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7)화 (67/96)
  • 67. 한밤의 자객

    “어, 어!”

    금방이라도 뒤로 꽈당 넘어질 줄 알았는데, 맹지의 목과 어깨에 단단한 손이 감싸며 잡아당긴다.

    긴 팔로 맹지를 붙잡은 성무가 좀 전과는 달리 굳은 얼굴로 말하였다.

    “…이러니 불안한 겁니다, 제가.”

    “…!”

    스쳐 지나듯 바라보는 눈길이 아닌, 처음으로 서로를 제대로 바라봤다.

    다치지 않게 목과 어깨를 잡은 커다란 손길에, 맹지의 마구 뛰어대는 심장이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뭔 사달이 나도 날 것만 같아, 뜨겁게 바라보는 그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부끄러워하는 맹지의 행동에 성무는 작게 미소 짓고는 속삭였다.

    “저치가 말은 많아도 어디 가서 말을 흘릴 놈은 아닙니다. 오직 내게만 말을 한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위험하게 담에서 이러지 말고 문을 이용하십시오.”

    천천히 손을 떼고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손을 힐끗 본 맹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뒤꼍으로 뛰어갔다.

    화끈대는 뺨에 두 손을 올려 달아오른 열감을 식히려 애쓰지만 좀처럼 식지 않는다.

    ‘누가 보면 사내에게 환장한 줄 알겠네. 미친것도 아니고 이건 뭐 보는 사내마다 심장이 이리 뛰어대니… 아휴, 정신 차리자,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을.’

    ***

    중전은 벌써 열흘이 지날 때까지도 어의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알게 모르게 궁에 퍼진 헛소문이 내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오히려 불리해지는 것은 저와 승휘다.

    “헛소문의 근원지는 분명 세자빈을 위하는 자이니… 좌의정 쪽 사람이겠지.”

    저쪽에서 먼저 이리 움직였다는 것은 침소에 갇힌 세자빈을 위해, 공식적으로 저와 승휘를 편전에서 거론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 오기에 마음이 초조해진다.

    하나, 그렇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증좌를 가지고 공식적으로 세자빈의 죄를 묻는다면, 저들은 쉽게 이번 일에서 빠져나가 발톱을 숨기고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계략을 펼칠 것이다. 이번에 싹 잡아 그 간악한 것들의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장침 위로 규칙적으로 톡톡 내려지던 손가락이 돌연 멈추었다.

    “연 상궁!”

    “예, 중전마마.”

    “서찰을 써 줄 터이니 사가에 다녀와야겠다.”

    “예? 사가에요?”

    중전을 모시며 사가와 사사로이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에, 연 상궁은 놀라 감히 웃전을 바라봤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나도 든든한 뒷배를 좀 써야겠어. 자칫 증좌가 나오지 않는다면 저들이 감히 나는 건드리진 못해도 용종을 가진 승휘라도 어떻게 해서든 끌어내리려 하겠지. 아버님께 전해. 그리고 오라버니들에게도 아버님의 결정에 따라 달라고 부탁드려.”

    “하명 받잡나이다.”

    빠르게 써 내려가는 붓끝에 시선이 닿은 중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어두운 밤, 열댓 명의 익위사 중 다섯 명이 번을 서며 동백궁 주위를 지키고, 두 명의 익위사가 동백궁 안, 침소 주위를 지킨다.

    오늘도 역시나 두화는 검 자루를 닦으며 자한을 그리워했다.

    “오늘도 하루가 갔어요, 저하. 저만 편히 있는 것 같아 죄스럽고 저하께서 무사하신지 걱정돼요.”

    한번 닦을 때마다 마치 그를 대하듯 중얼댔다.

    “전 괜찮아요. 중전마마께서 신경 써주시고, 맹지도 그리고 익위사들도 모두 잘해주니까… 참을 수 있어요.”

    하나, 말과 달리 닦던 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리 말하면 참는 것이 쉬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저하.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보고 싶어서 자꾸만 눈물이 나니 어떡하죠?”

    결국 검 자루를 가슴에 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보고 싶다, 정말…”

    그때였다.

    밖이 소란스럽기 시작하더니, 이내 쇠붙이가 맞닿으며 내는 쇳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단 한 놈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다급한 익위사의 외침에, 두화의 눈이 커지며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두화는 검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창밖 달빛에 이지러진 검은 그림자가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며 침소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것만 봐도 보통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객!’

    적이 몇인지 모르나, 동백궁을 지키는 익위사들이 있으니 나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들리는 외마디 비명이 마치 저를 지키던 익위사가 당하는 소리로 자꾸만 들린다.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가는 방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흐트러져 내려진 머리카락을 질끈 하나로 묶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갔다.

    정원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적의 수만 해도 익위사의 수를 훨씬 넘었다.

    ‘세상에, 뭐가 저리 많아. 저들이 들어오는 동안 궁 경비는 뭘 한 거지? 이대로는 안 돼!’

    다시 방으로 들어간 두화는 자한이 준 활을 들고나왔다.

    허공을 날다시피 빠른 동작으로 익위사들을 공격하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백발백중으로 적의 팔이나 다리를 맞혀 그들의 움직임을 제압했다. 벌써 다섯이나 그리 만들었으나 아직도 적의 수는 줄지 않았다.

    어수선함에 나왔던 맹지도 놀라 두화의 뒤로 와 울먹였다.

    “마마, 어찌합니까?”

    “넌 내 침소에 들어가 있어, 어서!”

    제 뒤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안전하게 있는 것이 돕는 것이다.

    맹지가 침소로 들어가는 것을 본 두화는 이내 검을 빼 들고 내려가, 익위사를 내려치려는 적의 검을 쳐내버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칼부림을 하는 거냐?”

    두화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매섭게 밤공기를 갈랐다.

    적들의 시선이 바로 두화에게 닿았다.

    풀어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고 침의만 걸친 여인이 검을 들고 있는 모습에, 적들은 비웃으며 조소하였다.

    곁에 있던 익위사조차 두화를 만류하며 어서 피하라 부추겼다. 하나 랑과 성무는 이미 두화의 활 솜씨와 세자와의 대련을 보았기에, 자신들조차 불리한 현 상황에서 두화의 출현에 다소 안도하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날 죽이러 온 거지?”

    적들은 말없이 키득거렸다.

    “네놈들이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제야 누군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눈을 감는 것은 마마이실 겁니다.”

    “네 이놈! 그래, 죽고 싶다면 마다하지 않으마.”

    두화는 제 배를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가, 미안하구나. 잠시면 된다. 잠시만… 자거라.’

    이내 검을 틀어 고쳐 쥔 두화가 저를 비웃던 자객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그 바람에 잠시 멈추었던 칼부림이 다시금 시작되고,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객들은 두화를 노렸지만, 곁을 지키는 익위사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두화는 가까이 있는 자객부터 하나하나 베어나갔다.

    이쯤 되니 여인이라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던 자객들도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죽이러 온 자객이 이젠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감히 나와 용종을 해하려 해! 너희 모두 오늘 밤 무사히 나가진 못할 것이니! 싸우면서 듣게. 되도록 큰 소리로 우리의 상황을 알려야 하네.”

    “예, 마마!”

    그가 보고 싶어, 또 그가 걱정되어 꾹꾹 눌러 참던 그리움과 세자빈의 흉포한 짓거리를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울분처럼 터져 나와 검 끝에 실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궁을 지키는 숙위군이든 누구라도 이곳의 상황을 알길 바라며 두화는 검을 휘두를때마다 소리쳤다.

    사람을 베는 것이 처음이라 자객 하나를 벨 적마다 손이 떨려 들었다. 하나, 용종을 지키기 위해, 저가 살기 위해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 베었다.

    바닥에 쓰러진 자객들이 신음을 토하며 몸부림칠 때, 그때까지도 서서 버티던 세 명의 자객은 예상치 못한 두화의 선전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지금이라도 칼을 내려놓고, 누구의 사주인지 말한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두화의 차가운 말에 자객은 잠시 망설였다.

    하나, 실패한 이상 설령 살아 돌아간다고 하여도 좌의정의 손아귀에서 살아날 수는 없다. 임무에 실패한 대가로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진퇴양난에 자객은 차라리 사력을 다해, 눈앞의 여인을 죽이는 것만이 자신이 살길이라 생각했다.

    “말… 하겠습니다. 그분은….”

    자객은 뭐라 하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작았다.

    잘 들리지 않는다.

    두화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할 그때, 성무의 눈이 커지며 두화의 앞을 가로막으려 하였다.

    하나, 두화도 이미 보았다. 자객의 칼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말이다. 두화는 급한 대로 성무를 발로 차 옆으로 치워내고는 재빨리 검을 그대로 사선으로 내려그었다.

    “윽!”

    허공을 그리던 검 끝이 제 발끝에 닿고 나서야, 두화도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나가떨어진 성무는 그저 당황스럽고 놀라서 바라만 봤다. 제가 지켜야 할 윗전에게 목숨을 건졌다.

    두화는 거친 숨을 겨우 갈무리하고 허리를 폈다.

    냉철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젠 너희 둘 남았구나. 누가 말할 테냐?”

    남은 두 명의 자객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내 빠르게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맥없이 쓰러지는 자객을 두화는 노려보았다. 그리고 근엄한 목소리로 익위사들에게 처음으로 명을 내렸다.

    “내가 벤 자들의 목숨은 붙어 있을 것이네. 누구라도 좋으니 반드시 배후를 찾게!”

    “예!”

    “그리고 랑 익위사는 지금 즉시 동백궁에 자객이 들었음을 웃전에 알리게. 이렇게까지 소란스러웠는데 누구도 오지 않는 것을 보면, 궁내부에도 이들과 내통한 자들이 한둘이 아닐걸세.”

    ‘이건 덮을 일이 아니니까.’

    이가 갈릴 만큼 분노가 치솟는다.

    ‘하다 하다 나라님이 있는 궁에 자객을 보내 나를 해하려 하다니!’

    이젠 더는 참지 못하겠다.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나, 이상하게도 정신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겠사옵니다.”

    “나머진 이자들을 모두 동백궁 밖으로 빼내게, 당장!”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익위사를 뒤로 하고 두화는 침소로 들어왔다.

    울며 발을 동동 구르던 맹지가 두화를 끌어안았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피가 튄 침의를 보고, 상처라도 난 것인가 싶어, 제 몸 곳곳을 매만지며 우는 맹지를 보니 두화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왜 아니겠는가.

    처음으로 사람을 베었다.

    제 손에 묻은 피를 보고 있자니 뒤늦게 숨이 막힌다.

    몇 되지 않는 자객을 벤 저도 이럴진대, 전쟁터에서 매일 사람을 베고 죽여야만 하는 그의 마음은 어떨까 싶다.

    “나, 물 좀 줘.”

    “예. 마마.”

    맹지가 냉큼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떠 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시는데 갑자기 울컥 치솟는 뭔가에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흡… 흐으윽.”

    “흡, 마마….”

    대관절 제가 이곳에서 그 어떤 큰 죄를 지었기에, 상대는 저를 이리 죽이고 싶어 하는지 당최 모르겠다. 억울하고 화가 나 미칠 것 같다.

    “이젠 참지 않아. 반드시 배후를 밝혀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맹지는 분을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떠는 웃전의 손을 꼭 잡았다.

    “예. 꼭 그리될 것이옵니다, 마마.”

    맹지도 덩달아 울며 곁을 지켰다.

    ***

    동백궁에 자객이 들었다는 소리에 함께 밤을 보내던 왕과 중전은 분노하였다. 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 살아있는 자객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중전의 한탄에 왕 또한 탄식을 감추지 못하였다.

    “누구의 짓인지 반드시 밝혀, 감히 왕실의 후손을 해하려 한 죗값을 톡톡히 받아낼 것이오!”

    “누구인지 심증이 갑니다, 전하.”

    “감히 궁에 자객을 들일만큼 무지한 배포를 지닌 자가 누구인지 과인도 짐작하오.”

    “전하, 이는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 소란이 있는데도 어찌 궁이 이리도 조용하답니까?”

    “과인도 그럴 생각이오. 이 일에 관련하여 책임을 질 자들에게 엄벌을 내릴 것이니.”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이내 곤룡포를 걸친 왕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중궁전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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