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5)화 (55/96)
  • 55. 좌의정의 술수

    세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담은 도헌의 살기를 감추기엔, 어둠도 그 앞에선 미미한 것이었다.

    찰나 칠흑 같은 허공을 베고 떨어지는 형형한 서슬 퍼런 검 끝이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찰나 차이를 두고, 잘린 천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저 공허한 삶이 지겨워서, 좋아하는 검을 휘두르는 것이 좋아 적을 베고, 또 벤 것뿐인 것을… 처음부터 저는 충심으로 전쟁터에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하. 하니, 불충하다 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오로지 두화만 생각하고, 두화를 궁에서 빼내야 한다는 집착만으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댔다.

    중얼거림이 멈추자,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대로 침소 문을 열고 나갔다. 이른 새벽이긴 하나 부친의 침소로 향했다.

    거침없이 나가는 발걸음을 요란하게 두들기는 대문 소리가 붙들었다.

    “이 새벽에 누구냐!”

    문을 열자 병사가 예를 갖추더니 다급히 고하였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더냐?”

    “성라국이 변방을 넘어 침략했습니다. 동보성의 봉화가 올랐습니다.”

    “뭐라!”

    그대로 몸을 돌려 부친의 침소로 향한 도헌은 심각한 사태를 알렸다.

    영의정 백기세는 의복도 바르게 정제하지 못한 채, 아들과 함께 다급하게 입궐하였다. 사태의 위중함을 알기에 서둘러 왕을 알현하였다.

    이미 편전엔 소식을 접한 몇몇 대신들과 세자가 자리해 있었다. 도헌은 세자를 보자 적의가 끓어올랐으나, 사태가 사태인지라 자중하며 왕의 명을 기다렸다.

    “변방을 넘어섰다면 지금은 어디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인가?”

    왕의 하문에 누구도 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자다가 달려온 상황이라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진 이가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편전에서는 병력을 더 보내야 한다, 도성을 지키려면 그 수가 부족하니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며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만!”

    왕의 벼락같은 호통에 편전 안은 쥐 죽은 듯 잠잠해졌다.

    “지금 다른 나라의 전쟁을 논하는 자리요? 어쩜 이리도 다들 천하태평이란 말인가! 성라국이! 그 야만스럽고 거침없는 그들이 지금 우리 변방을 넘어 침략했다잖소! 동보성에 봉화가 올랐다면 이미 동보성도 함락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오!”

    옥좌를 내리치며 일어선 왕이 대신들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방책을 강구 하구자 모인 자리에서 여전히 그대들은 서로 잘났다고 입만 살아서 싸우는 게요!”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보다 못한 세자 자한이 나섰다.

    “방도가 있나이다, 아바마마.”

    세자의 발언에 왕과 대신들의 시선이 한데 집중되었다.

    “무엇이냐?”

    “현 화월국의 병권을 누가 가장 많이 지니고 있사옵니까?”

    “병판과 좌의정이지.”

    왕과 세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옳거니!

    눈이 번쩍 뜨인 왕의 신호에 자한은 옅은 미소를 짓고는 이내 싸늘한 표정이 되어 대신들을 향해 돌아봤다.

    “병권을 지닌 자는 불온한 마음을 품지 않는 한, 나라의 위기가 닥쳤을 때 맡은바 그 소임을 다해야 하옵니다. 지금 화월국이 위태로우니 병조판서는 물론이고, 당장 좌의정의 병권을 동원해야 하옵니다.”

    영의정을 따르는 대신들은 세자의 말이 옳다고 고개를 주억거렸고, 좌의정을 따르는 대신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흘러감에 역시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옵고, 나라의 위기에 맞서야 하니 모든 대신들의 사병 또한 징집하여 전쟁에 임하여야 하옵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흘러간다 여겼던 좌의정을 따르는 대신들은 세자의 뜻밖의 말에 놀라 당황했다. 재산과 같은 사병을 공으로 내놓기엔 손해가 막심하다.

    “그것은 아니 될 말이옵니다. 무릇 전쟁이 발발하면 백성을 동원하여….”

    한 대신의 말에 자한의 서슬 퍼런 고함이 터졌다.

    “백성이라고 하였소이까, 지금!”

    “…!”

    방금 고하던 대신은 세자의 고함에 놀라 어깨를 움츠리고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그대들의 사병은 백성이 아닙니까? 아니라 하는 자는 나오시오. 당장 간자로 추포하여 그들은 물론, 그 주인 된 자들 또한 모두 목을 벨 터이니!”

    대신들을 압도하는 세자의 박력에 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유약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사리 판단이 빠르고 정확해 입만 산 저들을 단숨에 제압한다.

    당장 왕위를 물려줘도 잘 해내 갈 것 같다.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왕이 편전 안을 훑어보던 그때, 편전의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이를 확인한 왕의 미간이 좁혀진다.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것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전하!”

    좌의정 설변도가 등청하였다.

    실로 오래간만의 등청이라 영의정을 따르는 대신들은 못마땅함을 얼굴에 드러냈다.

    “신, 좌의정 전하를 뵈옵나이다.”

    설변도의 등장에 왕의 심기가 언짢아졌다.

    “어서 오시오. 늦으셨소이다, 좌의정.”

    “나라의 변고가 생겼으니 사태를 알아보느라 다소 늦어졌나이다.”

    매번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설변도의 언변은 단연 최고라, 왕도 그와 상대를 할 땐 긴장해야 한다.

    “그래요? 하면 지금 상황은 어떻다 합니까?”

    “현재 변방 근처의 동보성이 함락되었다 하옵니다. 적의 수가 무려 100만이 넘는다고 하옵니다.”

    100만이 넘는 병력을 끌고 내려왔다는 말에 대신들의 탄식과 웅성거림이 커졌다.

    “…100만이라 하였소?”

    믿을 수 없는 숫자에 왕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편전에 울렸다.

    “예. 그것도 어림잡아 100만이지, 더 될 것이옵니다. 동보 위쪽에 있는 수환성의 박 장군이 간신히 버티고 있다 하옵니다.”

    “우리의 병력은 몇인가?”

    심각한 사태에 옥좌를 잡은 왕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박 장군 아래 7천이 있사옵고, 나머지 다른 지역의 병력까지 합하면 못 잡아도 50만 정도입니다.”

    적의 수에 반 토막밖에 되지 않는 병력이다.

    ‘맞붙어 사력을 다해 싸워도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이고, 결국엔 화월국이 저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이를 어찌한다!’

    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왕의 근심을 엿본 자한이 좌의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말한 병력에 개인적으로 소유한 사병의 수까지 포함한 것이요?”

    세자의 하문에 설변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옵니다.”

    “어찌하여, 나라의 위기가 닥쳤거늘 그들의 수는 빼는 것인가?”

    “저하, 사병은 말 그대로 개인의 재산이옵니다. 아무리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렸다고는 하나 아무런 대가 없이 내놓을 자가 있겠사옵니까?”

    “좌의정, 화월국이 무사해야 그대들의 가산도 지킬 수 있는 것이요. 정녕 몰라 묻는 것인가!”

    근엄한 모습으로 저를 가르치려 드는 세자의 모습에 설변도는 속으로 비웃었다.

    ‘혈기 왕성하여 앞뒤 가리지 못하는군요, 저하. 자고로 정치든 전쟁이든 이 사람 손에 있거늘! 쯧쯧쯧!’

    “하면 저하께옵서 설득해 보시지요. 과연 여기서 몇이나 사사로이 사병을 내놓을지 말입니다. 절반 이상이라도 내놓는다면 소신도 그리하지요.”

    좌의정의 도발에 자한은 이를 갈고 양쪽으로 갈라선 대신들을 훑어보고는 옥좌 아래로 다가가 독대를 청했다. 왕의 손짓에 수렴이 내려졌고, 자한은 왕의 지척에서 작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왕은 진중히 생각하더니 그리하라 허락하였다.

    아래로 내려온 자한은 대신들을 향해 근엄하게 그 의중을 물었다.

    “지금 나라의 위기에 스스로 나서는 자가 진정한 충신이니, 화월국을 침략한 저들을 몰아낸 그때 그에 따른 보상을 섭섭지 않게 해주겠소.”

    잠시의 정적 속에 대신들은 머릿속으로 자신들이 취할 이득을 계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좌의정 사람들은 맨 앞자리에 서 있는 설변도의 눈치를 보느라 힐끔대기 바쁘다.

    누구도 나서지 아니하는 그때 영의정과 도헌이 앞으로 한발 나서며 고하였다.

    “소신, 영의정 아뢰옵니다. 저하의 말씀처럼 나라의 흥망성쇠가 걸린 지금 보상을 바라고 자신의 이득을 취한다면 화월국의 백성이라 할 수 없지요. 하여 소신의 사병 70명을 모두 바치옵니다.”

    “신, 백도헌 아뢰옵니다. 신은 사사로이 사병을 거느리지 않아 바치지 못하오나, 그간 신이 하사품으로 받은 모든 것들을 전쟁에 필요한 자금으로 내놓겠나이다. 하옵고, 신이 직접 선봉에 서, 성라국을 이 땅에서 몰아내겠사옵니다.”

    영의정과 전쟁의 살인귀라 불리는 그 아들 백 장군이 나서니, 영의정 쪽 대신들도 하나, 둘 앞으로 나서며 자신이 가진 재물과 사병을 스스럼없이 내놓겠다고 고하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왕이 수렴 너머 좌의정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역시나 못마땅해하는 표정이 얼굴에 죄 드러난 좌의정에 왕은 속으로 피식 조롱하였다.

    ‘벌써 과반이 넘는 자들이 스스로 나섰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좌의정?’

    좌의정을 따르는 대신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좌의정의 말대로 흘러가기는 하나 뜻밖의 복병이 세자였다. 세자가 한 말을 무시하자니, 영의정을 따르는 대신들은 모두 발 벗고 나서서 그들은 이미 충신이 되는 동시에 훗날 이득까지 취하게 생겼다.

    좌의정의 눈치를 보던 한 대신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자신 또한 가산과 사병을 내놓겠다고 고하자, 이내 하나, 둘 앞다투어 나와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겠다고 고한다. 이제 남은 사람은 좌의정 설변도 하나뿐이었다.

    자한은 왕이 아닌 설변도를 보며 편전 안이 울리도록 말하였다.

    “전하, 이토록 충신이 많으니 이는 전하의 성덕이옵니다. 분명 수적으로 저들이 우세하나, 결코 화월국을 흔들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설변도는 제 앞에서 깐죽거리는 세자를 노려보며 고하였다.

    “전하, 소신 또한 사병을… 내놓겠사옵니다, 다만!”

    “…?”

    세자와 좌의정의 기 싸움에서 좌의정이 포기하고 사병을 내놓겠다고 하니, 이젠 세자가 그 우위에 섰다. 모두가 좌의정을 주시했다.

    “신들이 가산과 사병을 내놓은 만큼 이번 전쟁은 꼭 이겨 저들의 무력을 무너뜨리고 화월국의 기상을 높여야 하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돌려 말하는 건가 싶었더니, 이내 세자를 보던 설변도의 입술 끝이 올라가며 조소를 짓는다.

    “수적으로 밀리는 이번 전쟁에 백 장군이 나서니 큰 힘이 되긴 하겠으나, 그래도 뛰어난 기지와 용맹함을 어디 세자 저하께 비교하겠나이까? 세자 저하께옵서 선봉에 서셔서 저들을 토벌하여 주시옵소서.”

    설변도가 꺼낸 말에 영의정 사람들은 모두 아니 된다고 입이 부르트게 외쳤다.

    이에 영의정이 나서서 반박하였다.

    “그것은 아니 될 말이오. 국본의 자리가 얼마나 중한지 몰라서 저하를 전쟁터로 보내자는 것이오, 좌의정!”

    “압니다. 하나, 민초를 위하는 저하의 마음을 무지한 백성도 알아야 하지요.”

    “좌의정!”

    “영상 대감, 국본인 저하께옵서 직접 선봉에 서서, 한낱 민초를 위해 나선다고 하면 그들 또한 스스로 병사가 되겠다고 자원할 테고, 그럼 부족한 병사를 채울 수 있지 않겠소. 이는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의정은 그저 노려볼 뿐 대꾸하지 못하였다.

    “저하께옵서 선봉에 서신다고 하여 직접 적을 상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병사들을 지휘하며 그들에게 힘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듣다 보니 틀린 말이 아니기에, 영의정을 따르는 대신들 몇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나, 옥좌에 앉은 왕은 노하여 그것을 참느라 옥좌를 꼭 쥐고 말았다.

    ‘어떻게 얻은 세자인데, 전쟁터로 내몰 수는 없느니!’

    분명 전쟁터에서 세자가 잘못되기를 기원하지 않고서야 하나뿐인 왕족….

    ‘능윤군을 염두하고 감히 우리 세자를 전쟁터로 보내려 하는 것이냐, 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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