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9)화 (59/96)

59. 세자빈의 흉계-1

두화의 귓속말에 맹지의 표정은 그야말로 놀라는 동시에 울상이 되어버렸다.

“서찰을 써 줄 테니 같이 가져다드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왜 거기에 가져다주라는지, 소인은 모르겠사옵니다.”

“음… 맹지는 사람 겉모습 보고 싫어하고 막 그래?”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그런 인품이 아니라고 강하게 얼굴로 표현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두화가 맹지의 손을 잡고 작게 말했다.

“서찰 받으시는 분이 내 아버지셔.”

“예?”

두 눈을 껌뻑이며 놀라는 맹지를 본 두화는 이제 이곳에서 편한 생활도 끝이겠거니 했다. 익히 소문으로만 듣던 것을, 제 본래 신분이 천것이라고 제 입으로 알렸으니, 자신보다 낮은 신분이라 생각해 구박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싶다.

한데 잠시 당황하고 놀라던 맹지가 오히려 제 두 손을 꼭 잡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간 얼마나 고생하셨사옵니까? 걱정 마시옵소서. 제가 꼭 전해드리겠사옵니다.”

훌쩍이며 오히려 저를 위로한다.

순간 웃음이 난 두화는 귀엽고 선한 맹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

***

이틀 뒤 맹지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제가 모시는 웃전을 어여삐 여기는 중궁전의 허락을 받아, 바리바리 싼 보자기를 둘러메고, 또 양손에 들고 출궁하였다.

맹지 없이 혼자 있으려니 동백궁이 횅하다.

두화가 전날 밤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한 뒤꼍으로 가, 물을 조심스레 따라 버리고 맹지가 길어온 물을 퍼 담을 때였다.

동백궁 입구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들렸다.

“승휘 마마께 고해 주시옵소서. 세자빈궁에서 나왔사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두화의 미간이 좁혀졌다. 목소리만큼 성격도 날카로운 초아였다. 고개를 절레거린 두화는 선뜻 대답하기 꺼려졌다.

전날 세자빈궁에서 한 시진 동안 회임을 하면 조심해야 할 것과 행동거지에 대해 질리도록 듣지 않았던가. 한데 오늘은 또 어쩐 일로 찾는 걸까?

“세자빈 마노라께서 찾으시옵니다. 듣고 있으시옵니까?”

답을 재촉하는 그 목소리에 결국 응하고 말았다.

“기다리거라.”

괜히 책잡힐까 싶어, 머리와 의복을 매만지고 앞을 지키는 익위사에게 소리쳤다.

“문을 여시게.”

문이 열리자 익위사들이 가로막은 창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던 초아가 예를 취했다.

“승휘 마마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더냐?”

“마노라께서 찾으시옵니다.”

“전날 뵈었는데, 혹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있느냐?”

“소인은 모르옵니다. 다만 마노라께서는 기다리는 것을 무척 싫어하시옵니다.”

맹지도 출궁하여 곁에 아무도 없는데, 혹 따라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잠시 고민했다.

‘핑계 대고 가지 말까? 아니야, 그랬다간 세자빈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지. 지겨운 잔소리를 얼마나 해댈지, 어휴, 생각만 해도 벌써 질려버리네. 그냥 내가 가고 말자.’

여태 상대했던 세자빈의 성품을 알기에 굳은 얼굴로 따라나섰다.

세자빈궁에 들어서 침소로 들어오라는 명에 두화는 섬돌 위에 신을 벗고 들어섰다.

두화가 침소로 들어가는 것을 본 초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침소 모퉁이에서 엿보고 있던 궁인 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궁인은 냉큼 달려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천에 싸여있는 뭔가를 두화의 신 속에 넣어 버렸다.

침소에 드니, 좌우로 나뉘어 앉은 몇몇 대신들의 영양들과 세자빈의 시선이 일제히 저를 향하였다.

조금 전 섬돌 위에는 신이 없었다.

여러 켤레의 신을 보지 못하여, 당연히 손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두화는 뜻하지 않은 많은 손님을 보고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세자빈을 향해 예를 취했다.

“음, 어서 오시게. 승휘.”

당장 앉으려 해도, 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저들 앞에서 창피를 주려고 부른 것 같다.

영양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가만히 서 있는 두화를 보던 세자빈은 부러 당황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하나 그 입술은 어딘지 즐겁다는 듯 살짝 늘어져 있었다.

“이런, 서 있게 하여 어쩌나? 이들 또한 내 초대에 응해 온 이들이라….”

오로지 궁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이었다면, 두화는 이 자리가 파할 때까지 서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 이젠 제 배 속 아이도 있어 제 몸은 제가 지켜야 한다.

앉던지, 돌아가던지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내기 위해, 두화는 참는 것이 능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마노라, 궁의 규율에 따라 저들보다 서열이 높은 제가 저 자리에 앉는 것이 맞지 않사옵니까?”

저를 두고 속닥거리던 그들은 두화의 말에 기가 막혀 못마땅하다는 듯 가볍게 한탄을 흘렸다.

그 모습만 봐도 그들 또한 저를 하찮게 여기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승휘가 뭘 몰라 그러나 본데, 이들의 가부장께서 조정에 어떤 분들인지 아는가?”

그들의 아비가 누군지 제 알 바 아니고, 관심도 없다.

“모르옵니다. 하나, 회임한 몸으로 예까지 걸어오느라 조금 지쳤나이다. 무슨 일로 찾으신 건지 여쭙겠나이다.”

이건 뭐, 제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가겠다는 모습이니, 전과 달라진 두화의 행동에 세자빈이 오히려 조금 당황하였다.

이리되니 영양들 앞에서 면이 서질 않는다.

제 앞에서 고분고분해야 하거늘, 말투가 꽤 공격적이다.

더구나 회임을 강조하는 어투에 련하의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가뜩이나 허울만 세자빈이라는 불온한 소리가 들리는 판국에, 감히 그들 앞에서 저를 능욕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그렇군. 내, 자네가 회임하였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였어. 김 소저, 미안하네. 자리를 옆으로 좀 더 물러나 앉게.”

영양들은 앞에 놓인 다과상을 조금씩 밀며 자리를 정돈해 앉았다.

그제야 상석에 자리 하나가 마련되었다.

두화는 그 자리로 가 앉았다.

세자빈의 부름에 초아가 들어왔고, 잠시 후 두화 앞에 다과상을 내왔다.

두화는 정과와 떡, 그리고 붉은빛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외관상으로는 크게 이상이 없어 보이는 다과상이다.

“자네 말대로 예까지 오느라 지쳤을 터인데 따뜻할 때 드시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세자빈의 자애로운 미소에 두화는 순간 소름이 훅 끼쳤다. 고운 붉은빛 차와 세자빈의 미소가 어딘지 묘하게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무슨 차인데 색이 이리 곱사옵니까?”

“별것 아니네. 내 요즘 다리가 붓는 것이 좋지 않아, 팥을 우려먹는데 생각보다 피부도 좋아지고 담백하니 맛도 좋고, 부기도 가라앉는 듯싶어 다 같이 나누고 싶은 생각에 만든 자리네. 자네도 먹어 보게.”

“…예.”

찻잔을 들어 마시려던 두화는 부러 찻잔을 놓쳐 엎었다.

순간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그리고 저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저들끼리 또 숙덕거린다.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아, 신분이 천하다는 그 소문 말입니까?”

“예. 그러니 다도 예절도 모르고 저리 품위 없이….”

바로 옆에서, 그리고 앞쪽에서 숙덕거리는 소리는 듣지 않으려 해도 다 들렸다. 두화는 찻잔을 찻상에 올려놓으며, 그냥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다.

“하긴, 딱 봐도 조신하지 못한 것이, 우리 세자빈 마노라께서 마음고생이 많겠습니다.”

“어째서요?”

‘바로 옆에서 조잘대니 참 잘 들린다, 이것들아!’

두화는 입술을 앙다물고 그 소리를 들으며 용케 참고 있다.

“원래 천한 신분일수록 갑자기 얻은 부귀영화에 어찌할 줄 몰라, 물불 못 가리지 않습니까? 자고로 제 분수를 알아야 명을 부지할 터인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아까도 세자 저하의 총애만 믿고, 마노라께 불경을 저지르는 것만 봐도 알겠더이다.”

“맞아요. 제 눈에도 그리 보였습니다. 나 같으면 부끄럽고 창피하여 고개도 못 들 터인데, 저거 보십시오. 빳빳하게 고개 들고 꼴에 도도한 척하기는….”

‘그러는 너희는 퍽 조신하여, 사람 면전에 두고 숙덕대는 짓거리가 참 예의 바르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정말 내가 못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유가 이거든 저거든 정말 다 재수 없어!’

두화는 속으로 화를 눌러 참고, 세자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런. 송구하옵니다, 마노라. 오느라 힘들었는지 손에 힘이 없어 놓쳤나 보옵니다.”

“음. 할 수 없지. 하면 떡이라도 드시게.”

비단 손수건으로 젖은 치마를 닦는 두화를 찰나 노려보는 련하의 속은 안타까움, 아쉬움이 가득해 숨이 거칠어졌다.

두화는 오늘따라 자꾸 먹을 것을 권하는 세자빈의 의도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저들 앞에서 자애로운 세자빈의 모습을 보이려는 모양인데, 실상은 날 해하려는 것이겠지.’

조금 전 엎질러진 차 또한 주재료가 팥이라서 부러 엎었다.

저를 진맥했던 신 어의가 보내온 작은 책자엔 회임 시 조심해야 할 음식과 재료도 적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팥이다. 평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먹는다면 몸에 좋은 작용을 하지만, 회임한 여인에게는 위험한 재료이다.

수시로 소피가 마렵게 되고, 냉한 체질의 여인의 몸에 독이 되고, 무엇보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참으로 간사하고 악독하구나!’

그렇다고 경계하며 먹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먹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엎었더니, 이번엔 떡을 먹으라고 권한다.

떡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몰라 처음부터 거절하지 못해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속에 들어온 순간, 제가 좋아하는 녹두 고물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나, 녹두 또한 배 속 아이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고 알고 있다.

‘정말! 하아.’

이대로 삼킬 수 없었던 두화는 부러 헛구역질하며 옆으로 게워냈다. 뭐라 타박하면 입덧이라고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아주 작은 알갱이 하나 목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죄 뱉어 버렸다.

‘이래 봬도 밑바닥에서 굴던 돌멩이같이 살아왔거든 내가. 이런 조악한 술수에 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산이지.’

그 모습에 영양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저들끼리 속닥거리지만, 두화는 개의치 않았다. 힐끗 세자빈을 바라보니 몹시도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송구하옵니다. 근자에 들어 입덧이 심해진지라….”

뭐라 타박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무척이나 죄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덧 때문이라면… 하는 수 없지.”

련하는 속이 부글부글하였다.

회임한 여인에게 팥과 녹두가 든 음식을 먹이면, 회임한 여인도 좋지 못하고, 특히 배 속 아이가 유산될 수 있다고 하였다. 만에 하나 세자가 살아 돌아왔을 때, 승휘가 유산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 아파할까?

하여, 오늘을 기점으로 세자빈궁에 들 때마다 먹이려 했건만!

뭘 알아차리고 저러는 건지, 정말 입덧 때문에 저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 아이를 유산시키는 방책이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내 기필코 네년 배 속에 있는 용종을 떨어뜨려, 그 죄를 물어 쫓아낼 것이다. 하여 저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네 만행을 고하고 너에 대해 오만 정이 떨어지게 할 것이야. 제 자식을 소중히 하지 못하고 흘려버린 네년을 저하께서도 용서치는 않으시겠지.’

먹는 모습을 보며, 후에 배 속 아이가 잘못되어 괴로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려 했지만, 계책이 통하지 않으니 더는 두화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승휘의 몸이 좋지 못하니 오늘은 예서 파하겠네. 승휘는 그만 돌아가라. 내 요 앞까지 배웅하겠다.”

이리 친절을 베풀어야 후에 두화가 유산되어도 화살이 제게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 세자빈은 후궁을 살뜰히 보살폈지만, 후궁의 조신하지 못한 행동거지로 귀한 용종이 유산한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려야지.

련하는 미소라는 가면을 쓰고 일어났다.

세자빈이 일어나니 영양들 또한 일어나 두화가 가는 길을 따라 나갔다.

두화가 섬돌을 앞에 두고 섰다. 한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초아와 몇몇 궁인이 저를 유심히 살피고 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였다.

초조한 듯 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궁인의 모습이 어딘지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