며 횃불을 들이댔다.

    불빛에 상대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자 설변도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고, 한편 중전은 안도의 한숨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군가 하였더니, 서책만 읽는다던 중전의 오라비가 아니냐?”

    “오냐, 서책만 읽어 심심하던 차에 궁에 미친개 하나가 설친다고 하여 내 잡아서 몸보신하려고 왔느니라.”

    “뭐라? 미친개!”

    젊은 놈이 하대는 물론이거니와 상황판단이 되지 않는지, 허세를 부리는 것이 몹시도 설변도의 신경을 언짢게 만든다. 설변도는 콧등을 구기며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꽤 많은 아이를 심어놓았건만, 어찌 예까지 기어 온 것인지 모르겠군. 뭐, 차라리 잘 되었다. 어차피 후에 네놈들 모두 제거해야 할 판이거늘.”

    “오합지졸 같은 놈들 상대하는 것이 무에 어려운 일이라고. 덕분에 시간이 지체되어 네놈 설치는 꼴을 보게 되었구나. 쯧쯧!”

    조롱하며 혀 차는 소리에 설변도의 눈빛이 형형해진다.

    “이리 스스로 기어들어 왔으니 네놈도 누이에게 보내주마.”

    “이놈! 내 누이를 어찌하였느냐?”

    “어찌하긴, 벌써 황천길 가지 않았겠느냐?”

    설변도의 말에 중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여기 살아있다고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중전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 모습에 두화는 중전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변도와 반란군의 시선이 다른 곳에 집중되었을 때 서둘러 왕에게로 향하였다.

    “괜히 힘 빼지 말아라. 저 위 홀로 남은 폐주가 뭘 어찌하겠느냐?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 검을 버리거라.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네놈이 우리 가문을 욕보이는구나. 중전마마와 주상전하께 누가 되지 않으려, 우리가 비록 관직에 나서진 않았으나, 궁 안에 미친개가 설치는 꼴은 보지 못한다. 한번 살다가는 인생, 구차하게 네놈에게 빌어서까지 살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느니라.”

    중전의 오라비가 검을 뽑아 들어, 설변도를 향해 겨냥했다.

    “그럼 뭐 하는 수 없지. 모두 죽여라.”

    “예!”

    횃불을 든 반란군이 뒤로 빠지고, 검을 든 반란군이 점점 무리를 옥죄며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터지기 직전이다.

    반란군 하나가 검을 높게 쳐들며 덤비려 하던 그 순간!

    꽈과꽝!

    정확히 설변도 앞쪽에서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튄 불티와 연기 때문에, 대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중전의 오라비는 가문의 사병과 함께 반란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놀라 석계에 납작 드러누운 설변도가 고개를 홱 돌려 위쪽을 노려봤다. 폐주만 있어야 할 자리에 중전과 몇몇 익위사가 함께 있자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어찌 살아서 여기까지 기어 왔을꼬? 차라리 중궁전에서 품위 있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 아버님! 저기… 승휘가 있나이다.”

    “승휘? 그 빌어먹을 후궁 말이냐?”

    여식을 보며 말하던 설변도가 다시금 위쪽을 날카롭게 응시해 두화를 찾았다.

    활을 메고 검을 든 젊은 여인은 중전과 왕의 앞에서 마치 자신이 그들을 보호하듯 그리 서 있었다.

    “같잖은 것 같으니라고!”

    검을 들어 성큼성큼 석계를 올랐다.

    그때였다.

    설변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온 화살을 간신히 피하였다. 만약 피하지 못하였다면, 심장에 제대로 박혔을 것이다.

    순간 설변도는 오금이 저릴 만큼 놀랐다.

    의외라는 듯 위쪽을 노려봤다.

    아래 있던 련하가 소리쳤다.

    “아버님, 저것이 활을 제법 쏩니다. 조심하셔요.”

    “그래? 거참 재미있는 년이구나.”

    또다시 석계를 오르려 하자, 이번엔 두화가 소리쳐 경고하였다.

    “방금은 내 실수하였지만, 두 번은 실수하지 않는다. 올라오려면 올라와 보아라.”

    “…!”

    두화의 말에 련하는 지난날 석궁을 쏠 때가 생각났다. 정말 부친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다급하게 부친을 불렀다.

    “아버님, 괜한 것에 신경 쓰지 마시고 내려오세요. 차라리 한꺼번에 공격해 그냥 죽이세요!”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련하의 말에 왕과 중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변도도 여식의 말에 더는 시간을 끌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자신의 수하에게 소리쳤다.

    “전부 죽여라!”

    설변도의 말에 중전의 오라비와 싸우던 반란군 대부분이 방향을 바꾸어, 검을 들이대며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화는 중전과 왕 앞에서 소리쳤다.

    “두 분께서는 상황을 보시어 좌익위와 빠져나가시옵소서.”

    “두화야!”

    중전이 두화를 애타게 부르자, 왕을 호위하던 명의 눈이 커다래졌다.

    “좌익위, 부탁하네. 그럼, 나머진 모두 구에 불을 붙여 반란군을 향해 던지게. 아주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걸세.”

    좌익위 해솔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두화가 먼저 구에 불을 붙여 설변도와 련하가 있는 방향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불티가 티며 사그라지는 모습을 유심히 보는 련하를 설변도는 다급하게 안아 뒤쪽으로 굴렀다. 동시에 굉음을 내며 폭발하자 련하가 놀라 몸을 옹송그렸다.

    “어디 자신 있으면 올라오거라. 올라오는 족족 아주 뜨거운 불맛을 보여줄 테니!”

    두화의 말에 설변도가 혀를 차며 소리쳤다.

    “어째서 이리 아등바등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냐? 그냥 편히 가는 것도 배 속의 애한테 좋지 않겠더냐?”

    “네 이놈!”

    호통치는 두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변도 역시 두화에게 일침을 날렸다.

    “네 이년!”

    “…!”

    두화는 설변도를 죽일 듯 노려봤다.

    “감히 천하디천한 거지 년이 비단을 두르고 궁에 산다고 하여, 정녕 왕족이라도 된 줄 알았더냐?”

    부르르 떠는 두화를 대신해 중전이 한 발 나서 설변도에게 일갈하였다.

    “네 이놈, 설변도! 감히 역적이 어디 왕족의 일원에게 하대하는 것이냐?”

    중전의 일갈에 설변도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동시에 누이가 살아있음에 중전의 오라비는 안도하며 더욱 거칠게 반란군을 베어나갔다.

    “저거, 천한 거지 년인 것을 세자가 데려온 것이지. 중전도 들어 알 것 아니요?”

    “거지든 천것이든 왕실의 일원이 된 순간부터 왕족이다. 더구나 그 귀한 왕족의 후손을 잉태했으니 역적인 네놈의 입에 감히 오르내릴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니라.”

    “그래? 그럼, 그리 생각하고 다 같이 가거라. 더는 꼴같잖아서 듣는 것도 귀찮군. 다 죽여라!”

    반란군이 석계를 타고 빠르게 오르자, 두화와 익위사들은 구에 불을 붙여 마구잡이로 던지기 시작하였다.

    곳곳에서 펑펑, 꽈과꽝!

    터지는 소리가 마치 하늘이 노하여 천벌을 내리는 소리 같았다. 순식간에 어둠은 뿌연 연기 속에 갇히고, 한동안 폭발의 여파로 지축이 꽤 흔들렸다.

    여기저기서 콜록대며 기침을 하며, 한 치 앞도 분간 못 하는 연기를 손으로 내젓기 바빴다.

    그 틈에 중앙을 벗어난 두화는 왕과 중전을 어둠 속으로 은밀히 인도했다.

    하나, 금세 사라진 연기에 시야가 확보되자, 설변도는 이를 갈며 석계 위로 달려 올라갔다.

    도주한 것을 눈치챈 설변도의 날카로운 시선이 대전 앞뜰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둠 속을 유심히 바라보던 설변도가 소리쳤다.

    “왕과 중전이 가장자리를 타고 도주한다. 잡아라!”

    그 한마디에 중전의 오라비와 맞서는 반란군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어두운 가장자리에 횃불을 던지며 왕을 찾기 시작하였다.

    “저기다! 죽여라!”

    결국 발각되었다.

    구도 다 써버렸으니 이젠 진짜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두화가 이내 활을 잡아당겼다.

    “모두 조심해요!”

    두화가 화살을 날리는 족족 반란군은 나가떨어졌다. 왕과 그를 호위하는 명은 두화를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나, 반란군은 여전히 몰려들고 있는데 화살통은 금세 비워졌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두화는 자한을 떠올리며 매일 닦아주던 검을 검집에서 뽑아냈다.

    검을 잡은 두화를 본 왕은 단번에 그 검이 세자의 것임을 알았다. 아들이 유독 아끼는 명검이기에, 다른 검을 선물해 준다고 하여도 다른 것은 필요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검을 내어줄 정도로 저 아이를 연모하였더냐?’

    달려드는 반란군을 막아내는 두화와 익위사들이 점점 밀리며,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다.

    ‘저하, 이제… 마지막인가 봐요.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잘난 우리 저하 얼굴 보고 싶은데….’

    그가 그리워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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