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3)화 (53/96)
  • 53. 알게 된 비밀

    휘파람 소리에 어둠 속에서 복면인 둘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둘 중 하나는 마마의 행선지를 보고 해야 할 게 아니야!”

    사림이 윽박지르자 복면인들은 고개만 숙인 채 꼼짝 못 했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두화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백궁을 호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숨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줄은 몰랐다.

    만약 사림이 조금만 더 늦게 와, 제가 맹지의 목을 쳐 기절시키고 서북쪽으로 향했다면!

    꼴깍….

    뒤에 벌어질 아찔함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랬다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고, 바로 저하에게 말이 들어갔을 테지. 이후 동백궁에 갇히는 건 불 보듯 뻔하고, 아마도 지금보다 더 심한 감금이 이루어질 수도…’

    “하아!”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두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사림이 두화를 힐끔 하더니, 두 복면인을 나무라는 것을 멈추었다.

    “송구하옵니다.”

    “아, 아니에요. 한데 무슨 일이에요?”

    “저하께서 찾으십니다. 벌써 반 시진이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사림과 두 명의 복면인의 호위를 받으며, 두화는 제 계획과 무관하게 동백궁으로 향해야만 했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저 길을 향해 지금이라도 뛰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주 잠깐 멍청한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사림 하나라면 몰라도 복면을 쓴 두 명의 호위까지는 따돌릴 재간이 없다.

    ‘미치겠네, 진짜. 그나저나 장군님 기다리실 텐데… 도와주시는 분께 괜히 미안하네.’

    ***

    한편 서북쪽 중문 바깥쪽 어둠 속에서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던 도헌은 그 문만 뚫어져라 바라본 지 벌써 반 시진이 넘는다. 이미 해시(21~23시)가 지나 자시(23시~01시)도 넘어섰다. 반짝반짝 등불이 넘실대던 궁 안 곳곳의 불빛도 하나, 둘 꺼진 지 오래다.

    기다려도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을 보며, 주먹 쥔 손등에 핏대가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들킨 것이냐? 해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냐, 두화야!’

    오늘만 기다렸다. 이 밤이 지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그녀를 데리고, 화월국은 물론 화려함을 자랑하는 성라국까지 여행을 떠나려던 참이다.

    세자의 관심이 무뎌지고 그녀가 잊힐 때까지, 그리 둘이서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자유롭게 훨훨 날게 해주고 싶었다. 한데 어찌하여 세자는 그녀를 저 거대한 곳에 묶어두려고만 하는지, 분노가 치솟는다.

    차라리 세자가 아닌 적이었다면, 가차 없이 베어 버리고 그녀를 데려왔을 터인데. 오늘처럼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화가 났던 적이 없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두화가 원치 않는 이상 소신도 물러날 생각 없습니다, 저하!’

    저 넓은 궁 어딘가를 바라보는 도헌의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

    침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두화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앞에서 망설였다.

    ‘어쩌지? 또 미리 알고… 아니야, 아닐 거야.’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려다가 순간 배에 감싸고 있던 보따리가 이제야 생각났다.

    다행히 맹지는 부엌으로 갔고, 사림 역시 문밖으로 나갔기에 지금 주위엔 아무도 없다. 냉큼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간신히 매듭을 풀어 보따리를 떼어냈다.

    ‘어디다 숨기지? 들키면 안 되는데.’

    보따리 안에는 별것 아닌 평범한 일상복이 들어있다. 두리번거리다가 급한 대로 차를 마시는 작은 탁자 아래로 발로 톡 차서 넣어 버렸다. 탁자 아래까지 늘어진 천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 후에 아무 때고 세자가 없을 때 꺼내면 된다.

    안도하며 의복을 매만지고는 문을 열었다.

    뒷짐을 지고 창가에 선 그가 이쪽을 돌아봤다.

    아무런 말이 없었으나 차갑게 바라보는 그 눈빛은 공허하기까지 했다.

    추궁하지 않았는데도 그 눈빛에 몰래 출궁하려 했던 걸 들킨 것만 같다.

    심장이 요란스레 뛴다. 여러 겹의 승휘 복색이 아니었다면 두근거림이 겉으로 드러나 보였을지도 모른다.

    “…오셨어요, 저하?”

    어딘지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자한은 그녀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승휘에 걸맞은 복색과 머리 장식을 보고는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고는 성큼 다가와 끌어안았다.

    “텅 비었더라, 이곳이.”

    “예?”

    “네가 없는 이곳에서 기다리는 동안 별의별 생각을 하였다. 혹… 백도헌 그자에게 간 것은 아닌지….”

    “…!”

    두화의 심장이 뜨끔하여 더 세게 요동쳤다.

    “한데 복색을 보아하니 웃전에 인사를 드리러 간 게였어.”

    “예. 여태 중궁전에 있었어요. 좋은 차도 마시고, 석반까지 내어주셔서 먹느라….”

    “그랬구나, 그랬어. 난 또….”

    뒷말을 아끼며 자한은 두화의 몸을 좀 더 꼭 안았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응.”

    “하면 석반은요?”

    “먹지 못하였다.”

    “…잠시만요, 저하.”

    그가 팔을 풀자, 두화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 청하고는 그 차림새로 침소를 나갔다. 얼마 후 그녀가 작은 상을 가지고 와 내려놨다.

    “식기 전에 드셔보셔요.”

    “웬 전이냐?”

    “웃전께 인사드리려면 선물을 해야 하는데, 전 가진 것이 없으니 음식을 준비했거든요. 대비궁은 들어가지 못해서 모르겠고, 중전마마께서는 맛있다고 칭찬해 주셔서… 저하께도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솜씨 좀 부려봤네요. 자, 아 해 보세요.”

    육전 하나를 집어 제게 권한다.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맛나구나.”

    좀 전보다 풀어진 그의 표정에 두화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제가 만든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 그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궁을 나가는 것이 최선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를 사랑하니 그를 위해서 멀어지려 했지만, 침소에 들었을 때 그의 눈빛은 차갑다 못해 공허해서 가까이 다가가기 더 두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고, 그저 차가움만 드리운 것을 보는 것이 더 가슴이 시렸다.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야. 그래, 이건 아니야.’

    그의 젓가락질이 끝나고 상위에 가지런히 놓일 때, 두화는 마음을 정하였다.

    그리고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저하.”

    “응?”

    “지금부터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셔야 해요. 약조해 주세요.”

    “…뭔지 모르지만, 해 보거라.”

    자한은 진중하게 말을 꺼낸 두화가 과연 어떤 말을 할지 감히 짐작하기 싫었다.

    또 궁을 나간다고 그럴까 봐 그 입을 막고 싶었지만, 언제까지나 이리 지낼 수는 없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 확실하게 못 박아 두고, 슬퍼한다면 그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번엔 들어줄 참이다.

    “실은 오늘….”

    숨을 크게 들이킨 두화는 겨우 말을 이었다.

    “궁을 나가려 했어요.”

    “뭐라!”

    진노하는 그의 목소리가 동백궁 침소를 울렸다.

    두화는 그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그의 성난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끝까지 들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하아, 그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두화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궁을 나가려고 했지만, 사림님이 찾으시기에 뒤늦게나마 몰래 출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이젠 알 것 같아요.”

    “…”

    “저하가 슬퍼하고, 아파하고, 화내시면 이상하게도 제가 더 아파요.”

    “…!”

    “저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제 마음 또한 넘치도록 저하에게 향하고 있는데 제가 왜 자꾸만 궁을 나가려고 하는지 아세요?”

    자한은 말을 하지 않았다.

    움막에 있는 자신의 식솔들을 보고 싶어, 처음부터 쭉 나가고 싶어 한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넓고 화려한 이곳이 천한 저와는 언감생심 맞지 않고, 또 갑작스레 들어와 갇힌 신세다 보니 아버지도 움막 식솔들도 보고 싶어 나가고만 싶었어요. 한데 저하가 제 마음을 계속해서 흔드셨고, 결국엔 제 속에 들어와 나가지 않으시네요. 그걸 깨달으니….”

    “…”

    “아무리 이곳이 제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도 저하만 제 옆에 있다면, 견뎌 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데?”

    “제가 알아버렸거든요, 엄청난 비밀을….”

    “비밀? 무슨 비밀을 말이냐?”

    미간을 좁힌 채 묻는 그를 보니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왕 말을 꺼냈으니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참이다.

    그러고 나서도 저를 붙잡는다면 불운이든, 둘 중 하나가 죽든, 그것들을 피해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가슴 아프게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하루를 살더라도 그와 보낼 것이다.

    “동백궁에 얽힌 승하하신 중전마마와 그분께서 남기신 유지, 그리고 저와 저하의 운명… 이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게서 벗어나고자 하던 네가 어찌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아련한 표정인 게냐?’

    자한은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그녀가 천천히 풀어놓기를 기다렸다.

    숨을 고른 두화가 뭔가 결심한 듯 자한의 눈을 보고 어렵게 입을 벌렸다.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정말… 정말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그러마.”

    “4월 초파일이 저하의 탄일이 맞는지요?”

    “…!”

    “맞지요, 저하?”

    그녀가 말한 비밀이란 것이 제 탄일에 관한 것이었나!

    자한은 두화의 눈을 망연히 바라봤다.

    제 탄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부왕의 명이 있었거늘….

    “…두 번 다시 이 일을 입에 담지 말아라. 아니, 잊어. 그래야 네가 산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 두화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하도 저하의 운명에 대해 알고 있었단 소리인가.’

    아직 명확하지 않으니 확인해야 한다.

    다른 이야기는 그다음에 꺼내도 늦지 않다.

    “하면 그날의 저주에 관해서도 아셔요? 해서 제게 두 번 다시 탄일에 대해 꺼내지 말라 하시는 거예요?”

    “부왕의 은밀한 명이 있었다. 누구도 내 진짜 탄일에 대해 몰라야 하며, 나 또한 내 탄일에 관해 무관심해야 살 수 있다 하였다. 이것을 네가 어찌 안 것이냐?”

    “저하께서 태어난 날은….”

    두화는 해괴했던 하늘과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이상했던 그 날의 저주받은 일에 대해 죄 말하였다.

    “하여 그날에 태어난 아이는 이 나라에 길과 흉을 가져온대요. 그리고 그날 저하와 함께 화월국 곳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에 없어요. 누군가 태어난 아이들을 도륙한 것이지요.”

    “뭐라!”

    “저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에 너무 놀라지 마시고, 아파하지 마세요.”

    “…!”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두화는 벌써 그가 아파할까 봐서 마음이 저려 왔다.

    “저하께서 태어나신 이곳 동백궁은….”

    두화는 승하하신 중전마마에 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이곳에서 그가 태어났고, 그것을 숨기려 다음날 태어난 것처럼 꾸며진 것, 그리고 왕자를 살리기 위해 승하하신 중전마마가 행하신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풀었다.

    또 같은 마음으로 왕자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아이를 죽여야만 했던, 왕이 저질렀을 만행까지 모두 말하기까지 반 시진 동안 자한은 그저 듣기만 하였다.

    “…괜찮으세요, 저하?”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저도 믿기 힘들었어요.”

    두화는 방 한편에 있던 장 문을 열어 비단 사이로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왔다. 비단에 싸인 것을 그에게 건네었다.

    “승하하신 중전마마의 유지에요.”

    비단에 싸인 것을 내려다보던 자한이 그것을 움켜쥔 채 말하였다.

    “토굴이 어디더냐?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두화는 횃불을 들고 토굴로 안내했다.

    자한은 횃불을 받아들고 토굴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흙바닥을 기는데도 체통은 생각지 않았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일까?’

    제가 모후를 죽음으로 몬 것일까?

    또 죄 없는 수많은 아이가 저로 인해 죽은 것일까 하는 생각뿐이다.

    작은 문을 열어 들어섰다.

    구부정하게 선 자세로 횃불을 천천히 사방에 비추었다.

    그녀 말대로 구석에 부서진 작은 책상이 있고, 널브러진 두루마리가 보였다. 이런 곳에서 모후가 아들을 위해 행했을 무언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작은 함이 있는 곳까지 갔다.

    함을 열자, 두화가 말한 것들이 들어있다.

    손톱과 머리카락….

    “어마… 마마!”

    자한은 함을 끌어안으매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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