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6)화 (66/96)
  • 66. 대관절 어느 입 싼 것들이!

    평소 까다롭기는 하나 밝은 중전의 마음속 깊은 아픔을 왕 또한 모르진 않는다.

    처음 초야를 치르며 당돌하게도 중전은 청을 하였었다.

    -전하, 신첩은 아이를 무척 좋아하옵니다.

    -그래요?

    -예. 하여 낳을 수만 있다면 많이 낳고 싶사옵니다.

    왕실의 후손이 귀한 만큼, 활짝 핀 꽃처럼 웃던 어린 중전의 청은 기특하였다.

    -만약 아들이라도 낳는다면 절대 귀하게 기르지 않고, 사가로 내보내 신첩의 오라비와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게 해주고 싶사옵니다. 그리고 공주가 태어나면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곁에 두고 싶사옵니다.

    -왕자라면 궁에서 왕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교육을 받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어찌 궁 밖으로 내보내려 하오, 중전?

    -전하, 세자가 있사온데, 신첩이 왕자를 낳아 혹여라도 권력에 욕심 있는 자들에게 이용당할까 그것이 염려되옵니다. 신첩은 왕자가 그들에게 휘말리는 것이 싫사옵니다. 또한 당파싸움에서 세자의 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왕자 또한 잃을 수 있으니, 이는 결국 당파의 싸움으로 왕실이 무너지는 격이라 사료 되옵니다.

    비록 어린 중전이나 생각이 깊으니 장차 세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또한 왕실의 안정을 기대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실제로 중전은 그 어떤 당파와도 손잡지 않고, 사가를 멀리하였다. 아랫사람에게 덕을 베풀며, 내명부 또한 잘 다스렸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먼저 떠난 중전도 그랬거니와, 새로 맞이한 중전에게도 아이는 쉽게 들어서지 않았다.

    총명하고 밝았던 중전은 점점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예민해졌다. 그러나 먼저 떠난 중전과 달리 새로 맞이한 중전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전하, 신첩이 부덕하여 왕실의 후손을 잉태할 수 없으니 후궁을 들이시옵소서.

    -그 무슨 말이요. 되었소이다. 중전이 그간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과인이 모르지 않으니 그런 말은 마시오.

    -하오면 희빈 박 씨를 조금 더 총애하여...

    -희빈은 몸이 병약하여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소. 중전, 우리에게 아이는 없으나 세자가 있으니 더는 아이 갖는 것에 연연하지 마시오.

    -…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날 이후, 중전은 매달 행해온 기도와 먹던 탕약도 끊고 그 시간을 내명부를 다스리는 데 힘을 썼다.

    아마 그때부터 세자와 조금씩 사이가 멀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세자에게 더 신경 쓰며 마음을 주려 하였지만, 한참 크기 시작한 세자는 새 중전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간혹 중전이 감모에 걸려 중궁전에서 나오지 못할 때면, 세자는 또 약재를 들고 중궁전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왕은 자잘한 보고를 받으면서도 그런 아들이 답답하였지만, 친모도 아닌데다가, 한창 생각을 많이 하는 나이니,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가만 보면 중전과 세자는 서로 위하는 마음은 있으나, 자존심 강한 두 사람의 한번 뒤틀어진 마음은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조금씩 긁어대는 귀여운 앙숙이었다. 선을 넘지 않는 그, 정도가 과하지 않기에 왕 또한 나서지 않았다.

    아이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였는지 알기에, 오늘의 일은 비단 승휘의 일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중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대가 얼마나 왕실의 후손을 원하는지 과인이 다 아오.”

    “전하, 정말 독이라면 신첩은 세자빈을 볼 자신이 없사옵니다. 어찌 사람이 되어….”

    간악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려 할 수 있는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중전은 왕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감히 왕실의 후손을 해하려 한 것 자체가 크나큰 죄이거늘, 증좌만 확실하다면 결코 좌시할 수만은 없지.”

    ‘더욱이 좌의정과 관련되었다면, 기필코 이번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야.’

    왕은 마치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듯 노기 서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세자의 총애를 받는 승휘가 세자께옵서 궁에 안 계시니, 그 건방이 하늘까지 닿아 세자빈이 훈계하였다. 한데, 승휘를 편애하는 중전이 이를 마땅찮게 여겨, 세자빈을 침소에 가두었다는 거짓에 거짓이 섞인 허무맹랑한 소문이 궁 안에 돌기 시작하였다.

    식재료를 가져오다 소문을 듣게 된 맹지가 분해하며 동백궁에 들어섰다.

    씩씩대며 들어서다가 랑과 마주쳤다.

    “표정이 어찌 좋지 못하십니다.”

    세자빈궁에서 독살로 의심되던 차 사건이 있던 그 날 이후, 닷새가 지난 지금까지도 랑과는 딱 두어 번 말을 섞었다. 맹지는 그가 말을 걸어오자 화가 났다는 것도 잊은 채 제멋대로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기만 하다.

    “아, 그게 그러니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한숨을 내쉰 맹지가 결국 밖에서 들은 것들을 종알대며 죄 말하였다.

    듣는 와중 호랑도 어이가 없다고, 허리에 손을 올리며 열을 내었다.

    “아니, 대관절 어느 입 싼 것들이 그딴 말을 한답니까? 어디 승휘 마마가 그럴 분이십니까? 아니, 오히려 승휘 마마께서 당하신 것을… 누군지 말씀하십시오. 내 당장 달려가서 헛소리하는 것들의 입을 그냥 쫙 찢어놓을!”

    “풉!”

    생긴 것은 아니 그런데 한번 말꼬가 트이니 대책 없이 말이 많다.

    숨도 쉬지 않고 제 앞에서 열을 내는데 이건 뭐 저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은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찌 웃으십니까?”

    맹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랑이 가까이 다가온다.

    “왜 웃는지 말씀 안 해주십니까?”

    “그냥… 그냥 웃었습니다.”

    “허니까 왜요?”

    ‘한데 왜 자꾸 다가오면서 말하는 거야. 그냥 그 자리에서 물으면 안 되는 건가?’

    맹지는 그가 다가올 적마다 뒤로 물러나며 아니라고 하지만, 떨리는 마음은 주체가 되지 않는다.

    뒤로 더 물러나려 하는데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아이고!”

    넘어가려는 찰나 맹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뭔 일이래?’

    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랑이 지금 제 손을 잡고,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

    한데 그럼 제 허리를 잡은 손은 누구 손?

    맹지가 고개를 올려 바라봤다.

    항시 랑과 함께 있는 성무가 인상을 쓴 채 보고 있었다.

    두 눈을 깜빡이던 맹지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는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손을 놓아버렸다. 바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맹지가 아픔에 인상을 쓰고 일어서서 두 사내를 노려봤다.

    “아니, 사람을 그리 놔버리면 어찌합니까?”

    그러자 랑 이 하는 말이.

    “그거야 수규가 소리를 지르니 놀라서….”

    곁에 있던 성무도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보태었다.

    “난, 이 자식이 손을 놓길래 따라 놓았을 뿐입니다.”

    두 사람의 말에 기가 찬 맹지는 탄식 섞인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거렸다. 뭐라 할 말은 참 많은데 두 사람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괜히 짜증이 나, 침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랑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 랑과 달리 성무는 피식 웃는다.

    “자넨 어찌 웃어? 수규가 화난 것이 웃긴가?”

    “톡톡 쏘아대시니 귀… 흐음. 그냥 웃었네. 얼른 순번이나 바꾸세.”

    나가면서도 성무는 뒤를 힐끗 돌아봤다.

    처음부터 승휘 마마를 호위하면서도 늘 눈에 띈 작은 여인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 여인이 제 옆에 있는 랑에게 관심을 주는 것도 은근히 기분이 불편했다.

    한데 조금 전 뒤로 넘어지려 할 때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대로 넘어졌다면 침소 앞, 늘어져 있는 석함의 섬돌에 머리가 부딪쳤을 수도 있다. 다행히 허리를 잡아, 위험한 상황은 모면했다.

    잠시지만 그 작은 얼굴의 눈과 입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작은 얼굴이 뭐 그리 동글동글한지 좋아하는 찹쌀떡 같아서, 단번에 눈 속에 들어찼다.

    한편 침소로 들어가 문고리를 잡은 맹지는 괜히 틈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두 사람을 보려고, 게슴츠레 떠진 눈으로 기웃거렸다.

    “뭐해?”

    죄지은 것도 없건만, 괜히 놀라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네? 아, 아무것도 안 했사옵니다. 마마.”

    “그런데 뭘 그리 놀라? 한데 그건 왜 가지고 들어온 건데?”

    두화가 손으로 가리킨 것을 본 맹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맹추 같은 짓을 한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식재료를 그냥 그대로 웃전의 방까지 들고 와 버렸다.

    “내일 아침까지 쓸 재료이옵니다. 바구니는 금방 밖에 내놓겠사옵니다, 마마.”

    “그렇게 해. 참, 별다른 이야기 들은 건 없어?”

    “무슨 이야기….”

    ‘설마 소문이라도 들으셨나? 그럴 리 없잖아. 벌써 닷새 동안 동백궁에만 계셨는걸.’

    “중전마마께서 뭔가 더 알아내신 건 없는지, 세자빈은 어찌 되는지… 여기에만 있으니 도통 뭘 알 수 있어야지.”

    그냥 전날의 사건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것이 궁금한 웃전의 하문에, 맹지는 다소 안도하였다. 자신이 들어도 열 받고 화가 나는 소문인데, 정작 소문의 주인공인 마마가 듣는다면 배 속 아기님에게도 무척 좋지 못할 것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옵니다. 만약 증좌가 나왔다면 벌써 궁이 시끄러워졌겠지요. 에휴, 마마께서는 그냥 편히 계시옵소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즉시 알려줘야 해.”

    “알겠사옵니다.”

    웃으며 밖으로 나간 맹지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금 전 호랑에게 소문을 말한 것이 떠올랐다.

    자칫 마마께 실수라도 말을 꺼내게 될까 싶어 염려되었다.

    ‘그래, 아까 보니 한번 말꼬를 트면 정신없이 말하던데… 결코 가벼운 입이 아니야. 그런 사람을 어찌 믿고… 주의를 시켜야 해, 암만!’

    식재료를 정리한 맹지는 혹 두화가 창으로 볼까 싶어, 자꾸만 뒤를 힐끗대고는 담장으로 향했다.

    다소 제 키에 비해 높았기에, 돌 위에 서고도 까치 발을 서야만 했다. 간신히 담에 매달려 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거기… 호랑님!”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느지막이 낮것을 먹던 호랑이 뛰어왔다.

    한데 성무는 왜 따라오는 게야?

    ‘아니, 이 두 사람은 늘 한 사람에 한 사람을 더 얹어주나, 한 사람만 불렀건만 왜 같이 움직이는 거야?’

    입을 삐죽대던 맹지가 작게 소곤거렸다.

    “거기… 익위사님은 잠시만 물러나 주시지요.”

    “무슨 비밀스러운 말씀을 하시려고 이 사람만 쏙 빼놓는답니까, 수규?”

    성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러 더 가까이 다가오자, 맹지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거렸다. 그래봐야 성무와 랑이 있는 바깥쪽에서는 맹지의 정수리와 눈만 보였다.

    “랑 익위사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 말입니다.”

    “뭐였지요?”

    “아까 승휘 마마에 관한 헛소문에 대해….”

    “아! 맞다. 예, 그런데요?”

    “절대로 우리 승휘 마마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 행여 익위사들끼리도 숙덕대지 말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짐짓 무서운 표정이라고 짓는 것이 작고 동그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다다. 성무는 그게 또 눈에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늘어진다.

    “아휴, 당연하지요. 알겠습니다.”

    한데 왜, 랑 익위사는 자신보다 키가 한참이나 더 큰 성무의 어깨에 손을 올려 툭툭 치는 거지?

    “설마 벌써… 다른 분께 이야기한 건 아니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맹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라?

    랑이 제 시선을 회피하면서 성무를 자꾸만 올려다본다. 마치 도움을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아, 저 사내는 그냥 겉만 멀쩡했어, 겉만! 입이 저리 싸서야 원! 하긴 끼리끼리 붙어 다니니 두 사람 다 똑같겠지.’

    맹지가 랑을 노려보는데, 성무가 랑의 손을 치워내고는 바짝 다가와 고개를 내렸다. 성무가 맹지를 내려다본다. 맹지는 괜히 당황하여 눈을 깜빡여댔다.

    “뭐, 뭡니까?”

    살짝 높아진 목소리에 성무가 조금 더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금 수규의 눈빛에서 날 저치와 같은 취급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

    무예를 잘하면 사람 마음마저 들여다볼 수 있나?

    맹지는 뜨끔하여 고개를 뒤로 내빼었다.

    한데 돌멩이를 밟고 섰던지라 몸이 기우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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