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2)화 (72/96)
  • 72. 용이 되려는 이무기

    “마마, 마마!”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맹지가 들어섰다.

    “어찌 그리 호들갑이야? 어디 불이라도 났대?”

    “불보다도… 어이구, 숨 차라. 잠시만요.”

    들숨, 날숨 열심히 후후거리며 숨을 고른 맹지가 아주 환하게 웃었다.

    “어디 아픈 것이야? 갑자기 왜 그렇게 웃는데?”

    “이제 우리 마마, 두 발 뻗고 아니… 요 주둥이가… 흠흠. 편히 지내실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말실수에 제 입을 톡톡 때리면서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기뻐한다.

    “무슨 말이야?”

    “드디어 세자빈과 좌의정을 잡아들이라는 전하의 명이 떨어졌답니다.”

    정말?

    정말 세자빈을….

    “맹지야, 한데 좌의정은 왜 잡아들이래?”

    “아, 맞다. 일전에 자객을 보낸 것이, 세상에 좌의정 짓이라고 하옵니다. 그것도 세자빈이 부추겨서 그랬다고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잡아들이라 했으니, 이제 뭐 좋은 시절은 물 건너간 것이지요.”

    “…”

    두화는 할 말을 잃었다.

    ‘부녀가 날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구나.’

    어찌 보면 기쁜 소식인데도 기운이 쫙 빠지는 기분이다.

    “마마, 안색이 좋지 못하시옵니다. 어의를 부를까요?”

    “아니야. 잠시 조금만 누워있을게.”

    “예. 그리하시옵소서. 소인은 나가 있겠사옵니다.”

    고요한 침소 안에서 두화는 습관처럼 검을 문지르며 중얼댔다.

    “저하, 저와 아이를 해하려던 자가 좌의정이었대요.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인데… 하면 앞으로 좌의정과 세자빈은 어찌 되는 걸까요? 왕실의 후손을 해하려 하였으니 극형을 받을까요?”

    저로 인해 누군가 죽게 된다는 사실이 끔찍하기만 하다.

    ‘나와 아이를 해하려 한 자를 용서할 마음은 없어. 한데, 그냥 기분이 그러네.’

    움막에서는 차별 없이 서로 웃고, 필요하면 빌려주고 아프면 서로 돌보고… 세상 가진 것은 없으나, 마음만은 풍족하게 서로 아끼며 살았었다.

    한데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이곳에서는 조금 더 갖기 위해, 저 죽을 줄 모르고 시작된 작은 욕심이 결국 큰 화를 부르게 된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헷갈리는구나.’

    “그 끝이 죽어야 할 형벌이라도 정해진 법을 어겼으니, 법에 따라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저하?”

    분명 저에게 좋은 소식인데도 두화는 한숨만 나왔다.

    ***

    개방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자한은 보고 받았다.

    얼마나 분노한 것인지 당장이라도 좌의정을 죽일 것처럼, 검을 들고 나서려는 것을 사림이 어렵사리 붙들었다.

    “저하, 군을 이끌고 가셔야 하옵니다.”

    “놔라, 내 여인과 내 아이를 해하려 한 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압니다, 아는데… 만에 하나 개방 방주의 말대로 좌의정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려 한다면 서둘러 군을 정비하여 가야만 막을 수 있습니다. 저하 홀로 가셔서는 결코 막을 수 없사옵니다.”

    거칠게 숨을 내쉰 자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놈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으냐?”

    “소신은 예전부터 좌의정의 사병이 느는 것을 보고 늘 불안했습니다. 불온한 사심이 있지 않은 한, 사사로이 사병을 그리 많이 키울 수는 없지요. 저와 함께 가셔도 그의 사병을 뚫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니,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사림의 말이 옳다.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자한은 즉각 잠들어 있던 병사들을 소집해, 도성으로 출발할 준비를 한다.

    ***

    어둡고 스산한 숲 깊은 곳에, 희미한 달빛과 대조되는 횃불이 곳곳을 환히 밝혔다. 나무로 된 문이 열리자 기괴한 소리가 적막만이 감돌던 곳을 울렸다.

    “모두 무기를 들고 모여라!”

    누군가의 외침에 어둠 속에서 새까만 복면인들이 끝도 없이 몰려나왔다. 그 수가 가히 웬만한 군에 맞먹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자들은 일제히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통나무집에서 붉은 곤룡포를 입고 등장한 이를 보고 복면인들은 환호하였다.

    “조용! 모두 화월국의 새로운 군주를 받들라!”

    병조판서 김윤석의 외침에 복면인들이 검을 들고 환호하였다.

    “와!”

    “전하!”

    환호하는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설변도는 이미 이들에게 왕으로 군림하였다.

    “들어라! 우린 오늘 밤, 화월국의 새 역사를 시작할 것이다. 과인을 따르는 자는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 앞날이 창창할 것이나, 과인을 부정하는 자는 내일의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날 따르겠느냐?”

    이곳에서 오랜 세월 설변도를 위해 키워진 사병들은 그가 주인임을 뼛속 깊게 새긴 덕에, 그저 그의 말만을 옳게 받들었고, 그 옳음을 행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여 지금은 오로지 그의 명에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환호하던 이들이 모두 바닥에 조아리며 충심을 맹세하였다.

    그 모습에 정말 왕이라도 된 양, 설변도는 궁이 있는 방향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태 씨의 시대는 끝났다. 이 밤이 지나면 설 씨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야.”

    명분을 살리려 능윤군을 회유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몸이 약하여 그런지 우유부단하며 반정이라는 것에 겁을 먹은 탓에 쉬이 각서를 쓰지 않았다. 죽여 후환을 없앨까 싶었지만, 왕족이니 훗날 써먹을 용도가 있을 듯하여 가택에 가두고 심복에게 감시하라 했다.

    생각처럼 일이 풀어지지 않자, 산채로 향하던 설변도는 차라리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을 택하였다.

    저를 부정하는 것들은 죄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병판, 궁을 장악하면 바로 살생부에 적힌 이들부터 제거하거라.”

    병조판서 김윤석에게 살생부라 칭하는 서책을 주었다.

    “예, 전하.”

    “그리 부르니 듣기 나쁘진 않군.”

    “이제 곧 축시(01~03시)이옵니다. 출병하셔야 하옵니다.”

    병조판서의 말에 설변도가 검을 들어 외쳤다.

    “자, 모두 나를 따르라!”

    그 한마디에 환호를 지르며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길인데도 자한은 기쁘기보다는 조급했다.

    한시바삐 궁으로 돌아가, 두화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전쟁이라 생각하였다. 개방의 도움으로 한고비 넘겨 이제 끝이라고 여겼거늘, 감히 설변도가 딴마음을 드러냈다.

    ‘젠장!’

    그를 제압하기 위해 달려가고는 있으나,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니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앞서가는 장군들은 말을 타고 이동하지만, 그 아래 병사들은 아등바등 그 속도를 맞추기 위해 뛰어야 했다. 당연히 더딜 수밖에 없는 속도다.

    벌써 이틀을 쉬지 않고 달렸다.

    자한은 지쳐 기진맥진한 병사들을 돌아봤다. 이대로 도성에 도착해도 문제였다.

    “사림, 모두에게 1각 동안만 힘을 비축하라 전해라.”

    “하나, 시급하지 않사옵니까?”

    그런 사림의 어깨를 다독인 자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강행하다가는 도성에 가기도 전에 저들 먼저 쓰러지겠구나.”

    “하오나, 저하!”

    “개방이 먼저 출발하였다고 하였지? 의로운 자들이니 내가 갈 때까지 시간은 끌어 주겠지.”

    “그걸 어찌 장담하신답니까?”

    “방주. 난 방주를 믿는다.”

    소중한 이가 도성에 있어 서둘러 갔다는 그 말에, 자한은 방주가 두화의 부친임을 뒤늦게 짐작하였다. 술자리에서 두화의 이야기를 꺼낼 때를 생각하니,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여식을 둔 아비의 모습이었다.

    ‘두화가 여식이라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조금은 의아한 기분이나, 신분 차이라고만 단순히 생각한 자한은 도성이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만, 시간을 끌어 주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장인.’

    그렇게 심신을 조금이라도 달래는데, 멀찍이 떨어진 나무 아래 도헌이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자한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통을 내밀었다.

    예를 갖추고 고개를 든 도헌이 그 물통을 받아 들었다.

    “승전고를 울렸으나, 또 다른 전쟁이 궁에서 벌어질지 모르네.”

    부러 도헌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혹은 벌써 일어났을 수도 있을 반란에 대해 넌지시 언급했다.

    “하온데 이리 쉬어도 되겠나이까?”

    “병사들도 숨은 쉬어야지.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고.”

    “…?”

    물통을 받아든 자한이 뒷짐을 지고 궁이 있을 방향으로 섰다.

    “돌아가면 모두에게 상이 내려질 것이네. 특히 자네의 공이 크니 원하는 것을 내려주도록 아바마마께 청할 생각이야.”

    “…!”

    원하는 것!

    그 지옥 같던 전쟁터에서, 그저 두화의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이 악물고 버텼고, 살아남았다. 비록 제 계획대로 세자를 죽이진 못했으나, 어찌 보면 세자가 산 것이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제가 만약 세자를 죽였다면 두화는 아비 없이 아이를 키워야 한다.

    ‘그리되면 남은 인생을 슬픔에 젖어 살겠지. 두화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 그리 웃지? 원하는 것이 없는가?”

    “있습니다.”

    “그래?”

    “늘 한결같이… 원합니다.”

    그가 한결같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기에, 자한의 눈썹이 사납게 삐뚤어졌다.

    “하나, 이젠 가질 수 없음을 아옵니다. 하니, 소신에게는 특별히 상을 내리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하.”

    ‘이제야 네 것이 아님을 안 게냐?’

    “공을 세우고도 상을 거부하는 것인가?”

    “충심으로 행한 것이옵니다.”

    말과 달리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경멸하듯 그리 본다.

    ‘건방진!’

    자한은 차갑게 조소를 내비쳤다.

    몸을 돌려 도헌의 귓가에 대고 짓씹듯 작게 말하였다.

    “장차 보위를 잇게 될 내게 앞으로는 그 눈빛부터 내리깔게. 내 이미 자네에게 세 번의 살 기회를 주었다. 더는 내 등에 칼을 겨누는 어리석은 짓 따윈 하지 말게. 그땐 자네의 어리석음으로 자네뿐 아니라, 가문이 화를 당할 것이야.”

    알고 있다.

    제가 죽이려 시도한 것을 무예를 하는 세자라면 알았겠지. 당연히 그에 따른 엄벌이 내려지리라 생각했거늘, 세자의 뼈가 있는 말은 형벌을 받는 것보다도 더 수치스러웠다.

    ‘제길!’

    도헌의 주먹 쥔 손이 맥없이 툭 내려졌다.

    ***

    어둠이 궁 안을 뒤덮었다.

    어느새 조석으로 군불을 지펴야만 할 정도로 날씨가 서늘해졌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불 냄새가 정겹지만,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가 을씨년스럽다.

    “마마, 들어가시옵소서. 제법 쌀쌀해졌사옵니다.”

    “됐어. 너 불 다 지피면 같이 들어가. 오늘은 유달리 컴컴한 것 같아서, 꼭 뭐라도 나올 것 같네.”

    “왜요?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요?”

    “귀신? 글쎄… 이번에 느낀 건데,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네.”

    아궁이 안에서 사방으로 불티가 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두화를 보며 맹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전이 어찌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기에 맹지는 안쓰럽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좌의정을 추포하라 명하였지만, 도주한 지 벌써 사흘인데도 잡지 못하고 있다.

    ‘불안하시옵니까?’

    맹지는 차마 묻지 못하고, 두화의 심기를 뭐라도 풀어 줄 심산에 두리번거렸다.

    “맞다. 마마, 고구마 구워드릴까요?”

    “고구마?”

    “예. 기분이 안 좋을 땐 단것이라도 먹으면 좋아지지 않사옵니까? 요기 앞쪽에다 넣고 조금만 기다리면, 꿀이 흘러넘치도록 맛나게 익을 것이옵니다.”

    아직 먹지도 않았건만 어쩜 이리도 맛깔나게 표현을 잘하는지 모르겠다.

    ‘내 기분을 헤아려서 이러는 것이겠지.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 맹지에게 고마워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구마 몇 개를 불 앞쪽에 놓아두고,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늘한 날씨와 불 냄새, 그리고 멍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붉게 타오르는 불과 익어가는 고구마 냄새까지 완벽한 밤이다.

    맹지가 고구마가 잘 익었나 반으로 자르던 그때, 동백궁 입구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익위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승휘 마마! 피하셔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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