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3)화 (63/96)
  • 63. 세자빈의 흉계-4

    아랫것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음식에 중전의 손가락부터 닿았다.

    벌써 몇 개를 집어 먹었는지 입 주위가 번들댔다. 기름진 손가락을 야무지게 쪽 빨아 먹고 나서야 뒤늦게 궁인이 대령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리 굼떠서야. 다음부터는 승휘가 중궁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젓가락부터 잽싸게 준비하거라.”

    서슬 퍼렇게 명을 내리지만, 두화는 그것이 중전마마의 농이라는 것을 이젠 안다.

    “입에 맞으세요?”

    “입에 맞다마다. 이제 승휘가 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기가 힘이 드는구나.”

    “하오면 매일 한 가지씩 가져오겠나이다.”

    “아이고, 되었다. 내, 아무리 승휘의 음식을 좋아해도 회임한 사람을 마냥 부려만 먹는 못된 시어머니는 아니니라.”

    입꼬리를 늘리며 기름진 입 안을 차로 달랜다.

    그런 중전마마를 보며 두화도 불안했던 마음이 다소 평온해졌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전이 두화를 빤히 바라봤다.

    “오늘은 어찌 지냈는고?”

    “…그냥, 별일 없었나이다.”

    몸을 바로 세운 중전의 얼굴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사람을 압도하는 눈빛을 비단 세자만이 지닌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 저런 눈빛으로 보는지 싶어 두화는 의아해했다. 무언의 압박을 받으니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승휘, 정말 별일 없었더냐?”

    “무얼 하문하시고자 하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설마 세자빈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벌써 아시는 건가?’

    자칫 입을 잘못 놀리게 되면 궁이 발칵 뒤집힐 수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낮의 일을 고하고 싶은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전쟁으로 불안하고, 또 그가 그곳에 있으니 이곳에서라도 분란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뿐이다.

    “세자빈이 네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느냐?”

    그 한마디로 중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긴 두화는 머리를 조아렸다.

    “중전마마.”

    눈가가 촉촉해진 두화를 본 중전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널 나무라는 것이 아니니라.”

    “아옵니다. 하여 더욱 입 밖에 꺼내기가 조심스러울 뿐이옵니다.”

    “어찌하여 세자빈을 옹호해 주는 것이냐?”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이곳에서라도 분란이 없어야 한다. 하여 제 생각을 고하였다.

    “지금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사력을 다하는 저하와 병사들을 먼저 생각하였나이다.”

    “…!”

    “전시 중에 궁 안이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일로 내분이 생긴다면, 사지에서 힘겹게 싸우는 저하께도 좋지 않고, 만약 적들이 안다면 이를 역이용하여 궁 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나이다.”

    사늘하였던 표정의 중전은 어느새 두화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 너의 속 깊은 뜻은 알겠으나, 이는 결코 가벼이 넘겨서 무마될 일이 아니니라. 아무리 세자빈이 실수였든, 조악한 계략을 펼쳤든 결과적으로 너와 용종을 해할 뻔하였느니.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니라.”

    “…중전마마.”

    “승휘, 지금 전투 중인 세자를 생각하여 불미스러운 일을 덮으려고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배 속 용종이니라. 왕실의 후손을 잃는 것은 해를 가한 자도 용종을 잃은 자도 그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느니라.”

    “…”

    “용종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장 승휘, 너 자신부터 지켜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질책과도 같은 중전의 뼈를 때리는 말에 두화는 제 배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중전의 말이 옳다.

    저 혼자 참는다고 쉬이 덮어질 일이 아니다. 벌써 중궁전까지 알지 않는가.

    ‘정말 궁 안엔 비밀이 없구나.’

    이젠 좀 무섭기까지 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하자면, 세자빈이 저를 위험하게 만들수록 지금처럼 누군가의 귀에 들릴 것이다. 결국 세자빈의 악행은 결코 감출 수가 없을 것이다.

    “예, 명심하겠나이다.”

    ***

    홀로 있는 침소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는 밤이다.

    가만히 배를 매만지던 두화는 괜히 눈물이 났다. 씩씩하게 잘 참아왔는데 왜인지 눈물이 주책없이 흘러내린다.

    아이를 품는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고 따스한 일만이 아닌 이곳이 점차 두려워진다.

    건장한 사내의 품에서 돈주머니를 아무렇지 않게 슬쩍하던 제가, 무뢰배들과 맞서 싸우던 제가 이제야 두려운 것이 생겼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찌해야 하나?’

    자칫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질까, 하여 배 속 아이를 잃을까 봐 불안감이 온몸을 감싼다. 섬뜩한 기분은 더 큰 두려움으로 제 마음을 캄캄한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렇게 어수선하고 두려운 마음에, 밤새 세자를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나, 그를 떠올릴수록 그리움은 커지고, 괜히 침소 문만 더 바라보게 된다. 저 어둠을 가르고 활짝 열린 문으로 그가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만 같은데, 쉬이 열리던 문이건만 한참을 바라봐도 단단히 잠긴 문처럼 열리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부터 아침을 물리고 밤새 그리웠던 그를 대신해 그의 손때가 묻은 검을 천으로 닦았다. 광이 번쩍거리는데도 닦고 또 닦았다.

    그때 밖이 어수선했다.

    맹지가 부아가 치민다는 듯 퉁퉁 부은 얼굴로 들어왔다.

    “어찌 밖이 소란스러워? 얼굴은 또 왜 그리 못난이처럼 부었을까?”

    “아이고, 무슨 염치로… 아니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마마를 찾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대며 문 쪽을 흘겨보는 맹지의 모양새만 봐도, 누가 온 것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초아가 왔어?”

    “예. 말로는 전날 마마를 놀라게 해드려서 미안하다고 차나 나누자고 하는데… 소인은 암만 생각해도 의심스럽사옵니다. 그냥 가지 마시옵소서.”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은 두화의 손가락이 작은 책상 위를 규칙적으로 두들겼다. 두들기던 손가락이 멈추자 두화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다.

    맹지가 어리둥절해서 가까이 다가오자 귓속말을 하고는 웃으며 떨어졌다.

    “... 가서 내가 세자빈궁에 불려갔다고만 해. 분명 가만 계시지는 않으실 거야.”

    저를 걱정하며 한껏 휘어진 맹지의 눈썹을 조심스레 문질러 준 두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 안에 또 마마께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소인은 그게 걱정이옵니다.”

    “괜찮아, 오늘은 익위사들도 데리고… 아, 처소 안엔 들어가지 못하는구나. 만일을 위해서 늘 가지고 다니는 이거 있잖아. 위험하면 이거 불게.”

    가슴 안쪽에 매단 장신구처럼 자리한 작은 청옥 피리를 살짝 꺼내 보여주었다.

    “그거 아시옵니까?”

    퉁퉁 부은 사람처럼 볼에 바람을 넣은 맹지가 입술을 삐죽대며 작게 말한다.

    “뭘?”

    “이런 말씀 올린다고 소인에게 경을 치셔도 할 수 없사옵니다.”

    “뭔데?”

    “마마는 고집은 정말… 소고집이시옵니다. 위험한 것이 빤히 보이는데 왜 자꾸 가려고 하시옵니까?”

    감히 웃전을 농락하고도 뭐가 그리 불만인지 맹지의 입술이 한자는 나온 듯싶다.

    “맞아, 나 소고집이야. 근데 안 가면 저쪽에서 가만 있을까? 아마 아닐걸?”

    “그래도요.”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맞서서 날 지켜야지. 있잖아, 난 은혜를 입으면 당연히 갚아야 하고, 그만큼 뒤끝도 있어서 내게 위해를 가하면 복수는 두 배로 갚아야 두 다리 뻗고 자.”

    “하면 당하신 만큼 복수하실 것이옵니까?”

    두 눈이 동그래져 묻는다.

    그런 맹지의 콧등을 톡 친 두화의 목소리가 근엄하게 흘러나왔다.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지. 한데 지금은 그리하면 안 돼. 생사가 넘나드는 전쟁터에 저하가 계시는데, 여기서 시끄럽게 굴면 안 되잖아.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발 마노라께서 마음을 달리 잡수시면 좋으련만….”

    맹지는 두화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조건 선하시기만 하여 참고 당하기만 하는 마마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여겼다.

    “하니, 넌 어서 가서 알려. 될 수 있으면 빨리 오면 더 좋고.”

    “예, 알겠사옵니다.”

    ***

    두화는 세자빈궁에 들며 뒤를 바라봤다.

    복면을 벗은 랑과 성무가 든든하게 세자빈궁 입구에 서서 제게 고개를 숙였다. 두화도 걱정하지 말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초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침소에 드니 세자빈이 벌떡 일어나 다가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왔는가?”

    당황한 두화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예.”

    ‘왜 이래? 밤새 뭘 잘못 먹었나?’

    “어젠 많이 놀랐을 터인데 괜찮은가?”

    잡은 손을 매만지며 묻는 세자빈의 얼굴은 어딘지 핼쑥해 보였다. 저처럼 잠을 못 잔 사람 같이 보였다.

    ‘전날 내게 그렇게 해 놓고 걱정이라도 되었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두화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세자빈을 경계하며 바라봤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예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터인데, 이리와 앉게.”

    굳이 부축하여 끌어다 방석 위로 앉힌다.

    갑자기 제게 자상하게 구는 연유를 모르겠다.

    련하도 상석에 앉더니, 책상 위로 뭔가를 올려놓았다.

    전날 저를 겨냥하였던 각궁과 화살을 매만지며 웃는다.

    순간 두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젠 제대로 즐기지 못한 듯싶어서. 자네가 활을 쏠 줄 알았다면 진즉 그런 자릴 만들어 볼 것을 그랬어.”

    “…!”

    세자빈의 말은 꼭, 진즉 활 가지고 저를 위협해 볼 걸로 들렸다.

    두화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가슴 아래 청옥 피리를 꼭 쥐었다.

    ‘설마 또!’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세자빈이 활을 제게 겨눈다면 당할지도 모른다. 거리가 짧아 반격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내 아끼는 각궁인데 자네에게 줌세.”

    받아 가라고 턱으로 가리킨다.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두화는 어리둥절하지만, 살포시 일어나 각궁과 화살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세자빈의 미소가 자꾸만 껄끄럽게 느껴졌다.

    ‘신경 거슬리게 왜 자꾸 저리 웃는 거야?’

    “초아야, 차 좀 내오너라.”

    잠시 후 찻상이 놓이자, 두화는 차를 가만히 바라봤다.

    먼젓번과 달리 색이 맑다. 은은한 국화 향이 따뜻한 기운을 품고 올라온다.

    “팥물은 싫다 하여 오늘은 국화차를 준비하였네. 마셔 보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며 권하는 모습이 더 수상쩍다.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라서 더 의심스럽다.

    “감사하나 목이 마르지 않사옵니다.”

    차를 마시던 련하의 미간이 찰나 좁혀지다 펴졌다.

    “차는 갈증이 난다고 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네. 겸양과 품격을 익히기 좋은 것이지. 하니, 회임한 자네에게 더욱 필요한 걸세. 내 성의를 무시할 셈인가?”

    결국 언짢아하는 세자빈의 말투에, 두화도 끝까지 안 마시겠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다. 살짝 입에만 대는 척하고 내려놓으니, 유심히 살피던 세자빈이 장침을 내려쳤다.

    “승휘! 지금 이 사람을 대놓고 능멸하려 하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나를 능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차를 마시는 척만 하는 것이야? 왜?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히죽 올라간 입술과 번뜩이는 눈빛까지 광기에 잡힌 그 모습에 두화는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차에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싶은 의구심은 더욱 짙어졌다.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리 생각했던 모양이야. 좋다. 그럼 내 직접 보여주지.”

    벌떡 일어난 세자빈이 제 자리까지 빠르게 오더니, 찻잔을 들어 올려 벌컥벌컥 마셨다. 찻물을 삼킬 때마다 희번덕거리는 눈빛 하며, 벌컥거리며 마시는 탓에 입가로 흐르는 찻물이 단정한 세자빈의 모습을 괴기스럽게 만들었다.

    탁!

    내려치다시피 찻잔을 내려놓는다.

    손에서 찻잔을 놓지 않은 세자빈이 고개를 들어 두화를 빤히 응시했다.

    “봤느냐? 독이 있다면 내가 지금 쓰러져야 하지 않겠어?”

    “…!”

    당황스럽다 못해 괴이한 행동을 하는 세자빈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려 죽겠다.

    ‘실성한 사람 같잖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대체!’

    “자, 그럼 이젠 마실 테냐, 승휘?”

    “…마노라.”

    “아, 네 차가 불안하다면… 내 것을 마시거라. 그럼 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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