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0)화 (70/96)
  • 70. 우리 두화가 말일세.

    사방이 아군과 적군의 시체로 동산을 이루었고, 대지가 핏물로 뒤덮였거늘.

    수많은 인명이 죽어 나간,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이 지옥의 원흉이 자국의 대신이 꾸민 짓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권력에 대한 욕망이 많은 자이긴 하나, 나라까지 팔아가며 전쟁을 일으킬지는 몰랐다.

    ‘만약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결코 좌시할 문제가 아니다. 좌의정, 그대의 죗값은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야.’

    잠시 뒤 사림이 서찰을 가지고 왔다.

    읽어 내려갈수록 기가 찰 뿐이다.

    -이 사람과 대장군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인 게요. 웬만큼 시간을 끌다가 이 사람이 연통을 넣으면 그때 군사를 물리시오. 이번 일이 잘된다면 대장군 노고를 내 모른 척하겠소이까? 귀족 집 처녀 셋과 변방 근처의 금광 문서를 주리다.

    얼씨구.

    화월국 백성과 화월국의 금광을 제멋대로 누굴 줘?

    자한의 이마가 심하게 꿈틀 비틀린다.

    -이는 성라국 부마도 모르게 내가 주는 선물이요. 하니, 딱 석 달만 끌어 주시오. 더불어 세자의 다리를 망가뜨리면 더 좋고… 재수가 없어 죽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니, 그것까진 내 관여하진 않으리다. 차후 또 연통을 보내겠소이다.

    좌의정 가문을 나타내는 인장이 떡하니 찍혀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좌다!

    “이자가 벌써 노망이 든 겐가?”

    “어찌 그러시옵니까, 저하?”

    자한은 사림에게 서찰을 넘겼다. 읽어 내려간 사림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뉘에게!”

    “아주 고맙게도 제 짓이라고 가문의 인장을 썼구나.”

    “전하께 고하여 결코 살려둬서는 아니 되옵니다.”

    사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자한은 마치 좌의정 설변도가 앞에 있는 것처럼 조소를 지었다.

    “감당할 수 있으니 이런 짓을 저지른 게지.”

    서찰을 고이 접어 품 안에 넣은 자한은 박 장군과 도헌에게 명하였다.

    “성라국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자와 화월국에 남길 원하는 자를 분류하도록 하시오. 일단 도성까지 압송한 다음 전하의 명에 따라야 할 것이니, 그때까진 박 장군과 백 장군이 고생하시오.”

    “명 받잡나이다.”

    ***

    그 밤, 어렵게 전쟁에서 승리한 자한은 아군에게 술과 음식으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했다.

    술동이가 비워질수록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자한도 모처럼 긴장의 끈을 놓고 술잔을 들이켰다. 자신의 잔을 비운 뒤 일랑이 있는 곳으로 가 술을 따라 잔을 내밀었다.

    “그대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승리는 없었을 것이네. 받게.”

    일국의 세자가 직접 하사하는 술이다.

    가만히 술잔을 바라보던 일랑은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예 곁에 앉은 자한이 또 한잔을 따랐다.

    “저하, 술이 약한지라 더는 마시지 못합니다.”

    “그런가? 흠… 그럼 그냥 받아놓고만 있게.”

    금세 서먹해진 기분에 일랑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이제 좀 가지. 거지 옆에 왜 이렇게 붙어 있는 것인지 원.’

    “이보게, 방주.”

    “예?”

    “그, 도성 다리 밑 움막에 있는 이들 중에 말일세.”

    두화를 아는지 묻고 싶었다.

    “…!”

    어찌 자신의 거처에 대해 말하는 걸까?

    일랑은 일순 긴장하였다.

    어딘지 경계하는 듯한 일랑의 모습에 자한은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자네랑 함께 온 자들의 수가 무려 5천이라고 하였잖은가. 정말 그들 모두가 거렁… 아니… 하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천한 거지를 거지라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자한은 문득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어째서 이들은 천한 거지일까?

    어찌하여 한 나라에 함께 사는 백성을 신분으로 나뉘어야만 할까?

    하여 바로 코앞에 두고도 그의 신분을 똑바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숨을 헐떡이며, 살기 위해 칼을 휘둘러야만 했을 것이다.

    “저하, 비렁뱅이 맞습니다. 천한 것들을 뭘 그리 어려워하십니까?”

    낮은 한숨과 함께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평온하게 말하는 일랑의 모습에, 굳은 얼굴로 답하였다.

    “…난 이번 전쟁에서 또 한 번 배웠네. 아무리 천하다 한들 그대들이 없다면 화월국도 없는 것이겠지. 그대들뿐이 아니라, 평민과 귀족 모두가 다 같은 화월국의 백성이네.”

    “…!”

    “한데… 어찌하여 누가 똑같은 백성이건만, 그들을 신분으로 나뉘어 놓았을까 싶네. 다 같이 잘 먹고 잘살면 참 좋으련만.”

    생각도 못 한 세자의 말에 일랑도 일순 놀람과 당황 그리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젊은 시절, 왕과 함께 꿈꾸었던 세상이 바로 신분 차이가 없는 그런 나라였다.

    버려짐에 배신감과 원망만 남아, 꿈을 좇아 살던 그때의 자신을 스스로 죽여 버렸다. 한데 자신을 버린 왕의 아들이 젊은 날의 제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훗날 옥좌에 오르시면 저하께옵서는 그런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까?”

    “글쎄. 그런 세상을 꿈꾸기만 하다 끝나는 왕이 아니라, 좀 더 사람답게 다 같이 살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 같네.”

    “…!”

    예전 제가 섬기던 왕은 자신 있게 확답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꼭 만들겠다고… 하나, 날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왕도 대신들과 다를 바 없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때로는 대신들과 손잡고, 죄 없는 백성들을 이용하고 착취하였다.

    왕이 직접적으로 행한 것은 아니나, 대신들을 쪼여대니 대신들은 만만한 백성들의 전답과 토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백성까지 돈으로 사고파는 지경까지 갔다. 해서 세상 살기 힘들었던 백성들 일부가 스스로 거지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저하, 당신은 그와 다릅니까? 정녕….’

    어느새 일랑은 세자에게 마음이 열리는 듯 눈빛이 흔들렸다.

    눈앞의 있는 자!

    앞으로 왕이 될 자이건만, 과연 믿어도 될 것인가….

    “흠, 내 물어볼 것이 있네.”

    “무엇입니까?”

    “아까 말한… 도성 안 다리 밑 움막에 말일세.”

    “…!”

    “그러니까… 두화라고.”

    “두화… 요?”

    “지금은 내 후궁일세. 본디 다리 밑 움막에 기거하던 신분이나, 내 직접 가짜 귀족 신분으로 위장해, 지금은 궁에 있네. 혹 두화의 부친을 아는가?”

    일랑의 눈이 커다래졌다.

    정보를 빠짐없이 보고받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두화의 가짜 귀족 신분을 정보원이 빼고 보고한 모양이다.

    ‘아비가 있는데 또 다른 부모라… 한데 이곳에 오기 전에 받은 서찰에서도 그런 말은 없었거늘….’

    제가 마음 상할까 싶어 부러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보를 제대로 보고 하지 않은 궁 안의 정보원을 어찌해야 할까?

    돌아가면 호되게 주의시켜야 하겠다.

    “한데 그분의 부친은 어찌 찾으십니까?”

    “내 여인의 부친이니 당연히 사위의 인사를 받아야 할 게 아닌가.”

    “…!”

    전혀 뜻밖의 말에 일랑은 아주 조금 감동하였다.

    “움막에서 생활하였다면, 그분의 부친 또한 비렁뱅일 터인데… 저하께옵서 천한 신분을 찾아 직접 인사를 하신다고요?”

    “당연하지 않은가? 하여 진즉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간 사정이 좀 있었지. 서로 마음이 엇갈려서 난 나대로 그녀를 내보낼 수가 없었고, 그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궁을 나가려고만 했으니까.”

    “후궁이 도망치려고 했습니까?”

    “그렇네. 난 저 없으면 안 되는 거 알면서….”

    “해서 강제로… 취하신 것입니까?”

    순간 낮게 가라앉은 일랑의 목소리에서는 차가움이 뚝뚝 배어났다.

    “아닐세.”

    “...”

    “흠, 내가 또 우리 두화를 많이 연모한다네. 뭐, 결국 서로의 마음이 맞아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난 이곳에서 밀려드는 적들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 목숨을 내놓았을 것이네.”

    전쟁터에서는 사정없이 적을 베어내고 냉혹하던 사내가 제 여인을 말할 땐, 세상 순둥이 같이 웃는다.

    ‘세자가 되어서 자발머리없긴. 그래도 두화를 많이 아끼긴 하나 보군.’

    술 몇 잔과 그리운 여인을 떠올리면, 품위와 품격을 지닌 천하의 세자라 하여도 이리되는 모양이다. 헤벌쭉해져서는 연신 우리 두화를 찾는다.

    “우리 두화가 말일세.”

    ‘두화는 제 여식입니다. 그러니 제가 우리 두화를 찾아야지, 왜… 음.’

    세자의 우리 두화 남발에 일랑의 미간이 자꾸만 좁혀진다.

    “하하하, 웬만한 사내보다도 활이며 칼을 얼마나 잘 쓰는지…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모를 거네.”

    “여인이 그런 것들을 잘해 뭐 한답니까?”

    부러 그리 말하자, 순간 정색한 세자가 빤히 보더니 이내 피식 웃는다.

    “난 나쁘지 않다고 보네. 조신하게 지아비 수발을 드는 것보다 난 나와 함께할 수 있고, 무엇보다 우리 두화가 즐거워하면 그걸로 족하네. 그녀가 활시위를 당길 때, 그 모습은 정말 사내인 내가 봐도 멋있다네. 그때 좀 져 줄 것을 그랬나.”

    지난번 내기를 하던 때가 생각나 자한은 피식 웃었다.

    정말지, 그땐 활시위를 당겨 제 화살을 반으로 갈라놓았을 때 놀라기도 하였지만, 자랑스럽기도 하고 멋있었다.

    ‘돌아가면 사냥터에 데려가야겠군.’

    그리고...

    ‘아, 내 애마에 태워 질주도 해 봐야지.’

    또...

    ‘… 우리 두화, 온천욕도 시켜 줘야 하는데.’

    두화를 생각하자, 뭔가 해주고 싶은 것이 자꾸만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거 아십니까?”

    “…?”

    “그분을 말씀하실 땐, 딴 사내인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나? 그 말도 맞을지 모르지.”

    자연스럽게 웃음 짓는 세자의 미소에 일랑도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진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세상을 다 가진 세자였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누릴 수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마음 둘 곳이 없었네.”

    “…”

    “모두 하나같이 내게 조심하고, 잘 보이려 가면을 쓴 채 웃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신물이 나더군. 곁에 있는 세자빈조차 그랬으니까.”

    세자빈이라 하면 좌의정 설변도의 여식이다.

    일랑은 가만히 자한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분과는 어찌 만나셨습니까?”

    “이건 비밀인데….”

    모두 흥과 술에 취해, 들으려 하는 자도 없었지만, 자한은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주변에 들리지 않게 작게 말을 이어갔다.

    “내 탄일 날 시전 골목에서 그녀를 처음 봤네.”

    “시전에서요?”

    “그렇네. 글쎄 처음엔 그녀가 사내들에게 희롱을 당하는 줄 알고 도우려 했거늘, 웬걸! 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네. 여인이 되어가지고선 치마를 훌렁 걷더니 두 사내를 그야말로 밟았네. 아주 자근자근 지르밟더란 말이지.”

    “예? 바, 밟아요?”

    일랑은 여식의 성격을 아니 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다소 황당하고 보기 민망한데도 너무 강렬한 첫 만남이라 그랬는지, 시전에서 낙화봉에 취해 보고 있을 때 그녀와 또 마주쳤거든. 내가 아는 척을 하니, 자기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더군. 그래서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나도 좀 몰아붙였더니 세상에.”

    혼자 숨넘어가게 큰 소리로 웃더니 천천히 자신의 볼을 매만진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상황설명을 하다가 우리 두화 손목을 잡았더니, 냅다 내 뺨을 때리더군. 감히 세자인 내 뺨을 말이야.”

    “허이고!”

    일랑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감히 세자의 몸에 손을 댔었다니, 눈에 뵈는 게 없는 제 여식을 어찌할까 싶다.

    “한데 궁에 가서도 내내 생각이 나더군. 이상하지? 궁 내, 여인도 많고 귀족 집 여식인 세자빈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던 내가 그녀를 자꾸만 생각하더군. 처음엔 내 마음을 나도 몰라서 꽤 못살게 굴었지. 신분이 천한 그녀와 맞지 않다고 부정도 했었고, 스스로 질책도 했는데 결국 여기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린 세자가 마치 앞에 두화가 있는 듯 옅은 미소를 짓는다.

    “여기에 뿌리내린 그녀를 보낼 수도, 잊을 수도 없었네. 참 짧은 기간인데 우리에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네. 하아, 보고 싶다, 우리 두화.”

    “그리 그리우십니까?”

    “당연하지. 지금까지 그녀 때문에 버텨냈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 매 순간이 지옥이었는데… 우리 두화 때문에 버텨냈어. 참, 우리 두화가 회임했다네.”

    “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쿡. 내가 아버지가 된다네. 정말 좋은데… 이렇게 많이 기쁜데, 이 기쁨을 우리 두화랑 함께해야 하는데… 보고 싶어 죽겠군.”

    중얼거리듯 두화가 보고 싶다는 말만 반복하는 세자의 술주정을, 일랑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아비가 모르는 일들이 있었구나. 힘들진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두화야.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그렇게 자한은 두화의 부친인 줄도 모르고, 일랑의 앞에서 자신과 두화의 지난 시간을 술기운에 털어놨다.

    일랑은 여식의 일을 세자에게 들으니 기분이 묘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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