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8)화 (58/96)
  • 58. 중전의 호의

    내의원 담벼락에서 누군가와 귓속말을 하던, 한 상궁이 대비궁으로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었다.

    “대비마마, 동백궁의 승휘 마마가 회임을 하였다 하옵니다.”

    찻잔을 들던 대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들던 찻잔을 탁 내려놓자, 찰랑이며 넘친 찻물에 찻상이 적셔 들었다.

    “뭐라? 회임이라고 하였느냐, 지금!”

    “예, 반 시진 전 신 어의가 직접 맥을 잡아 확인하고 기록하였다 하옵니다.”

    “이런, 이런! 어찌 귀한 용종이 그딴 것의 몸에 자리를 잡았을꼬! 그동안 세자빈은 뭘 한 게야?”

    파르르 떠는 대비의 노기 서린 목소리가 침소에 퍼졌다.

    익숙한 듯, 한 상궁은 그저 윗전의 명을 기다렸다.

    “그래도 용종이 들어선 것이니, 생각을 좀 해 보자꾸나.”

    아무리 신분을 복권하였다고 하나 대비는 두화의 신분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다. 모두 세자가 거짓 신분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 좌의정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로 내치기엔 승은을 입었다 하니, 규율대로 용종이 생겼을까 싶어, 달거리를 할 때까지 지켜보자 했다.

    해서 침소를 내줄 때 부러 오래전 미쳐 죽은 중전이 머물던 자리인 동백궁으로 보냈다. 처음부터 후궁 첩지를 내려줄 생각은 없었다. 폐가나 다름없는 동백궁에서 귀신이라도 봐, 실성이라도 하면 내치려 했다. 하여, 혹시 몰라 보낸 것인데 의외로 너무 잘 지낸다고 하여 얼마나 화가 나던지.

    주상의 명으로 후궁 첩지까지 받아 이젠 사사로이 내보낼 수도 없건만, 정녕 회임을 하였다니!

    아이야 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떼어낼 수는 있겠지, 하나 용종이다. 손이 귀한 왕실에 실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회임소식은 대비의 마음을 흔들었다.

    “동백궁에 아이 하나를 보내 지켜보게 하거라.”

    “감시만 하옵니까?”

    “혹 좌의정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작은 것 하나 놓치지 말고 지켜보라 해.”

    “알겠사옵니다.”

    지금의 권세는 자신이 왕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좌의정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았다 하나, 왕실이 번영하여야 권세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해서 당장은 귀한 왕실의 후사를 지켜야 한다.

    ***

    근자에 들어 사흘에 한 번씩 두화를 불러, 여인의 도리며 내명부의 규율에 관해 가르치며 훈계를 하던 련하는 더해가는 두통에 내의원의 어의를 불러오라 명하였다.

    처음과 달리 조금씩 기품을 갖춰지는 두화의 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지고 짜증이 자주 난다.

    세자가 없는 이때 두화를 괴롭힐 작정으로 매번 오라 하지만, 점점 자신을 갉아먹는 기분이다.

    ‘… 모든 게 저하 때문이옵니다.’

    이제 와 돌리기엔 늦었지.

    예전처럼 뭐든 감추고 고상한 척할 수가 없다. 짜증이 나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특히 두화를 보면, 제게 쌀쌀맞고 냉랭하게 굴던 그의 얼굴이 겹쳐 보여 가슴이 아픈 동시에, 분노가 금세 제 몸을 휘감는다.

    “마노라, 마노라!”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고 고개를 드니, 초아가 인상을 쓰며 방정맞게 들어와 고한다.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래? 저하가 돌아오셨느냐?”

    ‘벌써 끝날 전쟁이 아닐 터인데….’

    “아니옵니다. 그게 아니라….”

    제 입술을 짓깨물며 뭔가를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초아를 보니 두통이 더 인다. 찌르르 울리는 고통에 미간을 좁힌 련하가 못마땅하다는 듯 어서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니까… 마노라, 마음의 준비를 하시옵소서.”

    “빨리 말하거라. 머리가 울리는구나. 어의는 어디 있느냐?”

    “아, 맞다. 죄송하옵니다. 워낙 시급한 일이오라 이년이 미처….”

    “대관절 뭘 하고 쏘다니는 게야!”

    짜증이 난 련하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예전보다 어딘지 변한 윗전의 모습에 초아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고하였다.

    “동백궁 승휘 마마가 회임을… 하였다고 하옵니다.”

    느리게 고개를 돌린 련하가 얼굴을 찡그리며 잘못 들었다는 듯 재차 물었다.

    “누가 뭘 하였다고?”

    “승휘 마마께서 회임하였다고 하옵니다.”

    “하아, 하아하하.”

    기막혀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세게 내려친 것 같다. 멍해진 귓가에 제 웃음소리만 먹먹하게 들렸다.

    “마노라….”

    “회임을 하였다고? 어째서 그것은 회임까지 한 게야. 왜 내 것을 다 빼앗는 거지!”

    지금까지도 자신은 초야조차 치르지 못한 소박맞은 세자빈이다.

    한데 천한 천것이 감히 용종을 품었다. 감히 말이다.

    화를 참지 못해 짓이겨지는 입술에서 핏물이 맺혀 들었다.

    ***

    한편 수환성을 뺏기지 않기 위해 자한은 치열한 전투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 베고 또 베어도 적은 마치 장마 전 터전을 옮기는 새까만 개미 떼처럼 끝도 없이 계속 밀려들었다.

    쏟아지는 폭우에도 살기 위해, 화월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운다.

    살고자 하는 마음, 혹은 각자의 염원이 담긴 수많은 검과 창이 서로 뒤엉키어 억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서, 미친 듯 춤을 추었다.

    땅은 붉은 옷을 입고, 빗줄기 소리에도 끊임없이 들리는 비명에 이곳은 불지옥의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자한도 지쳐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검 자루에 매단 두화의 정표를 보고 다시금 일어나 싸웠다.

    그렇게 지옥보다도 더한 그곳에서 살아 돌아가기 위해, 죽고 싶을 만큼 지쳐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살아 돌아가마. 난 반드시 네게 간다, 두화야.’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세자를 향해 도헌은 검을 겨누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실패할 적마다 그 분노는 적에게 돌아갔다.

    베어 낼 적마다 몸과 얼굴에 튀는 핏물로 주위가 온통 붉게만 보인다. 내리는 폭우에 금세 씻겨 내려가지만, 그만큼 또 베어내어 튀는 핏물에 자신이 야차가 된 기분이다.

    승산이 없는 전쟁에 점점 지쳐간다.

    ‘무엇을 위해 난 이러고 있는 것인가?’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까만 비구름만 보일 뿐, 그 너머 창창할 빛줄기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내 모습 같구나.’

    세자를 제거하려 검을 들이댄 것을 세자 또한 알 것이다. 한데도 저리 묵인하는 것은 정황상 어쩔 수 없이 잠시 저를 살려두는 것뿐이다.

    제가 살려면 세자를 죽이든 이곳에서 벗어나 멀리 도망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낸 탓일까, 아니면 이 전쟁이 패하면 화월국이 무너질까 염려되어서?

    그도 아니면 두화 때문일까?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은 사내로서, 또 전쟁터에서 살던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모르겠구나, 이제. 하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도 난 네가 보고 싶구나, 두화야. 다른 것은 생각지 않으련다. 살아서 잠깐이라도 널 볼 수 있다면, 지금은 그것만 생각할 것이다.’

    ***

    “마마, 이것 좀 드셔보시옵소서.”

    어디서 구했는지 맹지가 햇사과를 썰어 내왔다.

    “벌써 사과가 나왔어?”

    “그럼요. 제가 생과방에서 얻어온 것입니다. 드셔보시옵소서.”

    사과를 한입 베물자 입 안이 상큼해진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두화는 몇 조각 더 먹었다.

    “익위사들이 신선한 재료를 가져다주잖아. 그거만 있어도 되니까 힘들게 일부러 나가서 가져오지 마.”

    “그래도 회임하시면 드시고 싶은 것이 많다고 들었사옵니다. 참으면 훗날에 못 먹었던 게 두고두고 생각난다고 하옵니다. 하니,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참지 마시고 말씀해 주시옵소서. 소인이 뭐든 구해다 드릴 것이옵니다.”

    “고맙구나.”

    당차게 말하는 맹지를 보자니 고마워서 그 손을 잡아 다독였다.

    “아휴, 어찌 이러십니까? 마마를 모시는 일은 소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그래도 고마워. 자, 너도 먹어 봐, 달다.”

    두화가 맹지의 입에 사과를 물려주는데 동백궁 문이 열렸다.

    문소리에 맹지가 냉큼 나갔다가 금세 들어왔다.

    “중궁전 연 상궁 마마님이시옵니다.”

    두화는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갔다. 중궁전 연 상궁을 알아본 두화가 미소를 지으며 그 앞에 섰다.

    “왔는가?”

    “승휘 마마, 회임을 감축드립니다.”

    “고맙네. 그러지 않아도 중전마마께 내일 문후 올릴 때 말씀드리려 했네.”

    “그러셨사옵니까? 중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기쁜 소식이 들린 지 며칠인데, 중궁전을 찾지 않으신다며 서운해하셨사옵니다.”

    당황해하는 두화의 모습에 연 상궁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뒤따라온 궁인에게 손짓하였다. 두 명의 궁인이 맹지에게 비단과 약재를 넘겼다.

    “농이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소식을 들으시곤 무척 기뻐하셨사옵니다. 당장이라도 동백궁으로 납시려는 것을 소인이 막았나이다. 마마께서 혹 불편해하실 수도 있으실 듯하여….”

    “…내가 뭐라고, 중전마마도 자네도 이리 신경을 써주는가?”

    “왕실의 경사 아니 옵니까? 중전마마께옵서 저리 냉정해 보이시고, 무섭게 보이셔도 실은 아직도 궁 밖을 더 그리워하시고, 무엇보다 아이를 참 좋아하십니다. 해서 밝은 승휘 마마의 모습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거짓이 아니라 정말 조만간 찾아뵈려 했다.

    한데 이리 먼저 찾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마마, 저것은 중전마마께옵서 마마께 내리는 하사품이옵니다. 회임하셨으니 그에 맞는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전하라 하셨나이다.”

    두화는 중전이 하사한 물품에 대고 예를 취했다.

    가만히 바라보는 연 상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띠었다.

    “혹 드시고 싶은 것이 있는 날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중궁전에 들르라 하셨나이다.”

    “정말 그러셨나?”

    “아니요. 실은 이리 말씀하셨나이다. ‘중궁전에 먹을 거 많으니까 입덧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여기 와서 먹으라고 해. 오는 거 힘들면 보내줄 테니 먹고 싶은 거 꼭 말하라고 해!’라고 하셨사옵니다.”

    중전의 말투를 흉내 내는 연 상궁을 보고 두화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잠시 후 중궁전 사람들이 돌아가고, 두화는 조금 전 받은 것을 앞에 두고 가만히 그 비단을 손으로 쓸어 매만졌다.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중전마마의 호의를 받자니, 과분하여 송구한데….’

    ‘정말 내가 뭐라고 이리 관심을 주실까.’

    막상 중전께서 세자와는 사이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도 중전마마가 직접 제게 말한 것이니까. 한데도 저는 또 마음에 든다고 하신다. 분명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도통 모르겠다.

    “어려운 분이지만 그래도 그분과 있을 땐 뭔가 기대고 싶어지긴 하네.”

    혼잣말하는 두화를 빤히 바라보던 맹지가 궁금하여 물었다.

    “누구 말이옵니까?”

    “이거 주신 분.”

    “중전마마요?”

    “응. 나 같은 것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분인데, 벌써 몇 차례나 밥도 먹고, 맛난 것도 싸 주시고… 회임하였다고 기뻐해 주시고 하사품까지 주셨잖아. 감사하면서도 기분이 참 묘해.”

    “그러게 말입니다. 그간 세자빈 마노라와 참 좋게 지내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왜… 마마를 땡볕에 세우신 날 이후로 좀 변하신 것 같기도 하옵니다. 세자빈 마노라를 통 찾지 않는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래, 그때 분명 절 걱정하는 듯 이상한 말을 남기고는 세자빈궁을 나가셨지.

    “참, 이젠 마마께서도 점점 재물이 쌓이십니다. 좋으시죠?”

    음흉스레 웃으며 묻는다.

    어째 저를 위한 하사품을 저보다도 맹지가 더 좋아한다.

    “그러게. 여기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데… 가만 있어 보자. 아, 그래!”

    저도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긴 하여도 궁 안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그러니 밖에서나 귀했던 재물이 지금 제겐 하등 쓸모가 없다.

    한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왜요?”

    두 눈을 반짝이며 뭔가를 기대하는 맹지를 보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방금 너 주는 줄 알았지?”

    “흠, 아니옵니다. 제가 뭐….”

    입꼬리를 늘인 두화는, 민망한지 문도 막힌 동백궁 후원을 힐끗 쳐다보는 맹지에게 어울릴만한 개나리 빛 비단과 작은 머리꽂이를 내어주었다.

    “저 주시는 것이옵니까?”

    “응. 그동안 고마운 것도 있고, 또 시킬 일도 있고.”

    “시킬 일이라니요? 무엇이옵니까?”

    “잠깐, 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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