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2)화 (52/96)
  • 52. 생각도 못 한 호의

    중전의 명에 미소를 머금은 상궁이 작은 상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어 들어온 궁인 하나가 작지 않은 함을 들고 와 중전 곁에 놓아두고는 물러났다.

    “음, 나야 뭐 본디 세자와 그리 친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내명부에 사람이 들어왔으니 이것은 왕실에 축복이라 생각하느라.”

    중전의 말에 두화는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경청했다.

    “승휘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세자빈은 조신하고 유한 성격으로 모두에게 평판이 좋지. 한데 유독 세자의 총애를 받지 못하니, 후사는 물 건너간 것 같고, 내 보기엔 승휘에게서 희망이 보이는데 아직 소식은 없느냐?”

    어렵게만 보인 중전의 직설적인 하문에 두화는 또 정신이 멍해졌다. 누구에게나 평판이 좋은 세자빈에게서 후사는 못 볼 거라는 말이 혹 누군가 들으면 어쩌나 싶어, 괜히 본인이 주위를 조심하게 된다.

    “아직인가 보구나. 하면 내, 회임에 좋은 탕약을 보내주도록 하마. 연 상궁, 내의원에 일러 몸을 보하면서도 회임에 좋은 탕약을 동백궁으로 들이게 하고, 주기적으로 승휘의 건강을 돌보라 이르게.”

    “예, 중전마마.”

    두화는 감히 중전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숙였다. 깐깐하고 불편하기만 할 줄 알았던 중전은 의외로 호통하고 언변에 있어 거침이 없고, 일 처리가 빨랐다.

    “주, 중전마마. 너무 과분하옵니다. 소인은….”

    “어허, 거절하지 말아라. 궁이라 하여 날을 세우며 불안하게만 지낼 필요도 없느니. 세자의 총애를 받는 승휘는 좋든 싫든 이제 이 사람의 며느님이지. 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무척 싫어한단다.”

    중전의 말은 계속 곱씹어 생각하게 했다.

    “예… 중전마마.”

    모를 소리만 하는 중전이지만 약까지 챙겨주니 감사하면서도 꽤 불편하다. 곧 나갈 것인데 회임 약이 무슨 소용일까.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찜찜하다.

    “아직은 궁중 법도도 제대로 모를 터인데, 기특하게도 첩지를 받고 인사를 왔구나. 대비궁으로 향했다는 소리에 내게도 올 것 같아, 내 그냥 넘길 수 없어 서둘러 차린 것이라 조촐하지만 먹도록 하고, 아! 이건 작은 선물이니 받거라.”

    작은 상위에 놓인 정갈한 다과와 차만 봐도 중전이 자신을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것을 재차 느꼈다. 중전이 작지 않은 함을 앞으로 밀자 두화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함을 가져왔다.

    “열어 보거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함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엔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보석과 노리개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생각도 못 한 패물에 두화는 냉큼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중전마마, 소인이 너무 긴장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

    긴장하여 말도 헛나왔다. 냉큼 말투를 바꿔 조심스레 고했다.

    “…아니, 못하였나이다. 너무도 부족하지만, 소인이 손수 만든 음식을 바치려 가져왔사옵니다. 하오나 마마께옵서 주신 선물을 보니 감히 올려도 되는지 엄두가 나질 않사옵니다.”

    중전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할 말 다 하며, 눈앞에 조아리고 있는 두화가 언짢기보다는 귀여워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네. 세자빈에게는 이런 적이 없는데….’

    그간 세자빈과는 내명부의 규율대로 따르며, 웃전에 크게 밉보이는 일이 없이 무난하게 지내, 서로에게 크게 관여하며 잡음 가진 적이 없었다.

    한데 먼젓번 제게 하는 짓을 보고는 세자빈의 감추어진 내면을 본 뒤 생각이 달라졌다.

    만약 제게 해를 끼친다면 제 권세를 앞세워서라도 기꺼이 즐겁게 대응해줄 생각이다. 제 가문 또한 좌의정의 가문 못지않은 힘과 권세가 있다. 더구나 저는 웃전이라는 아주 좋은 패를 지니고 있고 말이다.

    아마도 세자빈의 본 모습을 본 그날 이후, 눈앞에 엎드려 있는 저 아이에게 관심이 간 모양이다.

    “손수 음식을 장만하였다고? 밖에 누구 있더냐? 오 승휘가 준비한 것을 들이거라.”

    이내 궁인 하나가 문을 열고 준비한 바구니를 가져왔다.

    백성들이나 쓸법한 갈대로 엮은 사각 바구니를 본 중전은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보자기를 젖혔다.

    두화는 조마조마하여 중전의 눈치를 살폈다.

    제게 번쩍번쩍한 장신구를 내줄 정도이면 사물을 보는 눈이 얼마나 높겠는가!

    한데 사기나 유기그릇도 아닌 갈대로 엮은 바구니에 가져왔으니, 웃전을 조롱하거나 능멸한다고 곧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아, 괜히 가져왔나 봐. 맹지가 뭐라 하든 말든 차라리 하사받은 것을 가져올 것을.’

    후회하며 금방이라도 호통칠 것 같기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한데 호통은커녕 뭔가 씹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웬걸!

    품격 높고 깐깐해 보이는 중전이 그것도 손가락으로 전을 집어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친 중전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들고 있던 육전 하나를 건네었다.

    “너도 먹어 보아라, 맛이 좋구나. 누구 솜씨더냐?”

    건넨 육전을 받아든 두화가 조아리며 화답하였다.

    “소인이 신선한 재료로 만든 것이옵니다. 입에 맞으시옵니까?”

    “참이냐? 이걸 승휘가 손수 만들었다고?”

    동그래진 눈으로 육전과 저를 바라보는 중전의 반응에 두화는 내심 안도했다.

    “예.”

    “음, 정말 맛있다. 이건 뭐 수라간에서 올린 음식보다도 훌륭하구나. 아, 개금이 너도 이리와 하나 먹어 보아라. 아!”

    두화는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은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을 사용한다. 하물며 거지인 자신도 음식 앞에서는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자 꼭 수저를 썼다. 한데 중전은 본인의 입에 들어가는 것도 또 아랫사람에게 건네줄 때도 손가락으로 집어 주었다.

    “정말 맛납니다, 중전마마.”

    개금이라는 궁인은 중전이 손수 입에 넣어 주자, 한입에 씹어 삼키며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 이 맛난 것을 오 승휘가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중전은 흐뭇해하며 개금이라는 궁인에게 자랑하였다.

    두화는 손에 쥔 육전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모습에 중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승휘, 안 먹느냐? 혹, 음식에 뭘 넣었느냐?”

    무슨 벼락 맞을 소리를 하시옵니까!

    두화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냉큼 바닥에 엎드렸다.

    “아니요! 아니, 아니옵니다.”

    “하면 어찌 손수 만들었다면서 먹지 않느냐?”

    “그것이….”

    “난 숨기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솔직히 말하라.”

    슬며시 고개를 들고 앉은 두화가 옅은 미소를 띠며 하문에 답하였다.

    “별것 아닌데 맛있게 드셔주셔서… 또 맛있다고 칭찬해 주셔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사옵니다.”

    “뭐라?”

    오히려 두화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중전은 크게 웃었다.

    “맛있으니 맛있다 한 것이고, 내 입에 맞아 칭찬한 것뿐이다.”

    “감사하옵니다.”

    “음… 좀 있으면 석반을 먹을 시간인데 같이 하겠느냐?”

    “…!”

    “싫으냐?”

    낮게 떨어지는 중전의 말에 두화는 또다시 바닥에 고개를 내려 소리쳤다.

    “아니옵니다. 감사히 잘 먹겠사옵니다, 마마!”

    우렁찬 그 목소리에 중전은 재미있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잠시 후 석반이 차려지고 중전과 떨어진 자리에서 한 상을 받은 두화는 기분이 묘했다. 감히 제가 이 나라 중전마마와 밥을 먹고 있다. 생각조차 못 한 상황이고, 또 당황스럽기만 한데,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젓가락을 든 채,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나 보다.

    “어찌 더 먹진 않고 웃기만 하는고?”

    “귀한 분과 감히 겸상하여 이 감읍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귀한 분이라… 그리 생각해 주니 내가 고맙구나. 하나, 세상에 태어난 것치고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승휘.”

    “…!”

    “비록 태어나며 신분이 갈리긴 하나 저마다의 삶은 모두 소중하지. 하다못해 제 가치를 뽐내기 위해 풍파와 뜨거운 햇살을 견뎌내며 꽃을 피워내는 들꽃도, 시들어 씨앗을 퍼트릴 때까지 제 삶에 최선을 다하지. 하니, 승휘의 신분에 대해 누가 뭐라 하든 스스로 귀하게 생각하거라.”

    “예, 마마.”

    ‘이런 분이 중전마마시구나.’

    이분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그 존재를 귀히 여기시는 분이구나.

    처음과 달리 두화는 조금씩 중전에게 마음을 열었다.

    ***

    “대장군, 두 개의 성을 함락하는 즉시 화월국 도성까지 밀고 나가세요.”

    진여의 말에 대장군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예? 하오나 설 대감과의 약조는 어찌하고요?”

    “약조라… 본래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약조이지 않습니까? 하나, 깨져 버리면 그것은 더는 약조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진여와 설변도 사이의 은밀한 거래에서 그간 대장군 또한 주요 인물로 함께 했다. 한데 지금 들은 말은 전혀 금시초문이었다. 거래로 서로 이득만 취하면, 전쟁은 종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대장군은 당황스러웠다.

    “대감! 설마 화월국을 정말로 정복하실 셈이십니까?”

    대장군을 돌아본 진여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다들 미소년 같은 그 미소에 속아 넘어가 지금의 성라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공주는 물론 왕까지 부마도위에 푹 빠져, 충언을 고하는 신료는 유배 가거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하여 대장군도 진여의 미소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요. 대장군, 내가 아닌 성라국이 화월국을 정복하는 겁니다.”

    “…”

    눈빛이 싸늘하게 바뀐 진여가 고개를 숙인 대장군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곧 넷째가 태어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장군.”

    진여의 말에 대장군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

    “저리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가는데, 그깟 화월국 하나 정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대장군을 믿어요.”

    “…예, 대감.”

    “아, 대장군은 내 사람이니 그럴 걱정은 없는데, 난 날 배신하는 것들은 그 씨조차 말려버립니다.”

    “…!”

    웃으며 말하는 진여의 모습은 독이 한껏 오른 독사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하하하.”

    대장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뀐 계책에 대해 설 대감과 내통하지 말고, 화월국을 정복하라는 것이군. 만약 정복하지 못하면 내 가문과 사람들을 모조리 도륙한다고 겁박을 하는 게야 지금.’

    잠시 뒤, 성벽에 서 있던 진여의 손에서 횃불이 바닥으로 나뒹굴자, 순간 희미한 빛이 근방을 밝혔다. 그러자 장졸들의 환호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그 소리는 그저 몇백의 소리가 아니었다.

    이내 달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을 타고 화월국 국경지대를 넘는 대오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진여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도 이젠 날 자랑스럽게 여기시겠지. 부마는 성에 차지 않아 웃어주시지 않으셨으니, 화월국을 안겨드려야지. 하면 이젠 날 보고 웃어주실 것이야.”

    ***

    삭일이라 그런지 달빛 하나 없는 밤하늘은 그야말로 아득하게 캄캄하였다.

    두화는 중궁전에서 이리 오래도록 있을 줄 몰랐다.

    석반을 마치고도 차 한잔 더 하고 가라 하시어, 끝내 마시고 나오는 길이다.

    맹지가 초롱을 들어 앞서는데, 한 발 앞으로 나가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사위가 어둡다.

    생각도 못 한 중전의 호의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자신이 무척이나 귀해진 것 같은 기분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아차 싶었다.

    ‘이대로 가면 또 동백궁에 갇힐 텐데!’

    미리 계획했던 일을 어서 행해야 한다.

    마침 궁인들도 지나다니지 않으니 실행하기 딱 좋다.

    그제야 주위를 살펴본 두화는 앞서가는 맹지를 향해 미안함을 두 손으로 빌고 숨을 골랐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맹지의 목덜미를 가격하려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두화를 부르며 뛰어왔다.

    “승휘 마마! 마마!”

    ‘에이! 글렀네, 글렀어. 하아.’

    맹지의 목덜미를 치려고 했던, 허공에 머문 손을 억지로 끌어내려 너른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 가까이 다가온 사림이 숨을 고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후궁 첩지를 받아 웃전께 인사를 드리고 오는 길인데, 어찌 그러세요?”

    “그런 것도 모르고… 잠시만요.”

    사림은 두 손을 허리에 얹더니 이내 휘파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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