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2)화 (62/96)
  • 62. 두려워지는 마음

    어찌나 놀랐는지 두화는 마구 떨리고 눈앞이 순간 새까맣게 보였다.

    서서히 고개를 돌려 세자빈을 바라봤다.

    세자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람처럼 활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침 초아가 차를 내오자 웃으며 이쪽을 바라본다.

    ‘사람 목숨을… 저것들이 정말!’

    아랫입술을 짓 깨문 두화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현기증이 일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봤다.

    세자빈궁에서도 보이는 나무 위쪽에서 두 명의 익위사가 고개를 숙였다. 저들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기에, 두화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부러 과녁 중앙에 박힌 화살 하나만 남기고, 모두 빼서 세자빈에게로 돌아갔다.

    탁!

    화살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세자빈을 바로 바라봤다.

    련하 역시 두화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쳤다.

    ‘운 좋은 계집 같으니! 분명 똑바로 쐈건만, 어찌 빗나간 거지?’

    “할 말이라도 있는 겐가? 아, 설마 회임한 자네에게 그깟 화살을 주워 오라 시켜서 지금 윗사람을 그리 노려보는 게야?”

    죽이지 못했으니 트집이라도 잡아 매질이라도 해야지, 그래야 언짢은 기분이 풀릴 것 같다. 하지만, 련하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넋 나간 듯 어딘지 모르게 소름 끼치는 눈동자에, 슬그머니 탁자 위 화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소인도 한 번 쏴봐도 되겠는지요?”

    련하는 두화의 차분한 목소리에 내렸던 눈을 들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죽일 심산이었다는 것을 천치가 아닌 이상 느꼈을 터인데, 왜 묻지 않지? 아니, 이쯤 되면 겁에 질려 도망이라도 가야 맞는 것이 아닌가?

    ‘네년이 따지고 들어야 그건 그것대로 웃전에게 모욕을 안겨주었다고 매질을 할 참이었거늘… 이 계집은 좀처럼 모르겠어. 늘 내 생각에서 벗어난단 말이지.’

    “세자빈 마노라께서 하시는 것을 보아하니 참 재미있겠다 싶어서… 소인도 한번 그 재미를 느껴보고 싶어서요.”

    “재미? 하긴 자고로 사냥감을 향해 쏠 때야말로 손맛이 느낄 수 있는 법이지. 쏠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게. 실력을 키우고 싶다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라 생각하면 과녁을 쉬이 맞힐 수 있을 게야.”

    두화는 세자빈이 내민 각궁을 잡았다.

    손안에 든 각궁을 본 두화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사냥감을 향해 쏠 때라… 날 사냥감이라 생각하고 쏘았단 말이지!’

    활시위에 활을 거는데 조금 전 자신이 이 화살에 맞았다면….

    그리 상상하자, 손끝이 떨린다.

    떨림은 활에 닿고 이내 화살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련하의 입가에 조소가 어린다.

    “이런, 자네의 출신을 생각하면 각궁은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다는 걸 내 잠시 망각하였군. 이래서는 어디 과녁 중앙은커녕 쏴 볼 수나 있겠는가?”

    겨우 떠도는 소문과 세자가 만들어 낸 가짜 신분을 주워듣고 저를 어림짐작한다. 하긴 천한 노비보다도 못한 거지였다는 소문은 사실이지.

    하나, 제가 검과 활에 능하고 무예 또한 할 줄 안다는 것을 알 리 없으니, 이리 불러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것이겠지. 해서 이제 곧 보여 줄 것이다.

    그동안 당하면서도 잠자코 있었던 것은 금방이라도 궁을 나갈 것이라 여겼기에,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 참았던 것이고, 그다음엔 어찌 되었든 궁에 남기로 하여 저하의 후궁이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참았다.

    “…하여 한발은 남겨 두고 왔지요.”

    “그래? 뭐라도 배우려는 건 좋은 자세지. 좋다, 자! 처음은 이 사람이 도와주지.”

    두화는 이제 홑몸이 아니다. 배 속 용종을 생각하면, 장난 수준이 아닌 제 목숨을 위협하는 이런 짓에 당하고만 있어서는 아니 된다. 당한 만큼 돌려주진 못해도, 제게 이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경각심 정도는 새겨둘 필요가 있다.

    가르쳐 준답시고 활을 잡은 제 뒤에서 팔을 잡으며 조언하는 련하를 향해, 순간 돌아서며 활을 겨누었다. 누가 봐도 가르침을 받다가 실수인 척 화살을 겨눈 모양새였다.

    “이리 잡으면 되옵니까, 마노라?”

    정확히 세자빈의 명치를 향해 있는 화살촉은 겨우 1척(30.3cm) 거리였다.

    “지, 지금… 뭐 하는 게냐!”

    련하의 다급한 외침에 초아도 놀랐지만, 그렇다고 웃전 앞을 막아서며 대신 죽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때? 당해 보니 심장이 아주 쫄깃하지?’

    “가르쳐주신 것이 맞나 여쭤보려 한 것인데, 놀라셨사옵니까?”

    옅은 미소를 지은 두화가 유유히 몸을 돌려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쌩 날아간 화살은 과녁을 벗어났다.

    뒤쪽에서는 놀란 마음이 가시질 않았는지 초아가 여전 세자빈을 부축하며 종알댔다. 하지만 련하는 다리가 떨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분명 부러 그런 것이옵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될 일이옵니다, 마노라.”

    “조용히 하거라. 저리 과녁도 못 맞히는 것이 감히 날 쏠 생각을 하였겠느냐? 승휘 말처럼 그냥… 잡는 법이 맞나 확인하려던 걸 게다.”

    똑똑히 들리는 그들의 속삭임에, 두화는 혼잣말로 중얼대며 다시 활시위에 활을 걸었다.

    “하긴 각궁이 저하의 활보다는 너무 가벼워서 감을 못 잡았지. 하지만 지금은!”

    쐐액!

    이내 날아간 활이 과녁에 맞기도 전, 입술을 길게 늘인 두화가 뒤돌아 세자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련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마노라 말씀대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과녁에 그리니 잘 쏘아집니다. 각궁은 없지만, 제게도 저하께서 주시고 간 활이 있는지라, 다음번엔 동백궁에서 활 놀이를 제대로 한번 해 보심은 어떠실는지요?”

    “…!”

    활을 쏠 줄 알면서도 괘씸하게 모르는 척했던 거다.

    ‘저하께서 활을 내어주시고 갔다고?’

    괘씸하고 분해 두화를 노려볼 찰나 어느새 과녁을 꿰뚫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올려다보는 련하와 내려다보는 두화의 시선이 허공에 맞닥뜨리자, 두화가 실소를 지었다.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사냥터에서 진짜… 사냥감을 두고 활을 쏘아 보고 싶네요, 마노라.”

    마치 저를 사냥감으로 염두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순간 련하는 뒷덜미가 쭈뼛 솟았다.

    “…!”

    앞을 가로막고 섰던 두화가 예를 거두고 유유히 세자빈궁을 빠져나갔다.

    두화가 사라지자, 일어나 과녁을 바라보던 련하는 그만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과녁 중앙에 박혀 있던 화살이 반으로 쪼개고, 위풍당당 그 자리에 박혀 있는 화살에 련하는 심장이 벌렁댔다. 단순히 활을 잡을 줄만 아는 것이 아닌, 제가 쏜 화살을 반 토막으로 가른 명궁수다.

    이리되면 차라리 아까 빗나간 화살이 땅에 박힐 것이 아니라 두화의 등에 박혔어야 했다. 죽이려 했다는 것을 웃전에서 알기라도 한다면!

    ‘분명 저를 죽이려 한 거 몰랐잖아.’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련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아닌가! 조금 전 죽이고 싶은 사람을 그렸더니 잘 쏴졌다고 했잖아. 저를 죽이려는 걸 알고 날 죽이고 싶었던 게야. 아, 이젠 어찌해야 하나?’

    ***

    동백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맹지는 울면서 두화를 치켜세웠다.

    “어찌 그리 활을 잘 쏘십니까? 그런 것도 모르고 소인은 아까 자칫 마마께서 잘못되시는 줄 알고 얼마나 식겁한 줄 아시옵니까?”

    “…그러게. 날 놀라게 하려고 한 것인지, 정말 날 죽이려 한 것인지는 몰라도 세자빈이 내게 화살을 날리리라고는 생각 못 해서 솔직히 놀랐어. ”

    ‘분명 화살통에 화살이 하나도 없는 것까지 살펴봤는데!’

    그 자리에서 멈춘 두화가 뒤를 돌아 소리쳤다.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 잠시 모습을 드러내 주게.”

    고요한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라, 맹지는 괜히 주위를 둘러봤다.

    “나오게. 아니 그럼, 내 이 자리에 계속 있겠네.”

    그제야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익위사 두 명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들을 향해 두화가 허리를 굽혔다.

    곁에 있던 맹지가 안절부절못하였다.

    “마마, 어찌 저들에게 고개를 숙이시옵니까!”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두 명의 호위도 매한가지였다. 결국 두화의 곁으로 다가온 두 명의 익위사가 엎드려 조아렸다.

    고개를 든 두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이 나와 아이의 목숨을 구했어. 고맙네.”

    “…아니옵니다.”

    “일어나게. 그리고 앞으로는 숨어서 지키지 말고, 내 뒤에서 날 지켜주면 안 되겠는가?”

    “…!”

    서로를 보며 눈을 깜빡이던 두 사내는 뒤늦게 “아!” 한탄했다. 진즉 곁에서 호위했더라면 조금 전처럼 위험한 상황은 미연에 막았을 것이다.

    “마마의 명에 따라 지금부터는 그리하겠나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 복면은 좀… 벗는 것이 어떠한가?”

    두화가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는 흉내를 내니, 익위사는 어찌할 줄 모르다가 이내 복면을 훌렁 벗으며 머리카락을 흩트리고는 정리했다.

    순간 감춰왔던 얼굴이 드러나자 그중 한 사내를 바라보던 맹지의 넋이 나갔다.

    곁에 있는 사내보다도 좀 작긴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무엇보다 조금 전 얼굴을 드러낼 때 민망해하며 웃는데, 한쪽 볼에 볼우물이 깊게 팬 모습에 반하였다.

    ‘어쩜, 저리 귀엽게 생겼을까, 남정네가.’

    “하면 앞으로 마마 곁에서 호위하도록 하겠나이다. 소인, 호가 랑이라고 하옵니다.”

    “소인은 전가 성무라고 하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은 두화가 가볍게 웃었다.

    “호랑이? 아니면 호랑?”

    처음 듣는 질문이 아닌 듯 호랑은 멋쩍게 헛기침을 하였다.

    “호랑입니다.”

    “아, 호랑. 이름만큼 듬직하네.”

    성은 호, 이름은 랑이라.

    랑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맹지의 눈에, 가을이 오는 풍경이 아닌 웬 꽃바람이 보인다.

    “맹지야?”

    “네?”

    “뭘 그리 봐. 이제 동백궁으로 돌아가자꾸나.”

    “아, 예 마마.”

    동백궁에 돌아온 두화는 맹지와 함께 전병과 부침을 두 상 만들어 동백궁 밖에 내놓았다. 세자가 아닌 사내를 안으로 불러들일 수 없는지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자신을 지켜주는 익위사들에게 음식으로 감사함을 전하였다.

    “맹지야, 아까 담아두었던 것 가지고 우린 중궁전에 가자꾸나.”

    “예.”

    직접 음식을 만드는 날에는 중궁전의 것도 함께 만들어 소소하지만 가져다드리곤 했다.

    처음엔 싫어하실까 걱정했으나, 보기와 달리 까다롭지 아니하고 소탈한 중전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다음부터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한참을 수다를 떨다 돌아오곤 한다.

    ***

    “마노라, 고정하시옵소서.”

    “놔라!”

    벽을 맞고 떨어진 촛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오늘은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유산시키려 했다. 목숨이 위협받으면 놀라 애가 떨어질 줄 알았다. 한데 덤덤하니 오히려 또 자신이 놀라버렸다.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단순히 언짢던 마음은 정말 두화와 아이를 죽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분해. 난 여태껏….”

    차마 겉으로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키던 련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자에게 반하여, 그의 곁에 서기 위해 몸가짐은 물론 품격까지 쌓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같은 영양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언행에 조심하고, 늘 남들 눈치를 보며 자신을 평가하고 더 듣기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 끊임없이 애썼다.

    한데 왜 저만 이래야 할까.

    제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미소와 내어주지 않은 품이건만, 저와 달리 신분도 행동도 천하기 그지없는 그 아인 너무도 쉽게 가져가 버렸다.

    억울하고 분해서, 이젠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다. 하다못해 이젠, 눈만 감으면 제 앞에서 두화가 부른 배를 문지르며 세자와 희희낙락하는 허상까지 보인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리라.’

    해서 부친을 부추겨 세자를 살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곳으로 보냈다. 하지만 지금도 매정하고 냉혹한 그의 얼굴이 그립다.

    하지만, 살아 돌아와 매번 마주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리 가슴속으로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

    “조금만 곁을 내주셨더라면 저는 아마도 현숙한 세자빈으로서 남았을 것이옵니다. 저를 이리 만드신 것은 모두 저하 탓입니다. 미운 마음이 더 커지지 않도록 모쪼록 돌아오지 마시고, 그냥 그곳에서… 편히 가세요, 저하.”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 혼자 중얼대는 세자빈을 보며 초아는 불안했다.

    돌연 눈물로 범벅된 련하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다.

    “초아야, 그것을 준비하거라.”

    “그, 그것이라면… 마, 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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