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1)화 (61/96)
  • 61. 세자빈의 흉계-3

    도헌은 틈이 보일 때마다 자한을 노렸지만, 화월국의 세자를 노리는 검이 워낙 많아 오히려 세자를 보호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이제 기회는 단 한 번, 세자가 적의 우두머리를 베어 성공했을 때!

    그때를 노릴 것이다.

    “속전속결로 쳐라!”

    세자의 호령에 사림은 바로 앞 적을 베며 자한에게 달려왔다. 자한의 곁에서 몰려드는 적을 백 장군과 함께 막아내기 시작하였다. 다소 떨어진 거리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기에 자한은 재빨리 등 뒤에서 활을 꺼내 들어 적의 우두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팽팽하게 당기어진 시위를 놓기 전까지 오직 하나만 바랐다.

    ‘살아 돌아갈 것이다!’

    팽!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대지 위를 눈 깜짝할 사이 쌩하니 날아갔다.

    ***

    어두운 밤, 세자빈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맹지에게 말하며 두화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아, 정말. 마노라는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아무리 시기를 해도 회임한 분께 이러시면 안 되는 거죠! 왕족의 후사가 얼마나 귀한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실 터인데… 그런 못된 심보니, 그걸 먼저 간파하신 저하께서 그간 그리 냉랭하셨던 겁니다, 암요!”

    제가 모시는 웃전이 자칫 위험할 뻔하였다.

    맹지는 울화통이 터져 감히 웃전 앞에서 분을 터뜨렸다.

    “난, 괜찮아.”

    “제가 안 괜찮사옵니다. 하이고, 그리 못돼먹었으니 여태 화촉도 밝히지 못한 게지요.”

    맹지의 말에 두화가 눈 동그래져 바라봤다.

    “…!”

    “아, 뭐… 다른 이유보다도 저하께서 그 가문을 엄청나게 싫어라 하시옵니다. 하니, 그 여식이라고 예뻐 보이겠사옵니까? 다, 우리 저하의 선견지명으로 처음부터 소박 놓으신 거죠. 만약 한 번이라도 합궁하여 먼저 회임이라도 했으면, 아휴… 그 위세를 어찌 지켜본답니까?”

    맹지가 진저리를 치며 부르르 떤다.

    그런 맹지를 보며 두화는 생각이 많아진다. 어찌 보면 같은 여인으로 저하만 바라보고 사는 이 궁에서, 그리 냉대를 받으면 얼마나 서럽고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까 싶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옵니까?”

    “응, 오히려 그쪽이 놀라서 고생했을걸. 아무리 고귀한 척해도 풉!”

    두화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맹지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어찌 그러셔요?”

    “영양들도 놀라니까 소피를 그냥 막 싸던데? 그러고들 집에는 어떻게 돌아갔으려나 싶어.”

    “예? 참말요?”

    두 눈 동그래진 맹지가 설마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응. 세자빈은 쥐 꼬리가 움직이니까 그냥 혼절하고, 다 큰 영양들이 아주 방방 뛰면서 왜 그렇게들 어머니를 찾는지, 나도 뭐 꺄아악! 소리치면서 슬그머니 나왔지.”

    “그 자리에 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시무룩해져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맹지를 향해 두화는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 참, 아버지는 뵈었어?”

    “예. 진지는 잘 드시는지, 아픈 곳은 없으신지 계속 물으시더라고요. 회임하셨다니 크게 놀라시진 않은 것 같은데, 어딘지 좀 어두워 보이셨사옵니다. 그래도 마마를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사옵니다. ”

    “…그래, 그러실 거야. 내 뜻대로 궁에 왔다면 그리 걱정도 하지 않으실 양반인데…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옵고….”

    부친이 무척이나 그립지만, 이젠 제게 집은 이곳이다.

    언젠가 부친을 만나 지금과 같은 제 마음을 보여드려야 하겠지만, 가문을 멸문지화 시킨 왕과 대신들에 대해 원망하는 부친의 마음을 과연 녹일 수 있으려나 싶다.

    하나, 어찌하랴.

    왕의 아들인 그의 아이까지 가진 제가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음이다.

    ‘저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한번은 뵀으면 좋겠는데….’

    “바로 수환성으로 가신다고 하셨사옵니다.”

    “뭐? 거긴 지금 전투가 한창인 곳이잖아?”

    “예. 해서 자세한 내용은 서찰에 담으셨다고 주셨사옵니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두화는 서찰을 꺼내 읽었다.

    -그러지 않아도 너를 한번 보고 전쟁터로 갔으면 싶었는데, 이리 사람을 보내니 그것으로나마 위안이 되는구나. 보내준 귀한 물건들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남아 있는 개방 식구들에게 맡기었다.

    “아버지….”

    -너를 먼저 그곳에서 빼내야 하는 것이 맞건만, 거기 있는 정보원에게 들었다. 물 샐 틈 없이 경비가 심해서 정보원조차 네게 다가가지 못한다더구나.

    부친은 끊임없이 절 걱정하고 계셨던 거다.

    -지금… 회임 중이라고. 하고픈 말은 많다만, 솔직히 당장 어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구나.

    “죄송해요, 아버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웃전을 맹지는 가만히 지켜봤다.

    -아비는 또 잘못된 선택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수환성이 뚫린다면 도성까진 쉬이 뚫릴 것이다.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나라와 백성을 잃으면 모두 소용없는 짓이지 않겠느냐? 나라와 백성 이전에 화월국에 네가 있어서, 그래서 가는 것이다.

    역시 부친은 화월국을 끔찍하게 아낀다.

    하나, 두화는 부친이 전쟁터로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미 사랑하는 이도 전쟁터로 가지 않았던가. 부친마저 가 버린다니…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혹여 수환성이 뚫려 도성까지 밀리게 된다면, 남아 있는 개방 식구들을 따라 궁에서 나와야 한다. 다른 것은 생각지 말거라. 아비 말대로 해줄 것이라 믿는다. 네가 궁에 들어간 것도, 왕족의 씨를 품은 것도 내 더는 뭐라 하지 않으마. 하니, 위험하면 반드시 궁에서 나와야 한다. 꼭 그리 해야 해.

    서찰을 읽으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제가 회임한 것까지 알고 계신다.

    죄송하여 부친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인가.

    ‘아버지, 죄송해요.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그분 가까이 있게 되더라고요.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그분 아이까지 가졌으니 어찌합니까?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나라 하는데, 전 그 중이 너무 좋아요. 하여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 같아요.’

    한데 위급해지면 궁에서 꼭 나오라고 부친이 신신당부할 정도면, 화월국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소리다. 전쟁터로 향한 부친이 걱정되고, 또 세자가 걱정되어 앞이 캄캄해진다.

    유독 긴긴밤을 새고, 밝아오는 여명을 눈에 새기었다.

    ‘오늘도 날은 밝았어요, 저하. 저하도 저 빛을 보고 계실 것이라 믿어요. 제 믿음이 어그러지지 않게 부디…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두화는 겉옷을 걸치고 후원으로 나섰다.

    정화수를 갈아 뜨는데 담벼락 너머서 낑낑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까치발 가지고는 보이지 않아 조금은 큰 돌 위로 올라서, 밖을 두리번대며 뭐가 있나 살펴봤다.

    ‘으응? 뭐 하는 거야?’

    동백궁을 지키는 익위사들 사이로, 두 명의 사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엉덩이를 쳐든 상태에서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이 간혹 흔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 저리 있었던 모양이다.

    제가 나설 일은 아니나, 그래도 저를 지켜준다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인데, 무슨 일인지 싶어 담에 간신히 얼굴을 내밀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무슨 일 있는가?”

    갑자기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열댓 명 되는 익위사들이 주위를 경계하면서 검 자루에서 검을 쩔그럭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여기네, 여기!”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드러낸 두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익위사들이 일제히 두화를 향해 예를 취하며 별일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두 명의 사내는 힘겹게 엎드려 있는 모습에 재차 물었다.

    “아침부터 땀 빼시는 건가? 그럼 뛰어야지, 저렇게 엎드린 것으로는 땀이 날까 싶네만.”

    “그것이 아니오라… 실은.”

    한 사내가 다가와 나지막하게 고하였다.

    이야긴즉 전날 두화를 몰래 호위하며 세자빈궁에서 있었던 일을 봤으면서도, 제대로 조처를 하지 않아 벌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두화는 멋쩍게 웃으며 그만 일어나라 하였다.

    “나는 괜찮으니 그리들 말게. 내가 정 힘겹고 두려우면 먼저 찾을 터이니, 그때 도와주면 되지 않겠나?”

    “마마, 저희 모두 저하의 사람이옵고, 지금은 마마를 모시니 자들이옵니다. 제대로 섬기지 못함에 벌을 내리는 것이옵니다.”

    “음, 내 생각엔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것 같은데, 괜한 곳에 힘 빼지 말게.”

    “…알겠사옵니다. 마마.”

    “그럼, 믿고 들어가겠네.”

    날이 완전히 밝아오자, 두화는 입덧하면서도 맹지와 다소 많은 음식을 만들었다. 그것을 모두 동백궁을 지키는 익위사에게 내다 주었다.

    “손수 만드셨사옵니까?”

    “맛이 너무 좋사옵니다.”

    “다 먹어도 되옵니까?”

    익위사들은 두화를 앞에 두고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두화는 괜히 민망하여 다 먹고, 그릇만 안으로 넣어달라고 하고 안으로 들어와 마루에 앉아 햇볕을 쐤다.

    “하이고, 아침부터 이게 웬 고생이시옵니까?”

    “힘들어도 좋잖아. 나 지켜주는 사람들이고, 저리 한 끼라도 해 먹이면 식구 같고….”

    “그래도 제가 하면 되는데… 입덧도 하시면서.”

    맹지를 쓱 보며 두화가 두 눈꺼풀을 깜빡이며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저 많은 음식을 맹지가 만들려면 저 사람들 저녁에나 먹을 수 있을걸. 그리고 그걸 먹은 저들은 아마 다음날 다 도망가고 없을 거야. 그럼, 나 누가 지켜줘?”

    정색한 두화의 표정에 맹지는 금세 울먹이며 고개를 떨궜다.

    “마, 마마. 아무리 그래도 제가 죽을 음식을 만들진 않사옵니다.”

    울먹이는 맹지의 어깨를 툭 치며 두화가 웃었다.

    “농이야, 농. 음식을 누가 만들면 어때. 손이 빠르고 능숙한 이가 만들면 되는 거지.”

    농을 치며 맹지를 놀리기도 하고, 차를 마시며 숨 좀 돌리는데 세자빈궁에서 또 사람이 왔다.

    단박에 맹지가 가지 말라고 만류한다.

    하나, 가지 않으면 또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못살게 굴 터이니, 차라리 가서 전날처럼 은근슬쩍 맞설 생각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두화가 치마를 털며 일어섰다.

    ***

    “본디 이맘때면 왕실의 사냥터로 사냥을 나가는데, 지금은 전시 중이니 그럴 수 없어서, 내 후원에 만들어 봤네. 아, 승휘는 각궁을 쏠 줄 아는가?”

    “…각궁이요?”

    실제 가벼운 각궁보다는 사내들이 쏘는 긴 활을 더 좋아하여 되물었을 뿐인데, 세자빈은 두화가 못 쏘는 것이라 받아들인 모양이다.

    이내 도도한 표정으로 각궁을 잡아 든다.

    각궁을 잡는 자세가 한두 번 잡아본 것 같진 않다.

    ‘저하께서는 생사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사투를 벌이시건만, 활 놀이라니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분이네.’

    팽하니 날아간 화살이 과녁의 중앙을 맞히었다.

    연이어 날아간 화살에 어느새 화살통이 비었다.

    “초아는 마실 것을 좀 이쪽으로 내오고, 이런! 화살이 다 떨어졌군. 화살은 자네가 좀 가져와 주겠나.”

    세자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화를 보며 웃었다.

    맹지가 두화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소인이 다녀오겠나이다, 마마.”

    감히 웃전의 일에 끼어든 언짢음을 서슬 퍼런 눈빛으로 쏘아 보는 련하의 모습에, 그 화가 자칫 맹지에게 닿을까 걱정되었다.

    “아니야, 내가 가져올게. 가만히 있어.”

    “마마, 그래도….”

    “괜찮아.”

    ‘설마… 등 뒤에서 쏘지는 않겠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웃전의 명에 두화는 혹시 몰라 빈 화살통을 재차 확인하였다. 빈 통에 다소 안심하며 과녁으로 가 화살을 하나씩 뽑았다.

    그런 두화를 보며 련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슬그머니 치마 아래서 화살을 주워 든 련하가 조소를 지으며 활시위를 당기는데….

    팽!

    어느새 당겨진 활시위에 바람보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두화를 향하고 있다.

    쐐액!

    너무 놀라 경악한 맹지가 화살이 날아간 쪽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뛰었다.

    제 몸으로라도 막아야 한다.

    하나, 아무리 빨리 뛴들 사람의 다리보다도 빠른 화살은 허공을 가르고 쌩하니 날아간다.

    “…마마, 승휘 마마! 피하시옵소서!”

    비명에 가깝게 맹지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다급한 맹지의 외침에 두화가 고개를 돌렸다.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에, 살짝 방향이 틀어진 화살이 간발의 차이로, 두화의 옆얼굴을 스치며 과녁을 벗어나 땅에 박혔다.

    놀라고 당황하여 몸이 돌처럼 굳어져 땅에 박힌 화살만 응시했다.

    ‘헉, 지금 날 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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