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8)화 (68/96)
  • 68. 단비 같은 기쁜 소식

    한편 자객 중 다소 멀쩡하다 싶은 하나를 몰래 빼내 감금한 성무가 익위사의 대장인 좌익위 해솔에게 사실을 고하였다.

    “안 그래도 웃전에 알렸으니, 곧 놈들을 죄 끌고 가면 우리로서는 누구의 짓인지 밝히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잘하였다.”

    “웃전에서 진실을 밝히면 좋겠습니다. 하나, 밝혀내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숨겨둔 놈으로 하여금 저하께옵서 돌아오시어 배후를 밝혀 승휘 마마를 노린 놈을 잡고 싶었습니다.”

    “그래. 귀한 왕실의 후손을 잉태하신 분이다. 우리가 지켜드려야 저하께서 사신다.”

    “예.”

    성무는 동백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까 그분의 발차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전 자객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을 수도, 아니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웃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제 임무이거늘 오히려 목숨을 빚졌다.

    ‘언젠가 이 목숨값은 꼭 갚겠습니다, 마마.’

    보기엔 여리디여린 여인이건만, 활도 검도 익위사들에 비교하여 하나 뒤처지지 않은 솜씨에 다소 놀라긴 하였다. 놀람과 존경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동백궁 안쪽을 기웃대며 누군가를 찾았다.

    ‘수규는 괜찮은 건가? 아까 보이지 않았으니 잘 숨어 계셨나?’

    맹지가 걱정된 성무의 시선이 침소 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데, 침소 문이 열리며 맹지가 다급하게 나와 부엌 쪽으로 간다. 그 모습에 안도하며 성무는 몸을 돌이켰다.

    ***

    자객 소동이 있고, 익위사들이 후원을 정리한 지 1각 정도 되었을 때, 두화는 그제야 금침 위에 쉴 수 있었다.

    자객의 피가 묻은 것이 껄끄럽고, 불길하다고 어찌나 울면서 침의를 갈아입히는지 어지럽지만, 두화는 맹지가 하는 대로 따랐다.

    아무렇지 않게 검을 들고 자객을 베었어도 놀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이럴 때 그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 생각하다가도 그는 이보다도 더한 곳에서 사활을 걸고 싸울 텐데 싶어,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다.

    놀라고 분한 마음을 애써 잠재우려 하지만, 이상하게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저하….’

    그를 생각하며 배를 감싸는데 침소 문이 발칵 열렸다.

    두화도 맹지도 놀라 문을 바라봤다.

    침의에 겉옷만 걸친 중전이 치마를 잡고 달려온다. 사색이 되어 달려와 손을 잡고는 머리에서 발까지 세세히 살피더니 그제야 안도한다.

    “다친 곳은 없느냐?”

    “예.”

    “천만다행이로고. 다행이야. 아, 연 상궁! 게 있느냐?”

    “예, 중전마마.”

    “어의는 어찌 된 것이야? 왜 안 와?”

    다급하면서도 노기를 띤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사람을 보냈으니 곧 도착할 것이옵니다.”

    “다시 보내거라. 빨리 오지 않는다면 경을 치겠다고 재촉하란 말이다!”

    “예, 중전마마.”

    연 상궁이 물러가고 침소 문이 닫혔다.

    좀 전 으름장을 놓으며 소리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얼굴 가득 두화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은 손을 놓지 않아 오히려 두화가 불편하고 당황스럽기만 하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두화는 잡은 손을 조심스레 빼고는 예를 갖춰 몸을 조아렸다.

    “중전마마, 소인 때문에 심려를 끼쳐 죄송하옵니다. 또 이리 직접 납시어 소인을 걱정하시니, 감읍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중전은 두화의 어깨를 살포시 잡아 앉혔다.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난 우리 두 사람이 제법 친해졌다고 여겼거늘… 승휘는 여전히 날 어려워하는구나.”

    “예? 아… 그것이 아니라….”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두화를 보며 중전이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되었느니. 이 사람은 승휘가 웃는 모습이 참 좋다. 뭐, 승휘의 요리 때문에 더 좋다고는 말 못 하지만 말이다.”

    우스갯소리에 두화는 그제야 중전이 불안해하는 절 다독여주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곁에 세자가 없어 힘들고 두렵고 외로운 순간이라 여겼는데, 중전의 말 한마디와 따뜻한 손길에 또 눈물이 난다.

    “송구하옵니다. 어찌 이리 자꾸 눈물이 흔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얼굴을 돌려 눈물을 훔치니, 중전은 그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러워 품에 안아 주었다. 여인으로서 간밤의 일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꼬.

    “괜찮으니 울거라. 승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내 품을 빌려주마.”

    “중전마마… 흐흡.”

    어의가 올 때까지 중전은 두화를 안아 그 등을 천천히 다독여줬다.

    그로부터 한 식경이 넘어서야 어의가 도착하였다.

    진맥을 하기도 전에 중전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어의는 몇 번이고 송구하다고 말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와 두화 모두 무사하다고 하였다.

    “그래도 혹 모르니 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놀랐을 때 잘 듣는 약을 지어 올리게. 아, 그리고 몸을 보하는 것도 따로 짓고… 그리고.”

    “저, 중전마마. 그것이 회임을 한 여인은 될 수 있으면 그리 많은 약을 먹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아, 그런가. 그럼, 알아서 승휘에게 잘 맞는 것으로 조금만 지어 보내게.”

    “예, 그리하겠나이다.”

    어의와 대화하는 중전을 가만히 바라보던 두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저하께서 계시지 않아도 중전마마가 계시니까… 견딜 수 있어. 저하가 오시는 날까지 버티어, 우리의 아이가 배 속에 있다고 알려 드릴 것이야.’

    ***

    날이 밝자 궁이 발칵 뒤집혔다.

    간밤 궁 안에 자객이 들었다는 것과 세자의 후궁인 승휘의 회임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다들 수군덕거렸다.

    “세상에 동백궁에 자객이 들었대 글쎄.”

    “뭐? 동백궁에?”

    “그래. 내 아까 소주방에서 들었는데 승휘 마마가 회임해서….”

    “회임?”

    “응. 나 같았으면 회임하자마자 나, 회임했소하고 떠벌렸을 텐데… 그러니까 승휘 마마는 뭔가를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 싶어. 그러니 회임한 것을 여태 숨겼지. 한데 용케도 숨기고 계셨네. 이상하게 궁에서는 작은 비밀도 숨길 수가 없는데 말이야.”

    말하던 궁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더니 이내 작게 소곤거렸다.

    “이건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지만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 비밀 지켜야 해. 글쎄 승휘 마마 배 속의 용종을 없애려고 누군가 사주해서 간밤, 그런 일을 벌인 거래.”

    “어머, 정말? 그럼 누가 그런 짓을!”

    “그야 모르지. 승휘 마마는 출신부터 궁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또 회임까지 했으니 현재 제일 아니꼽고 못마땅해할 사람이 누굴까? 그런데 내 생각엔 말이야….”

    “…”

    “내 생각엔 그 누구도 아닌 것 같아.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고 자작극을 벌인 건 아닐까 싶어?”

    “뭐?”

    말도 안 된다며 듣던 궁인이 반박했다.

    “그렇잖아. 세상 기품있고 선하신 세자빈 마노라께서는 지금 승휘 마마를 편애하는 중궁전의 뒷배로 침소에 갇히셨으니, 그분이 그러실 리 만무하잖아. 안타깝고 불쌍해 죽겠어, 우리 세자빈 마노라.”

    “그런가?”

    “아무튼, 저하께옵서 아니 계시는데 회임은 했고, 자신의 입지가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뭔가 팍! 기막힌 사건이 터져줘야 시선이 집중되잖아. 그래서 스스로 자작극을 벌인 거지.”

    “와, 정말? 진짜 그런거라면... 무섭다. 근데 넌 어찌 그리 똑똑해?”

    그때 그곳을 지나가다가 속닥거리는 궁인의 모습에, 구석진 곳에서 몸을 숨겨 듣고 있던 맹지가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 일침을 날렸다.

    “네, 이년들! 감히 지금 뭐라 입을 놀리는 게냐?”

    처음엔 누군가 싶어 힐끔대며 입을 삐죽대던 궁인들은 이내 동백궁 수규임을 확인하고는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옵니다. 그저 잡담을 나눴을 뿐이옵니다.”

    “잡담?”

    성큼 다가온 맹지가 궁인들 앞에 서서 날카롭게 윽박질렀다.

    “승휘 마마께서 한낱 너희 입에 오르내리는 잡담거리에 불과하였더냐!”

    “그것이 아니오라….”

    “아니옵니다. 소문이 그리 나니 저희끼리 그냥 궁금하여…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딱 봐도 이것들이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 그냥 하는 말임을 맹지는 느낄 수 있었다.

    감히 제 웃전을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씹어대다니, 괘씸하고 화가 났다.

    “네 년들이 쥐불이 글려 하며 보고 느낀 것이 없으니, 이리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지. 함부로 놀린 주둥이를 진짜 불로 지져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여봐라, 이 두 년을 세수간 광에 잡아 가두고, 웃전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 물 한 모금 주지 말거라.”

    지나가는 궁인 셋을 불러 세운 맹지가 무섭게 명을 내리자, 궁인 셋은 맹지의 수규 표식을 보고는 냉큼 달려와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예.”

    “제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세수간 광은 무섭습니다. 다시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을 터이니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내 끌려가며 두 궁녀는 울며 애원하였지만, 맹지는 차갑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봐야 세수간이다. 빨래를 빨기 위한 잿물을 만들기 위해, 짚과 콩깍지 같은 것을 태운 재가 쌓여 있는 그저 어두운 공간일 뿐이다.

    ‘무섭다고? 네 년들이 쉬이 나불거린 가벼운 말이 우리 승휘 마마껜 날카로운 칼이 되어 돌아오는데, 그깟 어둡고 칙칙한 곳이 무에 무서워! 족히 닷새는 가둬 둘 것이야.’

    구석구석 나도는 헛소문에, 맹지는 그 여파가 웃전인 두화에게 닥칠까 염려스럽다.

    재게 발을 놀려 동백궁으로 향하였다.

    ***

    한편 자한은 적의 우두머리를 향해 활을 날렸지만, 워낙 적의 수가 많기에 번번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자의 가슴을 맞고 실패했다. 그만큼 치열하였기에 아군인지 적군이지 구별하기 힘들다.

    결국 또 물러나 성으로 피해야만 했다.

    ‘어찌해야 할까, 대지 위를 까맣게 점령한 적을 어찌해야만 물릴 수 있을까?’

    자한의 고심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임에도 다른 방책이 있진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고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다.

    근심에 한숨이 터져 나오는데, 백 장군과 수환성의 박 장군이 다급하게 성곽 위로 올라왔다.

    “저하, 기쁜 소식이 있나이다.”

    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박 장군이 고한다.

    한데 기쁜 소식이라면서 백 장군의 어두운 표정은 어딘지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말해 보시오.”

    “두 가지옵니다. 하나는 개방의 방주와 그 무리가 돕고자 왔습니다.”

    “정말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예. 그들은 이미 진즉부터 변방에서 개별적으로 적들과 싸워왔지만, 승산이 나지 않으니 차라리 수환성에 합류하여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자한은 기쁨의 숨을 내쉬었다.

    아군의 손실이 컸던 만큼 앞으로 버티려면 손실된 수만큼 채워야만 하는데, 병사가 없어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데 이런 때에 개방에서 돕겠다고 나서니 어찌 고맙지 아니할까.

    “무려 그 수가 5천이 넘사옵니다.”

    “오오, 다행이군. 방주라는 자를 만나고 싶소.”

    자한은 지원해온 그들의 수가 5천이라는 것에 놀랐으며, 또한 고마웠고 그리고 미안했다.

    화월국은 4계절이 뚜렷하여 농사짓기 좋으니 작물이 잘 자라, 대부분의 귀족과 평민들이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다.

    해서 비록 천한 거지들이 나돈다고 하여도 그 수가 극히 소수라 생각하였거늘, 지원해 온 그들의 상상도 못 할 숫자에 놀랐다. 그리고 그리 많은 자들이 이때까지 힘겹게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조금 이따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하옵고….”

    “또 무엇이오?”

    “저들이 오며 가져온 소식이온데… 아직 궁에서 기별을 못 받으셨지요, 저하?”

    “혹 궁 안에 일이라도 생겼소?”

    자한의 미간이 급격하게 좁혀졌다. 두화부터 떠올린 자한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저하, 감축드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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