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6)화 (56/96)
  • 56. 꼭 돌아오마.

    ‘만에 하나 불손한 마음을 품고 세자와 과인을 기만한다면, 더는 그대를 묵과할 수가 없구나 좌의정.’

    수렴 너머 왕의 의중도 모른 채 좌의정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제 말발을 누가 당하랴. 이제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등 떠밀려 전쟁터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게 누가 내게 안하무인처럼 굴라 하더냐! 자업자득이네, 사위.’

    가만히 좌의정의 말을 듣던 자한이 몸을 돌려 왕에게 고하였다.

    “전하, 소신 성라국의 침략 소식을 듣자마자 진즉부터 출병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이다.”

    “세자!”

    고함에 가까운 왕의 외침에 설변도는 자기 뜻대로 흘러감에 피식 조소를 지었다.

    “나라의 존망이 코앞이거늘 어찌 국본이라는 자가 백성의 뒤에 숨어있을 수 있겠나이까? 소신, 저 무지하고 무력만 앞세운 저들을 반드시 몰아내겠사옵니다. 하오니 윤허해 주시옵소서.”

    영의정 쪽 몇몇 대신은 그 자리에 엎드려 읍소하였다.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저하. 전하 통촉해 주시옵소서!”

    “통촉해 주시옵소서!”

    옥좌를 쥔 왕의 손엔 핏기가 가신 지 오래다.

    너무도 확고한 자식의 마음을 돌리기엔 이미 들은 자가 많다.

    ‘좌의정이 노린 것이 이것이었군.’

    세자를 선봉에 세워 전쟁터로 출병시키는데, 왕인 제가 꼼짝없이 윤허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려고 그랬던 것이다.

    시간을 끌 수는 없는 일이다. 한시라도 빨리 편전 회의를 파하고 군비를 점검하여 출병하여야 한다. 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간신히 바로 세워 어렵게, 입 밖으로 꺼내었다.

    “…세자가 이번 전쟁의 지휘를 맡거라.”

    결국 왕의 윤허가 내려지자 좌의정을 따르는 자들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고, 영의정 쪽 대신들은 개탄하였다.

    모두가 편전을 빠져나가자, 왕과 세자만 남았다.

    “네, 어쩌자고 좌의정의 술수에 말려들어 출병한다고 하였느냐?”

    탄식에 가까운 말이 힘없이 쏟아졌다.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이 이렇다. 근엄하다 못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왕도 지금은 아들을 염려하는 그 마음에 용안에 수심이 그득하다.

    “아바마마, 염려 마시옵소서. 아무리 저들의 수가 많다 하나 우리 쪽엔 백 장군과 같은 인재가 많으니 소자 걱정하지 않사옵니다.”

    “하나, 전쟁이 처음이지 않으냐? 지옥보다 더한 아비규환 속에서 어찌 견뎌내려고 하느냐?”

    “소자, 약하지 않사옵니다.”

    스스로 약하지 않다는 아들의 그 말에 비로소 왕은 아주 조금….

    그래,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옵고 여쭙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승하하신 모후….”

    승하한 중전을 왜 묻는 것이냐, 그 의중이 궁금하나 지금은 출병을 앞둔 아들에게 무엇도 말하기가 꺼려졌다.

    어찌 자식에게 그 어미가 미쳐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렵사리 회임한 순간부터 미쳐 정신이 이상하더니, 결국엔 출산하고 얼마 못 가 자결하여 죽었다.

    한데 그 또한 자결이 아닌 듯싶다는 검시에 왕은 당시 참으로 난감하였다. 스스로 목을 조르기엔 그 정도 자국이 남지 못하거늘, 중전의 목엔 꼭 누군가 힘껏 조른 것처럼 목 주위가 새까맣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기괴한 상황에 은밀하게 무당을 불러 살펴보기까지 하였다. 무당은 신의 벌이라는 말만 남기고 중전의 시체 앞에서 바들바들 떨기만 했었다. 왕도 더는 사건을 파헤치지 못하고, 동백궁에 관한 모든 것을 함구하라 명하였었다.

    오래전 일이 떠오르자 두통이 밀려든다.

    머리에 손을 괸 왕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자한은 물으려 했던 것을 포기하였다.

    “아니옵니다. 그것은 다녀온 후에 여쭙겠습니다. 하면, 소자가 돌아올 때까지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소자는 바로 준비하여 출병하겠나이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세자.”

    “예, 아바마마.”

    ***

    한편 성라국의 침략 소식은 이미 일파만파 궁 안팎으로 소문이 돌았다.

    세자빈궁에도 초아가 소문을 물어 날랐다.

    “큰일 났사옵니다. 지금 전쟁이 났다 하옵니다, 마노라?”

    “그래?”

    “…?”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는 윗전의 모습에 오히려 초아가 당황하였다.

    “혹 다른 소식은 없더냐?”

    “아, 이것이야말로 큰일 났사옵니다.”

    “으응?”

    “저하께옵서 선봉에 서신다고 하옵니다. 어찌합니까?”

    초아가 울먹이며 고하였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세자빈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

    “마노라?”

    “어, 그래. 고생하였다. 차 한 잔 내어주련?”

    이 상황에 차를 달라고 하니, 초아는 세자빈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예?”

    “이왕이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차면 좋겠구나.”

    “아… 예, 마노라.”

    ‘그래,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셔도 오랫동안 연모하신 분이니 마음이 심란도 하시겠지.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를 내오라 시키신 게야. 것도 모르고 난… 우리 마노라께옵서 딴 사람인 줄 알았네.’

    괜히 눈물이 차올라 초아는 훌쩍이며 차를 준비하러 나갔다.

    그제야 련하의 눈빛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가시는 겁니다, 저하.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저하께옵서 오실 동안 저는 세자빈으로서 승휘를 아주, 잘 가르쳐놓겠사옵니다. 잘….’

    련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

    자한이 나간 그 순간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이던 두화가 더는 참지 못하고 동백궁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문을 열어달라 두들기려는 그때 문이 열리고, 갑옷으로 무장한 세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어섰다.

    “저하!”

    정말 전쟁이 난 모양이다.

    갑옷 차림의 그를 훑은 두화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긴말할 시간이 없다. 내가 없는 동안 밥 잘 먹고, 아프지 말고 어디 갈 생각은 더더욱 말고, 얌전하게 기다려야 한다.”

    “저… 하, 직접 출병하셔요?”

    “내 나라, 내 백성을 내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니 가면 안 돼요?

    그냥 다른 이에게 맡기면 정녕 아니 되는 거예요?

    하고픈 말은 많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니 아무런 말을 못 하겠다.

    “쉿. 난 꼭 돌아온다. 하니, 너도 나와의 약조 지키면서 기다려야 한다. 믿어도 되겠지?”

    작은 어깨를 잡고 호소하는 그 눈빛에, 두화는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고개를 끄덕였다. 와락 그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꼭 돌아오마.”

    ‘그리 긴 시간을 어찌 떨어져 지낸답니까?’

    벌써 그리워서, 걱정이 앞선 그 마음에 눈앞이 희뿌옇게 번진다.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

    ‘당신께서 무사한지 어떤지 모르는데, 저만 어찌 잘 지내라 하셔요?’

    기어이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자한에겐 그녀를 오래 안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애써 그녀를 떨어뜨린 자한이 뒤로 손을 뻗자 사림이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자, 받거라. 내가 없는 동안 나라고 생각하고 매일 닦아주거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활과 화살, 그리고 명검을 손에 쥐여주었다.

    곧 헤어짐을 의식한 두화는 눈물을 거칠게 훔치더니 이내 침소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이제 생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체면이고 체통이고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혹 그사이 가셨을까 싶어 서둘러 뛰어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놀란 자한이 다가와 일으켜 세웠다.

    “뭐가 급해서 이리 뛰어다녀? 다리도 다 낫지 않았으면서!”

    역정 내는 그를 올려다보며 두화는 웃었다.

    넘어진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거, 정말 정말 제가… 흐흡.”

    또 눈물이 터진다.

    대관절 이 많은 눈물이 제 몸 어디에서 이렇게 나오는 걸까.

    그만 좀 말라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제 곧 떠날 분 앞에서 너무 눈물만 보이잖아.

    그게 싫어 쓱쓱 눈물을 당차게 닦은 두화가 다시 화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처음 배운 수로 놓은 불두화꽃이에요. 제 이름과 같아서… 저하 드리려고 정말 정성을 다했는데, 아무래도 전 자수에 소질이 없나 봐요, 저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두화는 애써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게 주는 것이냐?”

    “못나고 삐뚤삐뚤한 것이 꼭 저 같잖아요. 저라고 생각하고 부디… 무사 귀환하셔야 해요, 저하. 저도 약조 잘 지키며 예서 기다릴 테니까.”

    애써 참던 자한의 두 눈이 붉어졌다.

    그대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쉽게 승리할 수 없는, 너무도 불리한 전쟁이기에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녀를 쉬이 놓을 수 없는 제 욕심에 그녀를 이리 울리고 만다. 해서 꼭 살아 돌아와야겠다고 자꾸만 마음을 굳게 다지게 된다.

    “그래, 그러자.”

    아랫것들이 뒤에 있든 말든 오로지 이 순간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고는 그대로 뒤돌아 동백궁을 나갔다.

    “너희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승휘를 잘 보필해야 한다.”

    “예, 저하.”

    잠시 멈춰 섰던 그의 모습이 이내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졌다.

    그가 남기고 간 활과 검을 끌어안고, 두화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서럽고 가슴 아프게 우는지 맹지는 물론이고, 담 밖을 지키는 세자익위사들의 눈가도 벌게질 정도였다.

    ***

    받아든 서찰을 읽은 일랑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구겨진 서찰을 쥔 일랑이 그대로 침상 위에 주저앉자 무영은 의아하게 바라봤다. 설마, 궁 안에 있는 두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마음이 불안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방주님?”

    “성라국이… 침략했다는구나.”

    “예?”

    “이를 어쩐다. 이미 동보성 쪽은 초토화되었다는구나.”

    하나, 일랑은 더 오래 생각을 끌지 아니하였다.

    “넌 바로 이 사실을 각 장로에게 알리고, 최대한 빨리 추릴 수 있는 자들 모두 변방으로 보내달라 이르거라.”

    “…전쟁에 직접 나가려 하십니까?”

    “가야지. 백성이 무슨 죄이더냐.”

    낮은 한숨을 내쉬는 일랑의 모습에, 무영은 그의 속 깊은 마음을 모두 알 수 없기에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동안 일랑은 비록 추악한 관리들의 가택을 털긴 하였으나, 모두 백성을 위해 한 것들이다. 단 한 번도 그른 일을 한 적이 없다. 하여 지금도 그의 선택을 믿는다.

    ***

    “초아야, 승휘를 불러오거라. 며칠 전 여인의 도리를 필사해 오라 했거늘, 어찌 여태 늑장을 부리는 것인지. 웃전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 게지.”

    단단히 벼른 듯 냉랭해진 련하의 얼굴에 초아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세자가 출병한 지 겨우 이틀째이다.

    “마노라, 지금은 좀 자중하시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세자도 없겠다, 승휘를 괴롭힐 생각이었던 련하는 자신의 수족이 만류하자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봤다.

    “뭐라? 감히 지금 내게 자중하라 하였느냐?”

    “그것이 아니옵고, 마노라를 염려하여 충심에 그런 것이옵니다.”

    “하아, 충심?”

    “예. 시국이 시국인 만큼 다들 전쟁에 불안해하고 있사옵니다. 이럴 때 승휘 마마를 불러 훈육하신다면 자칫, 저하께옵서 총애하는 후궁을 저하가 출병한 틈을 타 괴롭힌다는 불경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옵니다.”

    “…!”

    초아의 말이 사실이기에 련하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고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괴롭히고 바닥을 기게 해주려고 그간 참아온 것인데, 그런 제 마음을 초아가 간파하였다.

    ‘멍청한 것이 내 의중을 알 정도면 정말 다른 것들도 죄 알 거란 말이지. 하면 어찌한다? 음… 조금만 기다렸다가 방도를 바꿔야겠구나.’

    “그래, 초아 네 말이 맞는구나. 난 훈육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에겐 그리 보일 수도 있겠구나.”

    평소와 같은 세자빈의 인자한 미소에 초아는 냉큼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년의 마음을 알아주시어 감사하옵니다, 마노라.”

    “네 충심을 내 언제 의심했다고 그러느냐? 하면, 네 말대로 당분간 자중해야겠어. 하니, 넌 지금 동백궁으로 가서, 전쟁 때문에 불안한 시기니 여인의 도리 필사는 그만두고, 후궁으로서의 품위와 특히 언행을 각별히 유의하라고 이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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