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5)화 (65/96)
  • 65. 중전의 분노

    전쟁이 일어난 시국이건만 마치 딴 나라 사정인 듯 설변도는 여유롭게 난을 쳐내고 있다.

    전체적인 난의 고귀함을 흩트리는, 누렇게 변해가는 잎 하나가 좋았던 기분을 망친다. 가위를 든 손이 주저함 없이 그 부분을 싹둑 잘라버린다.

    “여기가 아니라, 아예 밑동까지 잘라버려야 새로운 잎이 나려나?”

    히죽 웃으며 밑동까지 싹둑 잘라버렸다.

    “역시 난이든 사람이든 내 눈에 차지 않으면 이리되는 게야.”

    마침 밖에서 궁에서 사람이 왔다 알린다.

    “오, 들라 하여라.”

    침소로 든 초아가 예를 갖추고는 소매 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바치었다.

    여식이 보낸 서찰이라 기분이 좋은 설변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하나, 서찰을 펼쳐 읽던 설변도의 눈살이 금세 일그러졌다. 여식이 독을 쓰다가 실패한 내용보다도 동백궁 후궁이 회임하였다는 글귀에 버럭 소리를 쳤다.

    “뭐라! 동백궁이 회임을 해?”

    초아는 그간 있었던 일에 죄 고하였다.

    설변도의 분노하는 모습에 초아가 몸을 움츠렸다.

    ‘어쩜, 근자에 변하신 세자빈 마노라와 다를 바 하나 없네.’

    불안해하며 답신을 기다리던 초아를 향해 설변도가 말하였다.

    “너는 가서 모든 일은 이 아비가 다 해결해 드린다고, 마노라께서는 안심하고 계시라 하여라.”

    “그리만 전하오리까?”

    “이제부터 어떤 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조용히 세자빈궁에만 계시라 이르거라. 근자에 들어 중궁전이 마노라를 멀리한다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하필 그 시각에 그냥 세자빈궁에 간 것은 아닐 터, 분명 중궁전에서도 뭔가를 눈치챘다는 소리지.”

    자칫 일이 커질 수도 있음이다.

    애초에 제게 도움을 청했더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면 그만인 것을, 본인이 머리를 쓴다고 쓴 것이, 어째 일을 키운 꼴이 되었다.

    ‘중전의 가문은 나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을… 흠.’

    될 수 있는 한 중전과 부딪치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 중전이 이 일에 얼마나 관여를 할지는 몰라도 속전속결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의심을 거두지. 모든 것이 그 천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말이지! 일단 내의원부터 포섭하고, 증좌가 될 만한 것들부터 없애야겠군. 동백궁은 음….’

    눈을 부라리는 그 표정만으로도 살기가 형형했다.

    초아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예를 취하고 일어섰다.

    갑자기 고개를 홱 하고 들어 올린 설변도가 낮은 목소리로 당부하였다.

    “만약 중궁전에서 어떠한 것이라도 행동한다면 그대로 따르시라 하거라. 석고대죄라도 올리라 하면 언짢으셔도 하시라 해. 내가 나설 테니 금세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도 하고.”

    “예, 대감마님.”

    ***

    한편 동백궁으로 돌아온 두화는 입구에 서서 들어가려다가 몸을 돌이켰다.

    뒤따르던 익위사들이 갑작스레 돌아본 두화 때문에 모두 멈칫하였다.

    “음, 거기 두 사람도 이리로 잠시만 오게. 그리고 그대들도 내 이야길 들어주고.”

    “…?”

    맹지는 두화가 왜 그러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대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지만, 근자에 세자빈이 내게 행한 것들은 자칫 나와 용종을 모두 해할 수도 있었던 일이란 걸 잘 알 것이네. 해서 오늘부터는 두 명씩 번갈아 내 침소 주위도 지켜주었으면 좋겠네.”

    사실 세자빈의 계략에 몇 번이나 위험할 뻔하였다. 이젠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다간 용종을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여 중전마마께 청하였다.

    물론 중전께옵서 세자빈의 발을 묶어두기로 하였고, 저 또한 궁에 있으니 별일 없겠지만 그런데도 불안했다.

    두화는 무예를 하고 활과 칼을 다루는데, 궁 안에 그러한 여인이 없으리란 보장은 하지 못한다. 만에 하나 그런 여인을 포섭하여, 익위사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제 침소에 궁인으로 위장한 자객이 발을 들인다면, 자칫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홑몸이 아니니 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익위사 중 그들을 이끄는 자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소인들도 그리하고 싶으나, 궁에는 엄연한 법도가 있는지라….”

    “알고 있네. 해서 내 중전마마의 수락을 받았네.”

    윗전의 허락을 받았다는 말에 익위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여댔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실의 여인이 기거하는 궁이나 침소엔 아무리 호위를 하는 자라 하여도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혹여 일어날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싶어, 애초에 궁 법도가 그러하였다.

    하여 익위사들도 근자에 벌어지는 세자빈의 만행에 대해 어찌 대처해야 할지, 참으로 곤란하여 방책을 논의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데 승휘 마마가 본인과 용종을 살릴 방도를 구하였다.

    이내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다행이옵니다. 소인들 역시 마마를 무척 걱정하여 어찌해야 마마를 무사히 지켜드릴지 논하였었나이다. 하나, 방도가 없던지라….”

    “고맙네. 왕실의 후손이 귀한지라 중전마마께서 특별히 수락하신 일이네. 하니, 앞으로 잘 부탁하네.”

    “걱정 마시옵소서. 당장 지금부터 조를 나뉘어 마마를 지키겠나이다!”

    우렁찬 목소리가 동백궁 주위에 울렸다.

    믿음직한 그들의 모습에 두화는 불안한 마음을 조금은 떨칠 수 있었다. 그들을 보며 궁 밖 부친과 움막 사람들이 문득 생각났다.

    ‘아버지라도 계시면 연락드려 어찌해야 할지 논의할 텐데… 무탈하신지 걱정이네.’

    세자빈의 흉악한 그깟 계략 따위 하찮게 보았지만, 날로 교묘해지는 술수에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 저하도 백성을 위해, 우리를 위해 죽을지도 모를 사지에서 싸우시는데… 나도 할 수 있어. 우리 아기, 이 어미가 지켜줄 터이니, 안심하거라.’

    세자가 돌아오면 우리 두 사람의 결실을 마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두화는 배를 쓸어 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잔뜩 끼어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밤이다.

    ‘오늘도 무사하신 거죠, 저하. 저도 지켜냈으니, 저하도 무사하셔야 해요.’

    ***

    그 밤, 중궁전에 든 왕에게 술잔을 기울이며 중전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전하, 신첩 긴히 드릴 말이 있나이다.”

    “허허, 오늘따라 좀 이상하오.”

    젊은 중전의 아름다움과 밝은 모습이 좋아 중궁전을 찾는다. 한데 다른 때와 달리 어딘지 어두운 중전의 모습이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긴 하였다.

    고개를 조아린 중전의 입에서 진득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신첩이 오늘 전하의 윤허도 없이 세 가지 일을 행했나이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무게를 잡는 것이오? 중전답지 않소이다.”

    살포시 고개를 든 중전의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다.

    그제야 왕 또한 그러한 중전의 모습에 술잔을 내려놓고 귀를 열었다.

    “무엇이기에 중전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인지, 말해 보시오.”

    “동백궁을 세자의 익위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은 전하께옵서도 아시지요?”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동백궁 침소 주위를 익위사가 지키게 해달라는 승휘의 청을 수락하였나이다.”

    왕의 미간이 슬쩍 좁아진다.

    동백궁 주변이 아닌 침소까지 호위해 달라고, 후궁 본인이 청하였다?

    무슨 연유로?

    “어찌하여 승휘가 그런 청을 하였소?”

    “그것은 제가 행한 오늘 세 가지 일과 연관이 있사옵니다.”

    “음. 하면 나머지도 말해 보시오.”

    “두 번째는 신첩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세자빈궁의 모든 출입을 막았나이다.”

    승휘의 일보다도 더 놀란 얼굴이다.

    “중전. 대관절 무슨 일이요?”

    “전하, 마지막으로 신첩이 행한 것은….”

    어딘지 노한 듯 또는 불안한 듯 보이는 중전이 숨을 조심스레 내쉬었다.

    “말하기 곤란한 것이오?”

    “그것이 아직 정확하게 나온 증좌가 없어서… 하오나 그런데도 전하께 고하는 것은 왕실을 위해서이옵니다.”

    “…대관절 무슨 일이기에 왕실을 위해서라니! 어허, 정녕 오늘 이상하구려.”

    그러지 않아도 전쟁이 발발한 때부터, 궁내 자잘한 것에 대한 보고는 잠시 보류하였다. 전쟁에 나간 세자 걱정과 아군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전쟁에 대한 근심 때문에, 수환성에서 오는 파발만 기다렸다.

    한데 평소와 다른 진득하니 무거운 중전의 모습에, 내명부에 가볍지 않은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였다.

    “내명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오?”

    “좋은 소식과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소식이 있사옵니다.”

    “…!”

    “승휘가 회임을 했나이다.”

    “뭐요? 회임을! 이는 경사가 아닌가!”

    한동안 신경을 거두었더니, 전쟁 속에서도 좋은 소식에 근심 서렸던 왕의 용안이 금세 환해졌다.

    “알고 계시지 않으셨나이까? 궁 안 소식은 모두 전하께 먼저 닿는 것쯤은 신첩도 아는지라… 근자에 전쟁 때문에 취침도 얼마 못하신다고 알고 있어서, 며칠 사이지만, 중궁전을 찾을 때만을 기다렸다 말씀 올리려 했나이다.”

    “잠시 궁 안 내부 사정은 모두 물리라 했소. 전쟁과 세자에 관한 것만으로도 밤새우며, 방도를 생각하느라 시간이 부족한지라… 어허, 그래도 그렇지. 과인에게 그런 중대한 일은 고해야지.”

    환히 웃는 왕의 얼굴에 중전은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흠, 그렇다고 또 내, 중전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압니다.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아는데 신첩의 생각이 짧았나이다. 단 며칠 사이라도 먼저 고하는 것이 맞는 것 이온대….”

    “되었소. 그래, 승휘의 몸은 괜찮소이까?”

    기뻐하는 왕에게 중전은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그것이… 왕실의 후손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나이다.”

    중전이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왕이 노기를 드러내며 벌떡 일어섰다.

    “누가 감히 왕실의 후손을 해하려 했소?”

    다급하게 일어난 중전이 당장이라도 나가려는 왕을 만류하였다.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고 흉측하나 신첩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감히 전하의 왕명 없이 신첩이 어의에게 증좌를 찾으라 맡겼나이다.”

    “증좌? 무슨 증좌를 말하는 것이오, 중전?”

    “세자빈이 회임을 한 승휘를 독살하려 하였나이다.”

    중전의 말에 왕의 이마엔 분노가 서린 핏대가 솟았다.

    “뭐라! 독살?”

    하여 중전은 낮의 일을 모두 고하였다.

    다 들은 왕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왕실의 후손이라고는 세자와 병약한 능윤군뿐이다. 20여 년 만에 왕실에 귀한 후손이 내려졌거늘, 감히!

    “전하, 그간 몇 번이고 세자빈의 흉악한 간계가 있었으나 승휘의 청으로 눈감아 주었나이다.”

    중전은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왕에게 고하였다.

    포악한 짓거리는 물론이고, 실수든 고의든 각궁으로 쏘려고 한 일까지 죄 말하였다. 그리고 각궁 사건에 대해서는 진즉 말하지 못한 연유도 고하였다. 증인이 있다 하여도, 승휘의 사람이니 자칫 세자빈을 음해하려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기에 두고 보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를 들은 왕은 답답한 듯 한탄했다.

    “승휘는 어찌하여 이토록 큰일을 덮으려고만 하였지?”

    “전쟁터에 출병한 세자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 싸우는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궁 안의 불미스러운 일이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라였다고 하옵니다. 하여 신첩 또한 그 말이 옳기에 눈감아 주었건만, 오늘 일은 세자빈이 도를… 넘었나이다.”

    “허허.”

    “전하, 감히 왕실의 후손인 용종을 해하려 하다니요? 하여 신첩이 의심 가는 것들을 어의에게 보내 조사케 하였나이다.”

    “음….”

    노기와 함께 근심에 잠겨 신음한 왕의 묵직한 탄식이 흘렀다.

    중전은 그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모든 것이 신첩의 부덕함 때문이옵니다. 내명부의 주인으로서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나이다.”

    죄를 청하는 중전의 작은 어깨를 잡았다.

    “그것이 어찌 중전의 잘못이요? 왕실의 고귀함과 품위를 한낱 욕망과 바꿔버린 간악한 것들의 죄이거늘.”

    왕은 중전을 품에 안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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