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4)화 (74/96)
  • 74. 방도가 없다.

    적막만이 감도는데, 랑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내었다.

    “저, 감히 저 같은 놈이 전하를 대신해도 되겠사옵니까?”

    “….”

    두화는 랑을 안타까우면서도 미안함에 바라봤다.

    “하하, 제 평생 아니… 언감생심 곤룡포를 감히 어찌 입어보겠나이까?”

    멋쩍게 웃는 랑의 뒤통수를 내리친 성무가 툴툴대며 끼어들었다.

    “마마, 이놈은 키가 작아 감히 전하를 대신할 수도 없사옵니다. 저 정도는 되어야 뒷모습이라도 적을 속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러고 보니 풍채가 비슷해야 적을 속일 수 있다.

    가만히 성무를 보던 중전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두화가 어렵사리 말을 꺼내었다.

    “정말 괜찮겠나?”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는지 하문하시는 것이옵니까?”

    성무도 두화가 말한 의미를 알면서도 부러 웃으며 물었다.

    “흠, 뭐 그럼, 전하를 대신하는 건 이놈이 하고, 전 전하를 호위하는 역할로 함께하겠사옵니다, 마마.”

    랑마저 성무와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두화는 랑과 성무를 바라보며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간 두 사람과 정이 꽤 많이 들었나 보다.

    이젠 결단을 내려야 할 차례다.

    시간을 더 지체할수록 이 계략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 부탁하네.”

    말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거운지 몰랐다.

    입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차고 올라와 간신히 토해냈다.

    “예, 마마.”

    “꼭 살아서 다시 보세. 내, 자네들이 좋아하는 전, 많이 해줄 터이니.”

    두화의 말에 랑과 성무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조하셨나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을 것이옵니다.”

    “흠, 저도….”

    대답하면서도 성무는 두화의 뒤에서 겁먹은 얼굴로 서 있는 맹지에게 눈길을 줬다. 처음으로 마음에 새긴 여인인데 하필이면 궁녀인데다가 이젠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여인이다.

    ‘오밀조밀 저 귀여운 얼굴을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그러세. 많이 부쳐서 다 같이 먹… 하아”

    목이 멘다.

    어찌 될지 빤히 보이는 결과이기에….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랴.

    “어지간히 유인하면 그때부턴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하네, 이건 내 명일세.”

    “알겠나이다. 마마께서도… 무사히 빠져나가십시오.”

    두 사람이 예를 취하자, 연 상궁이 앞으로 나왔다.

    “전하의 곤룡포라면 새로 만들고 있다고 들은 것이 있으니, 아마도 침방에 있을 것이옵니다. 제가 함께 가겠나이다.”

    중전은 연 상궁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리 바라만 보다가 연 상궁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철없는 상전 만나 그동안 함께 하며 고생하였다.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하구나.”

    중전도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 상궁이 랑과 성무를 데리고 침방으로 향하자, 두화는 아픈 마음을 추스르고 말을 꺼냈다.

    “저들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도 준비하세. 혹, 궁에 숯가루와 짚이 있나?”

    슬쩍 손을 든 맹지가 작게 말하였다.

    “마마, 혹 불꽃놀이를 하려고 하시옵니까?”

    “말하자면 비슷하지. 왜, 있어?”

    “연초에 액막이 행사로 궁에서도 불꽃놀이를 하옵니다. 작은 것부터 제법 큰 것까지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데?”

    “듣기로는 진상품을 두는 곳에 있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좋아, 하면 맹지가 익위사 두 사람하고 같이 가서 될 수 있으면 큰 것으로 많이 가져와.”

    맹지는 자신도 뭔가를 도울 수 있음에,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바로 두 명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각이 좀 지났을 때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몸을 숨기고 있던 두화는 혹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활을 겨냥했다.

    익위사와 뭔가를 잔뜩 안아 힘겹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레 다가오는 맹지의 모습에 두화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활을 거둬들였다.

    “들키진 않았어?”

    “더러 돌아다니며 중전마마와 승휘 마마를 찾는 반란군이 있긴 하였으나, 아무래도 반란군은 죄 대전에 있는 모양이옵니다.”

    “무사히 와서 다행이야. 그럼, 이걸 가지고 지금부터 무기를 만들어 보자고.”

    중전은 익위사와 함께 불꽃놀이 할 때나 쓰던 것들로 뭔가를 만드는 두화를 보며, 그렇게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고맙구나, 승휘.’

    “자, 다 됐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랑과 성무가 나타났다.

    곤룡포를 걸친 성무는 그런대로 어둠 속에서 본다면 왕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도 이거 허리에 차고 있다가 정말 위급할 때, 불붙여서 적에게 그냥 던져 버리게.”

    마치 동그란 것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구(공) 같기도 한데 중간에 심지가 있다.

    “이건 뭡니까?”

    “궁을 더럽히는 액막이 화희 놀이를 해 보려고. 아, 이게 주먹보다 크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면 안 되네. 던지면 꽤 큰 폭발이 있을지도 몰라.”

    “화희 놀이라면… 혹, 낙화놀이 같은 것이옵니까?”

    “뭐, 비슷하네.”

    “한데 마마께서는 던져 보셨나이까?”

    성무가 그것을 손에 들고 두화를 빤히 바라봤다.

    “아니. 하지만 들어서 알지. 내가 아는 삼촌이 먼 천축국에서 이런 것을 던져 적과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내게 말해 준 적이 있네. 그 위력이 어떤지는 나도 모르니까 조심하라는 것일세.”

    “알겠사옵니다.”

    “일단 자네들 세 명이 지붕에서 반란군 모여 있는 중앙에 집중적으로 던지게. 이목이 쏠릴 때 대전의 문을 열고, 랑 자네가 반란군이 모여 있는 중앙으로 던지게. 그럼 아마 못해도 반란군의 절반은 두 사람을 뒤쫓을 걸세. 그 틈에 우린 전하를 모시러 갈 걸세.”

    두화의 계책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 두세 개씩 짚으로 띠를 만들어 허리에 매달고 남는 것은 손에 들었다.

    계책대로 세 명의 익위사가 지붕 위로 올라가, 왕을 끝까지 지키는 병사들과 싸우는 반란군을 향해 동그란 구에 불을 붙여 던지고 몸을 낮추었다.

    갑자기 허공에서 어둠을 가르고, 불티를 날리며 떨어진 구에, 반란군은 잠시 어리둥절하며 쳐다봤다. 불티를 날리던 심지가 다 탄 것인지 ‘피쉭’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반란군이 이내 금군과 검을 마주 대려던 그때!

    꽈광꽝!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우렛소리가 나고, 지축이 흔들렸다.

    뿌연 연기와 우렛소리에 놀란 반란군의 모습에 지붕 위에서 신호를 주자, 랑과 성무가 대전의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네놈들이 감히 과인을 능멸하고 살길 원하였더냐!”

    근엄한 외침에 반란군은 물론 좌의정 설변도 또한 시선을 돌렸다. 뿌연 연기를 손으로 헤치고 대전의 중문을 응시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분명 폐주는 저 안에 있을 터인데, 어찌 저기서 나타나?”

    현 상황에 어이가 없어 하는 설변도를 보며, 병조판서도 당황하였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아무래도 반란이 실패할 조짐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 하늘에서 벼락이!”

    설변도는 병조판서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릉거렸다.

    “재수 없는 소리! 잘 보아라. 저들의 손에 들린 저것이 벼락이냐?”

    “하지만, 언제 빠져나가 저기에 있는지… 저 뒤에 지원군이라도 있으면 어찌할 것입니까? 그럼 우린 꼼짝없이 죽는 건데!”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변도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다.

    한데 옆에서 재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니 짜증이 솟구쳤다. 설변도는 그대로 병조판서를 바닥에 메다꽂은 뒤 그 목에 검을 들이댔다.

    “하면 그 전에 내 손수 죽여주랴!”

    “아, 아니옵니다.”

    “우릴 속이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진짜든 아니든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 폐주든 아니든 잡아서 내 앞에 대령해. 당장 시체라도 대령하란 말이다!”

    “예, 아… 알겠습니다. 소신이 놈을 쫓겠나이다.”

    덜덜 떠는 손으로 검을 잡은 김윤석은 살기 위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아갔다.

    “절반은 날 따르라. 폐주가 밖에 있다. 죽여도 좋으니 폐주를 잡아 오는 자에게 상금을 내릴 것이다.”

    환호성을 내지른 반란군이 병조판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랑과 성무는 뒤돌아 전력을 다해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반란군의 무리가 무섭게 그들을 뒤쫓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사라지자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던 두화는, 조용히 대전의 중문의 문턱을 넘어 어둠을 따라 안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갑작스러운 폭발 때문에 반란군의 이목이 분산되어 쉬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읏!”

    치마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중전이 아주 작은 쇳소리를 냈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에 주위가 금세 고요해졌다.

    “조용!”

    ‘들킨 건가?’

    중전을 가까스로 잡은 두화가 냉큼 대전의 앞뜰에 있는 반란군을 응시했다. 식은땀이 절로 나는 순간이다. 저는 물론이고 뒤를 따르는 익위사들도 모두 그 자리에 굳어 상황을 주시했다.

    “조금 전 폭발로 동요하지 말아라. 우리의 대업을 방해하는 것들의 농간이니, 병판이 해결할 것이다. 우리의 대업은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변도의 망언에 반란군의 환호성이 대전 앞뜰에 울려 퍼졌다.

    두화는 막상 안쪽으로 들어와서 본 광경에, 왕을 구한다는 자체가 어리석게도 치기 어린 행동은 아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저 많은 반란군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 치기다.

    뒤를 돌아봤다.

    살아남은 익위사와 제가 가지고 온 구가 모두 20개, 잠시의 시간은 끌 수 있을 정도다. 하나, 이정도로 뜰 앞을 채운 반란군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방도가 없다. 이럴 때 저하가 오신다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을 터인데….’

    그때였다.

    굳게 닫혀있던 대전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 앞을 지키며 싸우던 금군이 놀라는 것도 잠시, 근엄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왕을 둘러싸며 보호했다.

    “네 이놈, 설변도! 감히 역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왕의 우레와 같은 호통 소리에 설변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히죽거리며 웃더니 두 팔을 벌려, 왕만이 거닐 수 있는 어도로 으스대며 한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붉은 곤룡포가 내게 더 잘 맞는 듯싶소이다.”

    “뭐라! 네놈이 감히!”

    노기 서린 왕의 목소리가 거슬린다는 듯 설변도가 귓구멍을 마구 후비었다.

    “감히라는 말, 그거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눈이 있고 머리가 있으면 지금 돌아가는 상황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소만.”

    “내 진즉 천 가문이 아닌 네놈을 쳐냈어야 했어. 왕권이 강해야만 나라와 백성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내 오랜 벗인 일랑을 버린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왕의 입에서 부친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두화는 숨도 쉬지 못하고 팽팽하게 서로 대립하며 대화를 하는 왕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까지도 두화의 손을 잡고 있던 중전은 조금은 호흡이 달라진 두화를 걱정하며 바라봤다.

    왕의 말에 설변도가 조롱하듯 껄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추의 한이라… 그것도 웃기지 않소이까? 그날의 결정은 누구도 아닌 폐주가 한 것을요.”

    폐주라는 말에, 곤룡포 넓은 소매 속, 주먹 쥔 어수가 부르르 떨렸다.

    “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요? 그날의 선택 때문에 폐주는 오늘까지라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요.”

    “닥쳐라!”

    “아직 소리 지를 기력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이제 태 씨의 시대는 끝났소이다. 나, 설 씨의 시대가 시작되었소이다.”

    “네놈이 정녕!”

    그때 대전을 돌아 나오는 횃불과 함께, 십여 명의 반란군이 누군가를 데려왔다.

    옥에 갇혀 있던 세자빈과 초아가 설변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제 여식을 본 설변도의 날카로운 눈매가 금세 부드러워지더니, 여식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이런, 어찌 이리 핼쑥해진 것이야?”

    걱정과 염려를 담아 짧게 혀를 차자, 련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친을 바라봤다.

    “아버님.”

    “이제 아무 걱정 말아라. 날 밝는 대로 이 아비가 대전의 주인이 될 것이니라.”

    “하면 저기 저분….”

    왕을 올려다본 련하는 감히 왕에 대해 예우를 하지 않았다.

    “폐주를 말하는 것이냐?”

    “예. 폐주는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너무도 담담하게 말하는 련하의 입술이 느릿하게 옆으로 늘어진다.

    “내 직접 이 자리에서 그 명을 끊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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