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4)화 (64/96)
  • 64. 반드시 밝히거라!

    설마, 아니겠지.

    차에 독을 탔다면 좀 전 마셨을 때 이상이 있었어야 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그걸 모르겠다.

    ‘어쨌든 절대 차를 마시면 안 돼. 이상해.’

    불길한 느낌에 두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세자빈이 피식 조소를 짓더니 자신의 찻잔을 가져와 입에 들이댔다.

    “마시거라.”

    “싫습니다.”

    억지로 마시게 하려는 것을 보아하니, 차에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

    “마시래도!”

    기어이 윽박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절대 마시지 않을 거야.’

    밀치고 나가야 할 것인지, 청옥 피리를 불어야 할지 선택을 하려던 그때!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두화도 세자빈도 고개를 돌렸다.

    근엄한 모습으로 성큼 들어온 중전이 세자빈의 앞에 섰다.

    “아, 어마마마, 언제 납시셨나이까?”

    당황한 세자빈이 벌떡 일어나 그 앞에 예를 갖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무슨 일이기에 체통 없이 큰 소리가 밖까지 들립니까?”

    질책하는 중전의 위엄있는 소리에 세자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하였다.

    “승휘에게 차 한 잔 주려 했을 뿐인데, 승휘는… 흐흑… 독이 들었다며 마시지 않아서 제가 억울하여 대신 마셨사옵니다.”

    금세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왜곡하여 말하는 세자빈 때문에 두화는 할 말을 잃었다.

    세자빈의 말에 중전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였다. 흘린 찻물과 빈 찻잔을 물끄러미 보던 중전은 무슨 생각인지 상석으로 가 앉았다.

    “예까지 오느라 갈증이 나니, 이 사람도 한 잔 주세요, 세자빈.”

    “새로운 찻상을 올리라 하겠나이다, 잠시 기다려 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세자빈이 마시던 것을 먹지요.”

    “예?”

    세자빈의 당황한 듯한 말투에 중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설마, 진정 네가 정말 독을 탄 차로 승휘를 독살하려 한 것이냐, 세자빈?’

    의심의 눈초리는 두화 앞에 있는 찻상과 그리고 지금 바로 제 앞에 있는 찻상을 힐끗 곁눈질하여 비교하였다.

    반쯤 남은 찻잔 하나와 비어있는 찻잔이라….

    “이 찻상엔 찻잔이 없군. 승휘는 게 있는 찻잔 하나를 이리 가져오라.”

    두화가 조금 전 세자빈이 마셨던 찻잔을 들고 가자, 련하의 눈빛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중전의 손에 들린 찻잔에 찻물이 채워졌다. 중전이 그것을 마시려는 순간, 련하는 다급하게 가 감히 찻잔을 빼앗아 홀랑 마셔버렸다. 그리고 찻잔을 벽에 던져 버렸다.

    찻잔이 깨지는 파열음이 방 안을 울렸다.

    “이 무슨 짓이냐, 세자빈?”

    놀라고 당황한 중전이 호통을 치며, 세자빈의 이상한 행동에 경악하였다.

    “제, 제가 마시던 것이라 더러울까 봐… 다시 올리겠나이다.”

    다급하게 움직였던 행동과 떨리는 목소리에 중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되었다. 차 한잔 얻어 마시는 것이 이리 어려울까 싶구나, 세자빈.”

    “소,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연 상궁은 찻물과 저기 깨진 찻잔을 모두 챙겨오거라. 그리고 승휘는 날 따르거라.”

    홱 하니 일어나 성큼 걸어 나가는 중전의 모습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한데 찻물과 깨진 찻잔을 챙기라니! 뭔가 눈치라도 챈 것이야?’

    련하는 불안한 마음에 중전의 명에 따라 챙기던 연 상궁에게 다가갔다.

    “연 상궁, 여긴 신경 쓰지 말게. 초아가 치울 걸세.”

    “아니옵니다. 중전마마의 명이 있으셨으니, 소인은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찻물과 찻잔을 챙겨 나가는 연 상궁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까득까득 깨물려 뜯기는 손톱에서 입을 뗀 련하의 눈엔 독기가 가득했다.

    “승휘, 고것은 어째서 마시지 않은 거야? 그냥 처음부터 그년 찻잔에 독을 발라 놨어야 했어. 의심을 하면 내 것을 마시겠거니 했더니… 하아. 근자엔 이쪽으로 발걸음도 하지 않던 중전이 어찌 오늘 같은 날 와서 판을 깬단 말인가, 도대체 왜 날 방해하는 것이냔 말이다, 왜!”

    얼마나 분을 올렸는지 눈가가 벌게졌다.

    오늘은 기필코 독살하려 준비까지 철저하게 했다.

    마시면 당장은 독에 당한 줄 모르나, 1각이 지나면 증상이 나타나는 그런 독이다.

    무색무취의 독을 제 찻잔에 바르고, 차를 권하면서 독이 없음을 제가 먼저 보여주면, 안심하고 제가 마신 찻잔을 건네주려 했다. 웃전이 권하니 마시지 않을 수 없을 테니 강압적으로라도 제 것을 먹이려 했다.

    만약 제가 지목되어도 빠져나가기 위해, 해독약까지 미리 먹어 두어 독이 발린 찻잔에 차를 먼저 마셨다.

    한데, 중전이라는 복병이 나타날 줄이야!

    “정말이지 목숨줄은 끈질긴 년이로구나.”

    더구나 깨진 찻잔을 모조리 가져갔다.

    중전은 독살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았건만, 저를 의심하고 있다. 이 사태를 빨리 수습해야 한다. 아랫입술을 짓 깨문 련하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다급하게 서찰을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당장 사가에 계신 아버님께 전해드리거라.”

    “…예. 하온데 마노라.”

    “왜!”

    짜증이 섞인 련하의 대답에 초아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는 냉큼 밖으로 나갔다.

    세자빈궁을 벗어나던 초아는 서찰과 세자빈궁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가 모시는 웃전이지만 너무도 무섭게 변하였다. 그것이 안타깝고 또 자꾸만 벌리는 일이 되돌리기엔 너무도 커져 버린 탓에 두렵기만 하다.

    하나, 어쩌랴.

    웃전의 명에 따라 살고 죽는 것이 아랫것이거늘.

    불안하기만 한 시선을 돌린 초아는 이내 소매 속에 서찰을 넣고 재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

    중궁전에 든 두화가 비틀대자, 중전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은 것이냐? 어디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곳은 없고?”

    걱정하는 말과 함께 저를 세세히 살펴보는 중전 때문에, 긴장이 풀렸나 보다. 두화는 감히 그 품에 기대고 말았다.

    중전은 짐짓 당황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제 등을 천천히 토닥이는 그 손길과 품이 주는 따스함에, 두화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밤새 그리 울었건만 아직도 나올 눈물이 남았나 보다.

    힐끗 지켜보던 맹지 역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 저하, 제발 무사히 빨리 돌아오시어 우리 마마 좀 지켜주시옵소서.’

    하루가 다르게 간악한 술수를 쓰는 세자빈의 횡포에 지켜보는 맹지 자신도 불안한데, 배 속 용종까지 지키려는 마마는 얼마나 두려울지, 흐르는 눈물을 쓱 훔쳤다.

    “…중전마마, 송구하옵니다.”

    눈물을 닦으며 몸을 떨어뜨렸다.

    “송구할 게 뭐 있누. 그래, 마음은 좀 가라앉혔느냐?”

    “예.”

    “혹 차를 마셨더냐?”

    “아예 먹지 않으면 안 되기에, 찻잔에 입술만 대는 흉내만 내고 금방 내려놓았나이다.”

    마시지 않았다는 소리에 중전은 다소 안도하였다.

    “그래? 그럼… 아까 내게 가져왔던 빈 찻잔은 승휘가 마시려던 찻잔이었느냐?”

    “아니옵니다. 제가 마시는 척만 하자 세자빈 마노라께서 본인의 찻잔을 가져와 독이라도 들었을까 걱정이냐며, 제 앞에서 마시고는 내려놓으셨던 것이옵니다.”

    두화의 말에 중전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중전의 모습에 두화는 의아스러웠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세자빈 고것이 점점 더 간악해지는구나. 전엔 그래도 다른 이들로부터 추앙받으며 세자빈으로서 품격은 지녔었건만, 어찌 저리 변했을꼬.”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은 중전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독은 있었을 것이다. 혹 모르니 예서 한 시진은 족히 머물도록 하여라. 내, 이미 어의를 불렀으니 진맥도 받고.”

    “예?”

    정말 저를 독살하려고 그랬을까 싶지만, 확신에 찬 중전의 말에 손끝이 떨린다.

    ‘아까 찻잔에 입을 대긴 하였는데… 하아.’

    정말 차에 독이 있었다면, 적은 양이라도 독을 섭취했을까 봐, 불안함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중전마마,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감히 여쭙니다.”

    “내 승휘에게 찻잔을 가져오라 시켰을 때, 세자빈의 눈이 요동치더구나. 불안했던 게지. 독살시키려던 목표가 승휘일 텐데, 엉뚱한 내가 독살당하게 생겼으니 불안했던 거야.”

    “…!”

    “내가 세자빈궁에서 죽지 않아도, 세자빈궁에 다녀온 뒤 중독되어 죽게 되면, 내 가문이 끝까지 파고들 터이니 일은 천파만파로 커질 것이야. 그러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어.”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두화는 조심스레 여쭈었다.

    “중전마마께서 드시려 했던 찻잔은 세자빈 마노라의 찻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게 좀 이상하긴 한데… 독을 차에 탄 것이 아니라면….”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던 중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내가 그 찻잔을 들어 마시려고 할 때, 세자빈이 빼앗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깨어버렸지. 독은… 그래, 찻물이 아닌 찻잔에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놀라 두 눈이 커다랗게 변한 두화를 보며, 중전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맹지의 말을 듣고, 세자빈이 간악한 짓을 또 저지른다면 이번엔 가만두고만 보지 않으려 했다. 한데 독살을 준비했다니. 화살사건만 하더라도 당장 응징해야 하는 것을 잠시 접어두었더니, 괘씸한 것 같으니! 하나, 걱정하지 말아라. 내, 반드시 세자빈의 간악한 짓을 밝힐 터이니.”

    화살 사건 같은 경우도, 아무리 동백궁 수규인 맹지가 증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두화의 사람이다. 오히려 세자빈을 음해하여 중상모략한다고 여론이 뒤집힌다면 역으로 두화가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생각이 많아진 중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마침 밖에 어의가 도착하여 고하였다.

    궁인이 발을 내리고 문을 열자 어의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승휘를 진맥하시게, 어의.”

    “예, 중전마마.”

    두화를 진맥한 어의는 바로 고하였다.

    “맥이 다소 불안정하긴 하오나 승휘 마마께서도 배 속 아기씨도 모두 건강하시옵니다.”

    그제야 중전은 안심이라는 듯 숨을 토해내었다.

    “정말인가?”

    재차 확인하려 물었다.

    “예. 중전마마.”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중전마마께옵서도 맥을 살펴드리오리까?”

    “나는 되었다. 참, 연 상궁에게 보낸 찻물과 찻잔을 보았는가?”

    “그것이… 찻물과 찻잔 안에서는 모두 독이 나오지 않았나이다.”

    어의의 말에 중전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불안해하며 찻잔을 던진 세자빈의 행동만 봐도, 분명 차든 찻잔이든 뭔가가 있다고 확신했거늘.

    “분명 뭔가가 있을 터인데.”

    중전의 혼잣말에 어의는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일반적인 독 반응은 나오지 않았나이다.”

    머리에 손을 얹은 중전이 장침에 몸을 기대었다.

    두화는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독이 아니라면 애먼 사람을 잡은 격이다. 이리되면 저쪽에서 중궁전을 음해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아준 꼴이다. 두화는 저 때문에 많은 신경을 써준 중전에게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내렸다.

    “하오나 독의 종류에는 아직 소인조차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하옵니다. 더욱이 무색무취의 독은 일반적인 독 반응으로도 검출해 내기 힘듭니다.”

    무색무취의 독!

    어의의 말에 중전이 몸을 바로 했다.

    “무색무취의 독이란 것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색도 향도 전혀 없어 구별해내기 힘든 독이옵니다.”

    “그 독을 밝힐 수는 없는 것인가?”

    고개를 조아리고 고하던 어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중궁전에 오기 전에도 몹시 불안하였다.

    연 상궁이 가져온 찻물 담긴 찻주전자와 깨진 찻잔을 보면서 설마설마하였다. 왕이 계신 지엄한 궁에서 독살이라니! 이는 궁에 피바람을 부르고 궁을 발칵 뒤집힐 사건이다.

    한데 중궁전에서 승휘의 진맥을 하라 명하시고, 독에 대해 하문하는 것을 보아하니 누군가 승휘, 아니 왕실의 후손을 없애려 하는 것이다.

    손끝이 떨려 든다. 손바닥이 축축해질 정도로 긴장이 되어 속곳이 축축해졌다. 만에 하나 입을 잘못 놀린다면 제 목숨뿐 아니라 가문까지도 몰락당할 것이다.

    ‘생각해야 한다.’

    중전을 빤히 바라봤다. 지금의 중전은 오래전 실성하여 승하한 중전과는 다른 분이다. 냉정하고 까다로우시긴 하나 왕의 총애가 계속되고, 그 가문 역시 무시하지 못할 세력가다. 이내 생각을 마친 어의가 고하였다.

    “힘들긴 하오나 고서를 찾아서라도 소신이 반드시 밝히겠나이다.”

    “좋아, 그럼 내 어의에게 맡기지. 반드시 밝히게. 그 공은 나중에 치하하도록 하겠네.”

    “감읍하옵니다, 중전마마.”

    어의가 물러가고 침소엔 조용한 적막만 흘렀다.

    “연 상궁은 듣거라.”

    “예, 중전마마.”

    “세자빈궁의 모든 출입을 막거라. 좌의정이든 그 누가 되었든 감히 내 허락 없이는 세자빈을 만날 수 없느니!”

    “예, 명을 받잡나이다.”

    연 상궁이 물러가자 중전은 지엄한 목소리로 두화에게 당부하였다.

    “이 일은 결코 좌시할 수 없다. 독이 나온 증좌만 확실해진다면 전하께 간악한 것의 죄상을 모두 밝힐 것이니라. 하니, 그때까진 답답하여도 동백궁에서 되도록 나오지 말거라.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라, 알겠느냐 승휘.”

    “예, 중전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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