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밝혀지는 진실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박 장군이 호탕하게 웃는다.
무슨 말인가 싶어, 자한의 눈썹이 꿈틀 뒤틀렸다.
“승휘 마마께서 회임하셨다 하옵니다. 하하하.”
“…회임? 지금 회임이라 하였소?”
“예. 궁에서 기별이 오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아직은 공식적으로 회임 사실을 알린 것은 아닌 것 같고, 원체 개방 사람들이 정보력이 뛰어나니 알아 온 것 같사옵니다.”
자한의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간다.
계속되는 전투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마른 대지 위에 단비가 내리듯, 기쁜 소식은 나약해진 제 마음을 이리 추켜 올려준다.
기뻐하는 세자와 달리 도헌의 가슴은 쓰디쓴 약을 먹은 기분이다.
두화의 회임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더라면 주체하지 못하는 상실감과 허망함에, 미친 자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잔인한 소식은 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아무리 평정을 유지하려 해도 쉽지 않다.
“백 장군은 기쁘지 않은 것인가?”
도헌은 힘겹게 굳은 표정을 풀고 답하였다.
“두화… 승휘 마마의 회임이온데 어찌 기쁘지 않겠사옵니까?… 감축드리옵니다, 저하.”
도헌의 입에서 제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자 자한의 미간이 언짢다는 듯 일그러졌다. 하나, 금세 웃으며 도헌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고맙네. 아주 잠시라도 이 기분을 느끼고 싶군.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지원군이 도착했다고 알리고, 왕실의 후손이 생기었다 전하게. 당장 술로 기쁨을 나눌 수는 없으나, 꼭 적들을 물리치고 돌아가면 오늘 나누지 못한 기쁨을 나눌 것이라고도 하게.”
“…예, 저하.”
“아, 내려가면서 개방 방주를 불러주게.”
“예.”
쓰디쓴 물을 삼키듯 억지로 대답한 도헌은 이내 몸을 돌이키어 내려갔다.
잠시 뒤 남루한 차림의 사내 셋이 올라왔다.
자한은 개중 한 사내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화의 오라비라 하던 사내, 지난날 저와 백 장군을 무척이나 경계하였던 것이 생각났다.
남루한 차림이긴 하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자가 한발 앞으로 나왔다.
“저하를 뵙습니다. 개방 방주입니다.”
바닥에 엎드려 예를 갖추려 하자, 자한은 냉큼 일랑의 어깨를 잡아 그러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지 말게. 절은 그대와 그대를 따라 함께 온 많은 백성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네.”
진심이 느껴지는 세자의 말에 일랑은 마음이 꽤 번잡스러웠다. 비록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이곳에 왔지만, 눈앞의 세자는 원망스러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 나라 왕의 아들이다.
“천한 저희가 감히 이리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저 화월국이 저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은 볼 수가 없었던지라….”
“그리 말하지 말게. 천하고 귀하고를 떠나 우리 모두 화월국의 백성이네.”
“…!”
세자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더기에 지저분한 제 어깨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같은 백성이라 말한다.
‘세자, 당신은 당신의 아비와는 조금은 다른 것입니까?’
하나 괜한 작은 희망이라도 품어서는 안 된다.
화월국과 백성을 위해 같은 꿈을 지향하는 그 사람을 믿어 신뢰하고 충심을 다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배신과 가문의 몰락뿐이다.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다를까 싶다.
더구나 여식이 세자의 아이를 잉태했다고 한다. 일이 제가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흘러가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진즉 두화를 데려왔어야 했거늘, 왕실의 후손까지 몸에 품고 있으니 이젠 어찌해야 하나 싶다.
일랑은 당장 이곳에 온 이유만을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저 화월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그뿐이다.
이후 적들의 동태를 살피며 자한은 개방 방주와 장군들과 새로이 적들을 물리칠 계책을 논하였다.
“밤엔 최소한의 횃불만 켜고, 병사들에게 성곽 아랫부분에 깊은 호를 파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날카롭게 잘린 대나무를 세우고, 위를 짚과 흙으로 살살 막아 함정을 만드는 겁니다.”
일랑의 말에 자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전투를 하며 적들이 성곽을 넘으려 애를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수환성은 여러 성 중 가장 크고 높은 성곽으로 유명하다. 하여 지금의 위기에도 잘 버텨 주고 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저 많은 적을 물러나게 할 수 없네.”
자한의 말에 무영이 살짝 끼어들었다.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개방에는 은둔술에 능한 자가 많습니다. 그들이 저 시체 사이에 은둔해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저를 포함 그들이 선봉에 서서 적들을 와해시키겠습니다.”
“하면 선봉에 선 자들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는가?”
수심 가득한 자한의 말에 일랑이 진지하게 대꾸하였다.
“위험해도 누군가는 그리해야지요. 누군가 그리해야 할 일이라면 그에 적합한 자들이 하면 그만입니다.”
일랑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어느 정도 적들을 치면 적들 또한 공격을 강행하겠지요. 하면 그때 미리 준비한 함정으로 유인하고, 동시에 성곽 위에서 끓는 기름을 부어 아예 성 쪽으로는 오지도 못하게 한다면 저들도 당황할 것입니다.”
그렇긴 할 것이다. 여태 맞서 싸우긴 하였으나, 함정을 파진 않았으니까.
“더구나 우리에겐 식량이 문제 될 것은 없으나, 저들은 시간을 끌수록 식량부족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박 장군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만 먹힌다면 적들의 수를 반으로 줄일 수도 있겠사옵니다, 저하.”
“좋소, 한번 해 봅시다.”
밤이 되자 작전대로 횃불의 수를 줄이고, 병사들이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여 함정을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동이 트면 모두 성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주시하였다. 이때 적들이 공격을 강행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기에 모두 긴장을 놓지 않았다.
하나, 적들 또한 아군의 수가 는 것을 아는지 쉬이 공격하지 않았다.
이틀 만에 성곽 주위로 무수히 많은 함정을 파고, 그 밤 천 명에 가까운 개방 식구들이 시체로 위장해 대지 위 시체 사이에 몸을 숨겼다.
여명이 밝기도 전 불화살이 날아왔고, 동시에 벼락같이 울리는 함성에 자한과 장군들은 긴장하며 사태를 주시하였다.
대지 위 널브러진 시체를 넘어온 적들의 수가 반 이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은둔해 있던 아군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적들을 베어내기 시작하였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적을 베어내기를 한참, 무영의 지휘에 아군이 돌연 철수하자 적들은 아귀처럼 달려들어 쫓았다.
반은 성문으로 들어와 냉큼 닫아걸고, 나머지는 미리 준비한 줄을 타고 성곽을 올랐다.
뒤쫓아오던 적들은 함정에 속속들이 빠지고, 살아남은 적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성곽에 갈퀴를 걸어 기어올랐다. 아군은 때에 맞춰 펄펄 끓는 기름을 부어 단 하나도 성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저하, 적들이 당황한 지금 출격해야 합니다!”
“좋다. 모두 나를 따르라!”
‘기필코 오늘은 적을 물리치리라!’
화월국의 군대는 동산처럼 쌓인 시체를 넘어 적을 베면서 적의 주둔지까지 진격하였다.
확실히 늘어난 아군의 수에 당황한 적들은 우왕좌왕하였다. 확실히 당황한 적의 심리 때문에라도 전과 달리 승산이 있어 보인다.
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말 위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다.
자한은 다시 한번 그를 노리기로 하였다. 아무리 베어도 끝도 없는 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들을 아우르는 우두머리 하나를 잡는 것이,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목표물을 예리하게 응시하고, 숨을 참아 활시위를 당겼다.
‘하늘이시여, 부디 화월국을 굽어살피소서!’
간절함을 담은 화살이 활시위를 벗어나 허공을 날아갔다.
이내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어깨 쪽에 명중하였다. 말에서 떨어진 우두머리를 두고 그 주위가 허둥지둥 혼란에 빠졌다.
“지금이다! 적의 우두머리가 쓰러졌다. 우리의 승리니 절대 물러나지 말라!”
자한의 외침에 아군은 함성을 지르며 기세가 등등하여 공격하였다. 아군의 사기에 적은 우왕좌왕하며 당황하여 대오를 이탈하거나 도주하기에 이르러 금세 와해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한과 병사들은 죽기 살기로 적들을 공격하여 드디어 승리하였다.
잠시 후 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를 결박하여 데려온 박 장군이 자한의 앞에 그를 꿇렸다.
“저하, 이자는 성라국의 대장군이라 하옵니다.”
박 장군의 말에 자한이 근엄하게 물었다.
“항복하겠느냐?”
“…!”
대장군이라는 자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요동쳤다.
“이미 패했거늘, 자국을 위해 죽겠다는 것인가?”
“싫… 소. 난 살고 싶소.”
“그럼, 항복인가?”
“그것은….”
대장군이라는 자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였다.
“저하, 잠시만….”
도헌이 슬쩍 다가와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본디 대장군이든 장군이든 적에게 패하면, 나라를 지키지 못함에 죄스러워 자결하려 들거나 적에게 스스로 목숨을 던집니다. 한데 저자의 행동은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살고 싶으나, 스스로 항복하진 않으려 하고 있지요. 더 캐 보십시오. 분명 뭔가 있을 것이옵니다.”
“음….”
도헌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조금 전 그를 추궁할 때 자한 또한 그자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꼈으니까 말이다. 고개를 주억거린 자한은 대장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든 말하라.”
“…그럼, 들어줄 것이요?”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군이라는 자가 주변을 경계하는 듯싶더니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이곳에 살게 해주시오. 그리고 날 보호해 주시오.”
어째서 자국인 성라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화월국에 남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인지 이상했다.
“성라국은 전쟁에서 패하면 무조건 죽이기라도 하는가?”
자한의 물음에 대장군은 삶을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왕은 꼭두각시에 불과하여서, 난 이대로 돌아가면 죽을 거요.”
“왕이 꼭두각시라… 하면 누가 감히 그대의 왕을 인형처럼 조종하여 그대를 죽인단 말인가?”
“부마… 부마도위가 날 죽일 것이오. 아니, 패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우리 가문부터 멸문할 것이오.”
불안한 듯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 자한은 성라국 왕실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감히 부마 따위가 왕을 능멸하지 않고서야, 사사로이 한 가문을 멸문할 수 있단 말인지 의아했다. 부마도위는 결코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
‘성라국은 법이 다른가?’
의구심을 안은 자한의 눈빛에 대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오. 하나, 사실이오. 이미 3년 전부터 부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신들이 자신의 목숨과 가문을 위해 왕을 등졌고, 약에 중독된 왕은 빈껍데기에 불과하여 부마가 대신 국사를 돌보오.”
“어이가 없군. 그것이 가능키나 한 소리인가?”
“부마는 사람의 탈을 쓴 악귀요. 가문이 멸문당하면, 나라도 살아야 그 억울함을 후에라도 갚을 것이 아니오. 난 애초 이딴 전쟁에 관심도 없었소. 그저 내 가족과 편안케 살고 싶었거늘….”
치를 떠는 대장군의 표정만 봐도 그의 말이 거짓 같진 않다.
“음.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돌아갈 자들은 돌아가고, 남을 자들은 남을 수 있도록 전하의 윤허를 받아내겠다.”
그제야 대장군은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함을 예로 취하였다.
“저!”
몸을 돌리려는데 대장군이라는 자가 다급히 부른다.
“이번 전쟁의 시작은 성라국 부마와 그대들의 좌의정이 꾸민 짓이오.”
“뭐라!”
“내 천막에 가면 좌의정이 내게 보낸 서찰이 있소. 결코 거짓이 아니오. 내가 살아남아 화월국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좌의정이 안다면, 자신의 치부를 아는 날 해칠 것이 분명하오.”
그의 말에 자한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였다.
“사림! 서찰을 찾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