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감축드리옵니다.
초아가 나가자 련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간 내가 느꼈던 불쾌하고 분노한 마음을 담아 조만간 모두 되돌려 줄 터이니, 당분간은 편히 있거라, 승휘.’
잠시 뒤 동백궁에 세자빈의 명이 당도하자, 맹지는 의외라는 듯 초아를 바라봤다.
“하면 이만 돌아가 보겠나이다.”
“참말 필사는 안 해도 되는 것이냐?”
“예. 하니, 후궁으로서의 품위와 특히 언행을 각별히 유의하라 이르셨습니다.”
“알겠다. 승휘 마마께 그리 전하마.”
전쟁 때문에 세자빈의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진 건가 싶어 맹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되었든 필사 때문에, 웃전이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 여겼다.
이후, 뒤숭숭한 궁 안 분위기에 맹지는 더욱 주변을 살피고, 들리는 것들에 촉각을 세웠다. 제가 모시는 웃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래도 동백궁을 호위하는 세자익위사들이 열댓 명 있기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어둠이 동백궁을 감싸고, 또 궁 안을 물들이자 두화는 뒤꼍으로 갔다.
촛불 아래 정화수를 떠 놓고, 그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지극정성인 그 모습에 곁을 지키던 맹지도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가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은 하루가 지나 사흘, 나흘… 어느새 달포가 지나갔다. 매일같이 그의 무사함을 바라는 마음으로 두화는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정성스레 올렸다.
“마마, 그만 들어가시옵소서.”
“조금만 더… 아직 아무 소식 없는 거지?”
승전고를 울리기를, 해서 그분이 돌아오시기를 매일같이 기다린다.
“예. 치열하게 대치 중이라고만 들었사옵니다.”
“…그래.”
두화는 두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저하가 부디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중전마마.’
***
바람에 횃불이 이지러지는 사이로, 피가 굳어 얼룩진 갑옷을 입은 자한이 성 아래를 예리하게 응시했다. 멀지 않은 곳에 주둔한 수많은 적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생각해 속으로 삼키었다.
칼자루를 감싼 흰 손수건은 어느새 검붉은 피가 엉겨 제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자한은 이리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칼자루를 매만지며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네가 준 선물이 엉망이 되었구나. 돌아가면 하나 더 만들어 주련?’
아련하게 그녀를 떠올리는 그때 제 꿀 같은 시간을 방해하는 이가 나타났다.
“저하, 아무래도 저들의 동태가 술시(19~21시) 이후 수상하게 움직이옵니다.”
보고하는 도헌을 차갑게 바라봤다.
“혹시 모르니 병사들의 무장을 풀지 말도록 하고, 언제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무기도 철저하게 손보도록 이르게.”
“예, 저하.”
도헌이 물러가자 사림이 다가와 작게 고하였다.
“저하, 저자를 조심하시옵소서. 나흘 전 전투 때….”
“쉿. 안다.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전쟁 경험이 많은 백 장군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이 많다.”
“하오나 감히… 저하의 등에 칼을 겨눴습니다!”
나흘 전 그날, 사방으로 날아드는 화살과 적의 예리한 칼날 앞에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전투였다. 수적으로 열악한 아군이었기에 장군은 물론 세자까지 전투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저 살기 위해, 또 적을 베기 위해 칼을 휘둘렀을 뿐이다. 그때 사림이 아니었다면, 제 등을 겨누던 도헌의 칼에 맞아 이 자리에 있기도 힘들었겠지.
자한은 사림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적이 있는 곳을 향해 바라봤다.
“네가 있어 살았지. 하나, 아직은 저자가… 필요하다.”
“…또 저하께 불손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땐 절 말리지 마십시오.”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듯 분개한다.
자한은 그런 사림의 마음을 안다. 하나, 지금은 한 사람이 아쉬운 형국이다. 처음부터 제 사람이 아니라면 꽤 골치 아파질 것 같더니, 제 예상이 맞았다.
하나, 지금도 저를 노리는 도헌의 의중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부친을 따를 터이니, 반대파인 좌의정과는 손을 잡았을 리 없을 터인데, 그런데도 좌의정의 사주를 받았거나 모종의 거래를 하여 저를 노린 것이라면.
‘만약 그런 것이라면, 둘 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그런 이유가 아닌 처음부터 두화에게 보였던 사내의 마음 때문이라면.
‘그 또한 용서하지 않는다. 감히 세자의 후궁을 마음에 품어 국본을 해하려!’
“그래, 그러마.”
적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자한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
가뜩이나 자한이 출병한 뒤부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던 두화다.
그래서였을까?
몸에 탈이 났는지, 으슬으슬 춥고 얼마 먹지도 않았건만 죄 게워냈다.
곁에서 지켜보던 맹지가 더는 아니 되겠는지 내의원으로 향했다.
저하를 책임지는 신 어의를 찾았다. 다행히 일전에 저하의 명이 있었던지라, 신 어의는 동백궁에 스스럼없이 따라왔다.
“먹은 것이 얹혀서 그럴진대 괜히 신 어의가 헛걸음한 것은 아닌지 싶네.”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하옵고 마마의 안위를 살피라 저하께옵서 당부하셨나이다. 하오니 마음을 편안히 하시면 맥을 봐 드리겠사옵니다.”
별일 아닐 텐데 싶은 두화는 괜히 멋쩍어 손을 내밀었다.
내려진 발 사이로 가는 손목이 나오자, 신 어의가 진중하게 진맥하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신 어의가 바닥에 엎드려 기뻐했다.
“승휘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회임이시옵니다!”
“어머머, 차… 참말입니까? 마마, 회임이시랍니다, 회임!”
손뼉 치며 기뻐 잔망스레 움직이던 맹지가 다가와 두화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직접 들었음에도 어리둥절하여, 발 너머 엎드려 있는 신 어의와 제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맹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정말 내가 회임을 하였다고?”
“예, 마마. 아직은 불안정하오나 회임이 맞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순간 울컥한 뭔가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천천히 제 배를 내려다봤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납작한 이 배 안에, 아이가 들어섰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마마. 기쁜 날 왜 우십니까?”
배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매만지던 두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쁨의 미소를 짓는 윗전을 보니, 맹지는 그녀가 지금 얼마나 가슴 벅차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승휘 마마, 아직은 회임 초기이니 조심 또 조심하시옵고, 혹 모르니 회임 동안 멀리해야 할 음식을 적어 보내드리도록 하겠나이다. 조금이라도 불편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소인을 부르시옵소서.”
“고맙네.”
신 어의가 물러가자 맹지가 쪼르르 달려와, 두화 앞에 무릎 꿇어앉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찌 그리 봐?”
“신기합니다, 마마.”
울먹거리며, 저보다도 더 기뻐서 웃는 맹지의 모습에 두화도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래. 정말 내가 회임을 한 것인가 싶기도 하고, 진짜 여기에 아이가 들어서 있다니 믿기지 않아.”
배를 가만히 쓸어 만졌다.
“마마, 이럴 때 저하께서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
그를 떠올리면 그리움에 눈물부터 고여버리는 것이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저하는 생사를 오가는 처절한 전쟁터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겠지요. 부디 무사 귀환하시어 이 기쁜 소식을 직접 들으셔야 해요, 저하.’
괜히 나약해지는 마음에 두화는 눈물을 닦고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보내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하루라도 빨리 그가 돌아온다면 제가 직접 제가 용종을 품었다고 말하고 싶다.
“마마, 웃전에 알려야겠지요?”
“궁에서는 그래야 해?”
문득 궁 안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저 혼자였으니 겁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를 지켜야 한다.
‘지금까진 내 신분 때문에 그저 당하고만 있었지만,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는 당하지 않아.’
“예.”
두화는 찰나 며칠 전 달거리가 있나 확인하러 온 대비궁의 상궁을 떠올렸다. 달거리가 비치었다면 아무리 후궁 첩지를 받았던들, 그가 없으니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쫓아냈을 것이다. 하나 달거리가 없었으니 혹여 용종을 품었을 수도 있다 생각한 것인지 그 뒤로 잠잠했다.
“혹, 대비궁에서 내의원을 통해 내명부 여인들의 달거리를 매달 확인해?”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각 후궁 처소에서 웃전의 달거리 날짜를 확인하여, 제조상궁에게 올립지요. 하면 제조상궁과 관상감에서 달거리 날짜를 피해, 회임할 수 있는 길일을 잡아 합궁하게 되옵니다. 한데 그건 왜 하문하시옵니까?”
“…그렇단 말이지.”
진중한 두화의 얼굴을 바라보던 맹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방금 네 말대로라면, 난 대비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소리잖아.”
“아! 아마도 세자빈 마노라를 아끼는 대비마마의 견제가 아닐는지요?”
가만히 제 배를 감싼 두화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달리 총기로 반짝였다.
“맹지야.”
“예, 마마.”
“앞으로는 지금처럼 말고, 모든 음식에 독이 있는지 살펴봐. 재료 하나하나부터 시작해서 과일 하나하나, 전 하나하나 전부 다 은침으로 찔러 봐야 해.”
그동안은 맹지가 식자재를 가져오거나 사림이 가져다주어 재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혹 몰라, 음식을 만들고 나면, 맹지가 늘 착용하던 노리개에 매달려 있는 은침을 꺼내 국그릇과 밥그릇에 푹 찔러 확인했다.
“도, 독이요?”
“내가 회임한 게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냥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웃전의 말이 맞는다고 여긴 맹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이제 제가 책임지고 모셔야 할 주인이 두 분이 된 것과 다름없기에, 맹지는 굳건한 마음으로 두화를 바라봤다.
“내의원에도 웃전에서 심어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알게 될 테니까, 당분간 웃전엔 고하지 마.”
“신 어의께서 저하를 배신하시진 않으실 텐데요.”
“신 어의가 배신하지 않아도 어의니까 후궁 처소를 보고 왔으니 기록을 할 거야. 기록된 것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몰래 볼 수 있는 거니까. 더욱이 궁엔 쓸데없는 쥐와 새가 그렇게 많다고 네가 그랬잖느냐.”
“아아!”
“분명 오늘 신 어의가 여길 다녀간 것을 누군가 봤다면 내의원을 뒤지겠지.”
마마의 똑소리 나는 말에 맹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 신기하신 분이야. 소문처럼 천한 신분일지도 모르지만, 궁중 법도건 여인의 도리건 한번 배우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어떻게 그리 빨리 습득하실까? 다른 분 같았으면 마노라의 고된 훈육에 진즉 나가떨어질 텐데, 마마는 오히려 별것 아니라는 듯 매번 해내시니.’
골똘히 생각하는 두화를 가만히 바라봤다.
‘못 하는 것이 없으시네, 그러고 보니. 요리도 너무 잘하시고, 활과 검도 사내들 못지않으시잖아.’
그동안 제가 모시는 웃전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겁도 없이 토굴에 들어가질 않나.
또 세자빈의 부당함에 당해도 반박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고 있다. 그리고 저하를 위해 기도하며 우는 모습만 봐왔는데, 오늘 또 다른 면에 놀란다.
‘근엄하면서도 총명한 우리 마마, 웬만한 잘난 사내보다 멋있으시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