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4)화 (54/96)
  • 54. 성라국의 침략

    아들을 살리기 위해 금기된 것까지 행하며, 본인의 생을 깎은 모후를 생각하니 자한은 억장이 무너졌다.

    “차라리 소자도 같이 데려가 주시지… 어찌 이런 모진 선택을 하셨습니까, 소자는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옵니까? 어마마마!”

    애통하고 구슬프게 들리는 그의 울음소리에, 토굴 밖에 있던 두화 역시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저하,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저희 아버지께서는 늘 말씀하셨어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눈물을 훔친 두화가 작게 중얼댔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또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라 하셨어요. 중전마마께서는 당시의 당신에게 최선을 선택하셨고, 저하께옵서 잘 사시길 바라실 겁니다. 하니, 조금만 아파하셔요.”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두화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토굴에서 나온 자한은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화와 마주 섰다.

    두화는 천천히 다가가 아무렇지 않게 그를 안았다.

    툭 어깨 위로 그의 고개가 떨궈졌다.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가 흐느꼈다.

    “…오늘만 아파하세요, 저하.”

    “난….”

    “알아요. 지금 저하가 얼마나 서럽고 애통하고 아프신지.”

    자한은 체통이고 뭐고 생각지 않고, 그녀의 작은 어깨에 매달려 울었다.

    다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사림은 무엇 때문에, 정신없는 사람처럼 침소에서 나와 토굴로 들어간 세자가 울기까지 했는지 두화에게 묻고 싶었다.

    한데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두화도 흐느끼고 있으니 쉬이 다가서지 못했다.

    토굴에서 나온 세자의 표정은 사림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뭔가 망연자실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아주 위험한 표정이었다.

    다가가려 했지만, 또 울고 있다.

    세자의 우는 모습에 사림의 염려는 커졌다. 하나, 지금은 선뜻 우는 연유를 묻지 못하겠다.

    ‘지금은 승휘 마마께서 곁에 있으니 다음날 여쭈어야겠군.’

    사림은 조용히 자리를 떠나 동백궁 밖으로 물러났다.

    잠시 뒤 침소로 돌아온 자한은 붉은 눈으로 아직 보지 못한 서신을 보기 위해, 비단 속에서 서신을 꺼냈다. 낡은 서신을 읽어내린 자한은 눈물을 흘렸다. 한번 뵌 적 없는 모후지만 저를 얼마나 위하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저하, 이 이야기의 끝은 이게 다가 아니에요.”

    “…!”

    두화는 아직 채 감정을 추스르지 않은 그에게, 제가 왜 궁을 떠나려고만 했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힘들게 입술을 떼었다.

    “중전마마께서 남기신 유지에 저주받은 그 날 태어난 아이와 만나서는 아니 된다고…. 만일 만나더라도 죽이거나 멀리하라는….”

    “자, 잠깐! 아무 말 말아라.”

    뭔가를 직감한 자한은 고개를 흔들며 두화의 말을 막았다.

    ‘어쩌자고 네가, 내게 이러는 게야. 어쩌자고 대체!’

    “들으셔야 해요.”

    “싫다.”

    “싫어도 들어주세요.”

    “불허한다. 그 입 다물 거라!”

    굳은 얼굴로 고함치는 그를 보며 두화는 애달프게 그를 불렀다.

    “저하.”

    “두화야….”

    두화는 그의 앞까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 또한 뭔가를 안 것일까?

    잡은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참고 있던 눈물이 똑하고 떨어졌다. 냉큼 눈물을 훔쳐낸 뒤, 모진 사람처럼 잔인하게 말을 꺼냈다.

    “저도 그날 태어났어요.”

    “…!”

    “네, 처음엔 미신 따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지요. 해서 흔들리는 제 마음이 저하의 마음과 같다고 여겼을 땐, 저하의 뒤에 숨어서 이 궁에서 살려고 했어요. 한데 저도 승하하신 중전마마의 유지를 보고 말았네요. 그냥 미신이었으면 좋겠는데….”

    “미신이다. 미신이고 말고, 모후는 괜한 걱정을 하신 것이다.”

    옅은 미소를 지은 두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미신이라 하여도 제가 연모하는 분이 저로 인해… 잘못되면 저도 살지 못해요. 해서 중전마마의 마음이 어떠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아니다, 두화야. 너까지 날 힘들게 하지 말아라.”

    “해서 더 나가려고 했어요. 장군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나가려고 했는데… 결국 오늘도 나가지 못했네요.”

    그녀의 말에 불안한 듯 눈동자가 흔들리던 자한은 순간 그녀를 품으로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내 허락 없이는 아니 된다. 내 죽어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야.”

    제 결심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그는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지금도, 저에 대한 마음이 한결같다. 쉴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두화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울지 말아라. 이깟 미신이 뭐기에! 감히 너와 나의 마음을 찢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냐?”

    “제가 저하께 불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어요. 이런 절 곁에 두어도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자한은 그녀의 얼굴을 잡아 저를 보게 했다.

    자한은 가만히 두화와 마주 보았다. 모든 비밀을 안 지금, 저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녀는 그동안 홀로 얼마나 마음고생 하였을까?

    이제야 그녀가 왜 그렇게 궁을 나가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러는 넌, 내게 잘 지내라 하고 어디론가 꼭꼭 숨어버리면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 하겠죠, 분명. 하지만 저하만 무사히 잘 지내시면,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요, 전.”

    “고얀 것, 내가 절 어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꼭 그리 말해야 하지?”

    두화는 감히 그의 얼굴에 손을 댔다.

    그녀의 손 안 가득 그의 온기가 번졌다.

    “중전마마의 유지처럼 제 존재가 저하께 해가 될지도 몰라요.”

    “개의치 않는다. 만약 모후의 유지대로라면 넌 내게 흉이 아닌 길이다. 우리가 서로 흉이 될 운명이라, 만에 하나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여도, 너와 보내는 마지막 그 하루까지 내겐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저하….”

    “하면 이젠 내게 온전히 잡혀주겠느냐?”

    “나중에 저 때문에 인생 꼬였다고, 재수 없다고 욕하시면 아무리 저하라도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저, 손 매운 거 아시잖아요.”

    작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내렸다.

    “너야말로 나로 인해 앞날에 먹구름 끼었다고 욕하지 말아라.”

    그가 붉어진 눈으로 옅은 미소를 짓는다.

    “이제 어찌해야 해요, 우리?”

    “뭘 어째?”

    “저하와 제 비밀. 그리고 승하하신 중전마마의 비밀… 말이에요.”

    “변하는 건 없어. 너와 나의 비밀은 우리 둘만 끝까지 안고 가면 그만일 뿐이고, 어마마마의 일은….”

    모후의 능도 칭호도 중전의 격에 맞게 처리되었던 것이라 바꿀 일은 없다. 다만 저를 위해 죄 없는 아이들이 죽었다니 시간이 걸려도 그 진상은 밝힐 것이다.

    ***

    서로를 위로하다가 잠이든 자한은 또다시 안개 속에서 헤매었다.

    자한은 이것이 꿈이란 것을 인지했다. 해서 혹 먼젓번처럼 모후가 근처에 있지 않을까 애타게 불렀다.

    -어마마마, 여기 계시옵니까?

    아무런 답이 없다.

    -소자에게 전하실 말이 있어 찾으신 것이옵니까?

    그저 제 숨소리와 발소리만 들릴 뿐이다.

    -소자 다 알았나이다. 하오니 숨지 마시옵소서.

    그제야 안개 너머로 뭔가가 아른거렸다.

    아무리 다가가려 하여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자한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예로써 절을 올렸다.

    -소자, 어마마마께 문후드립니다.

    -우리 세자, 미안하구나.

    화답해주는 떨리는 그 목소리에 자한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옵니다. 이렇게 목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게 소자를 찾아주셔서… 소자는 좋사옵니다.

    -세자, 곧 피를 볼 것이다. 너와 같은 날 태어난 아이니 부디 믿지 말거라.

    그 아이를 믿지 말라는 모후의 말에, 자한은 두화를 언급하는 것인가 싶어서, 그녀와 꿈꾸는 미래가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그 아이, 쇠붙이… 검… 하아, 그래! 이 모든 것이 용을 꿈꾸는 이무기의 계략이구나.

    -쇠붙이와 검이라니요? 이무기는 또 무엇이옵니까?

    -미안하구나. 모두 말해 주고 싶으나 이 어미도 천기를 누설할 수가 없구나. 이것만 말해 주마. 두 마리의 이무기 중, 하나가 화월국 안에 똬리를 틀고 있으니 부디 안팎 모두 조심해야 한다.

    -어마마마! 더 말씀해 주시옵소서. 어마마마!

    보이지 않는 모후를 향해 달려보지만, 여전히 제자리다.

    결국 턱까지 차오른 숨에 가슴을 쳐대자, 그제야 ‘헉’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 상체를 세워 앉았다.

    “또 꿈꾸셨어요, 저하?”

    “어마마마께서 곧 피를 보게 된다고, 이무기를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쇠붙이와 검도 그렇고. 그게 다 뭘까?”

    “글쎄요, 오늘 밤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괜히 꿈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요, 저하?”

    “그렇겠지? 그래, 별일이야 있으려고.”

    어느새 동이 터오는지 밖이 희끄무레했다.

    잠깐이라도 누웠던 두 사람이지만 쉬이 잠들지 못했다.

    더구나 무거운 꿈 때문에 심란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자한은 품 안에 있는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심란한 기분을 지우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먼젓번 일이 떠올랐다.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 못 한 소원 말이다.”

    “그걸 여태 기억하세요?”

    “당연하지. 난 말이다. 내가 취할 것, 해야 할 것은 꼭 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그 소원 지금 말하마.”

    “잠시만요, 저하! 전 재물 없는 거 아시죠? 아, 하사품으로 받은 건 맹지가 그러는데,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직 저하께 갚아야 할 빚도 남았다는 걸 감안하여 말씀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자한이 몸을 모로 돌려 그녀를 내려다봤다.

    “내 숨이 다 할 때까지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소원이니라.”

    “…!”

    “들어주지 않을 것이냐?”

    “뭐예요, 정말? 전 좀 더 거창한 소원을 말씀하실 줄 알았더니.”

    “그럼, 이제 내 곁을 떠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냐?”

    “예. 저하처럼 저도 운명에 맞서 싸워보지요, 뭐.”

    자한은 그녀의 작은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이제야 정말 그녀를 온전히 가진 것만 같다.

    “윽, 저하. 숨 막혀요.”

    두화가 단단한 가슴을 툭툭 쳐대며 놓아 달라고 하는데도, 자한은 쿡쿡 웃으며 더 끌어안았다.

    “가만 좀 있어 보거라. 좋아서 잠시 이러고 있어야겠다. 잠시라도 풀어놓으면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어.”

    “컥, 어디 안 간다니까요.”

    “싫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애정을 나눌 그때, 침소 앞에서 사림의 목소리가 다급히 들렸다.

    “저하! 저하!”

    막 입맞춤으로 서로의 볼이 상기될 때이건만, 다급하게 불러대는 사림 때문에 자한은 툴툴대며 의복을 대충 몸에 걸쳤다.

    다소 거칠게 문을 열며 질책했다.

    “대관절 무슨 일이기에 새벽부터!”

    “큰일 났사옵니다!”

    다급해 보이는 사림의 표정에 자한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성라국의 침략입니다!”

    “뭐라!”

    “전하께서도 지금 보고를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았다. 기다려.”

    침소로 들어온 자한은 서둘러 의복을 정제하였다.

    곁에서 돕던 두화를 끌어안았다.

    “저하?”

    “…성라국이 침략했다는구나.”

    “하면 전쟁이!”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있거라. 난 아바마마를 뵈어야 하니 지금 편전으로 가봐야겠다.”

    다급하게 동백궁을 나가는 그를 보며 두화는 뭔지 모를 불안감에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이제야 그동안 저를 괴롭히던 것들에 해방되어, 그와 함께 운명에 맞서려 하는데 전쟁이 웬 말이란 말인가.

    ‘혹, 내가 저하의 곁에 있겠다고 입 밖으로 내어, 벌써 불운한 기운이 저하에게 닿은 것은 아닐까?’

    재수 없는 생각에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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