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1)화 (51/96)
  • 51. 정식 후궁 첩지

    좀 전까지도 수 놓인 손수건 때문에, 어찌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리던 맹지는 두화의 명에 괜히 얼굴이 붉어지더니 이내 목욕물부터 받아놓는다고 나갔다.

    잠시 후 두화는 목욕물을 받아놓은 욕탕으로 향했다.

    침소에서 나와 바로 옆 욕탕으로 들어가, 천천히 의복을 벗어 걸어놓고, 목간통 속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김 때문에 사방이 뿌옇게 되어 좀 더 편하게 몸을 씻었다.

    제 움직임 따라 찰방찰방하는 물소리와 제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물 위에 조그마한 파동을 일으키며 내는 작은 소리가 기분 좋다.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몸을 일으키는데 문 열리는 인기척이 들린다.

    “맹지니?”

    아무런 말이 없다.

    고개를 갸웃한 두화가 다시 한번 맹지냐 물었지만, 옷감 스치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의복을 벗으며 다가오는 것 같다.

    두화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근처에 있던 상의를 물에 적시고는 소리쳤다.

    “누구냐?”

    여전히 대꾸하지 않는 상대는 좋은 의도로 이곳에 들어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

    “지금이라도 나가라. 하면 뒤쫓지 않겠으나, 경고를 무시하고 다가오면 그땐 크게 다칠 것이다.”

    제 양손에서 젖은 상의가 팽팽해졌다.

    하지만 상대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왔다.

    뿌연 김 너머로 얼핏 보이는 상대를 향해 제 손에서 팽팽해진 젖은 상의를 날렵하게 던졌다. 빠르게 상대를 향해 뻗어간 상의는 그만 벽을 맞고 떨어졌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나라도 꽤 타격이 컸겠구나.”

    재미있는 듯 말하는 밝은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세자였다.

    “하아, 놀랐잖아요. 대꾸도 안 하시고….”

    놀란 가슴에 따지고 들려고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말문부터 막혀버렸다. 두화는 부끄러워서 목간통에 주저앉아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고개를 외로 돌렸다.

    풀어진 앞섶 사이로 단단해 보이는 근육을 드러내놓고, 다가온 세자의 모습은 지금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첨벙!

    그가 목간통 속으로 들어왔다.

    한참이 지났건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두화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다가 당황하여, 두 눈을 껌뻑이며 물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는 목간통에 들어와서는 내내 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이 마주치자 자한이 즐거운 듯 웃는다.

    “그리 눈만 내놓으니, 꼭 못 속에서 두 눈만 내놓은 개구리 같구나.”

    그의 말에 두화가 슬그머니 물속에서 올라왔다.

    “왜 침소가 아닌 여기로 오셨어요?”

    “세자인 내가 못 갈 곳이 있더냐? 더욱이 네가 여기에 있으니 왔지.”

    의뭉스레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서지만, 그리 크지 않은 목간통에서 그와 거리가 멀어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리 가까이 있어 부끄럽더냐?”

    “…하면 안 부끄럽겠습니까? 아시면 좀 나가주세요, 그만.”

    “싫다. 감히 내게 나가라 하고 여전히 맹랑한 건 알아줘야겠군.”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바로 코앞이니 보지 않으려 해도 그의 모든 것들이 눈에 새겨진다.

    짙은 눈썹 하며,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차가운 눈,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까지….

    ‘아, 저 입술이 닿았을 때 가슴 한복판이 고장이 난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뛰어대고 몸이 붕붕 뜨는 기분이었지.’

    입맞춤할 때를 떠올리니, 어느새 주위의 소리가 제 귓가에서 사라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두화는 그의 입술에 최면이 걸린 사람처럼 빤히 보다가, 그의 울대가 위아래로 꿀렁이는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갖고 싶더냐?”

    “예? 뭘요?”

    “이거 말이다.”

    순간 제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에 놀라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연신 눈꺼풀을 깜빡이는 두화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자한이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뻗었다.

    “갖기 싫으냐?”

    목간통과 그의 팔 사이에 갇혔다.

    “예? 아니, 갖고 싶… 그게 아니라… 하아, 너무하세요. 또 놀리시고!”

    “두화야!”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또 최면에 걸린 모양이다.

    따뜻한 물 때문인지 그와의 입맞춤 때문인지 정신이 몽롱해진다.

    어느새 두화는 그의 품에 기대어 앉았다.

    “언제까지나 이리 있고 싶구나. 연리지처럼 너와 하나 되어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구나, 두화야.”

    “…저하.”

    그의 말에 설렘도 잠시, 두화는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를 지키기 위해 그를 떠나야 하는 것이 미안해서, 저를 이리 아껴주는 그가 고마워서 두화는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며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이 당신의 말처럼 언제까지나 이리 지내고 싶을 만큼 길었으면 좋겠어요, 저하.’

    ***

    세자가 동백궁을 벗어나면, 두화는 담장 주변을 돌며 경계가 느슨한 곳을 찾는다.

    벌써 하루 반나절이나 세세히 살펴봐도 동백궁을 지키는 병사들 몰래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도 뒤꼍에서 담장을 살펴보며,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단단히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지 앞쪽에서 소리가 났다.

    맹지가 다급하게 뒤꼍으로 달려왔다.

    “마마, 어서… 어서요!”

    “왜? 무슨 일인데?”

    맹지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며 촐싹대며 앞뜰로 이끌었다. 뭔가 싶어 서둘러 따라가니, 웬 상궁과 궁인 몇이 서 있다.

    “마마, 소인은 대전 상궁이옵니다. 예를 갖추시고 후궁 첩지를 받으시옵소서.”

    두화의 얼굴이 찰나 굳어졌다.

    ‘하아, 첩지를 받기 전에 궁을 나갔어야 하는데… 이제 어쩐다.’

    곁에 있던 맹지가 예를 취하라고 눈짓을 줬다.

    두화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예를 취했고, 후궁 첩지를 받았다.

    “본디 후궁 첩지는 중궁전에서 내리는 것이 관례이온데, 승휘 마마께서는 공을 세우고 이를 인정받아, 특별히 전하께옵서 교첩을 내리시어, 첩지와 하사품을 내리신 것이옵니다.”

    맹지가 기뻐하며 비단과 작은 함을 받아 들었다.

    제 할 일을 끝낸 상궁과 궁인은 예를 취하고는 이내 동백궁 입구의 문을 나서자 문은 도로 단단하게 닫혔다.

    두화는 후궁 첩지나 하사품보다도 굳게 닫힌 문만 안타깝게 뚫어지도록 바라봤다.

    “승휘 마마.”

    감격하며 맹지가 불러보지만, 두화는 어떻게 하면 저들의 눈을 속이고 나갈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다. 벌써 오늘이 삭일이 되는 날이라 마음만 초조해진다.

    “마마!”

    “어? 어… 왜?”

    “후궁 첩지까지 받으셨는데 기쁘지 않으시옵니까?”

    “…글쎄.”

    옅은 미소를 지은 두화가 침소로 들어가자, 맹지는 상전의 모를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정식으로 후궁 첩지를 받으셨으니, 서둘러 웃전에 인사를 드려야 하옵니다.”

    “어?”

    “대개는 웃전에 잘 봐달라고 패물이나 음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이옵니다.”

    “…!”

    두화는 순간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한데 시각이 문제다.

    웃전에 인사를 핑계로 동백궁을 나설 수는 있으나 밤이 아닌 이상 훤한 낮이니, 주위 눈을 피해 궁을 나갈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동백궁을 나갈 수 있다는 한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니, 뭔가 실타래의 꼬인 부분을 찾은 것 같다.

    “나도 패물 있잖아. 여기.”

    조금 전 하사품으로 받았던 작은 함을 가리키자, 맹지가 기함하며 함을 끌어안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아이고, 전하께 받으신 하사품을 쓰시려고요?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그럼 안 돼?”

    “당연히 안 되지요. 아까 상궁께서 말하지 않았사옵니까? 전하께서 승휘 마마께 특별히 하사하신 거라고요. 이는 불경을 저지르는 일과 같사옵니다.”

    정색하는 맹지의 모습에 두화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뭘 가지고 인사를 가? 난 값비싼 패물도 없는데.”

    “아, 음식으로 하시옵소서.”

    두화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맹지가 만든 정체불명의 음식을 가지고 웃전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는, 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참형을 받을지도 모른다.

    “좋아, 하면 음식은 내가 직접 할게.”

    “어찌 마마께서 하시옵니까? 그런 일은 소인이….”

    허리에 손을 얹은 두화가 맹지의 말을 강단 있게 잘랐다.

    “됐고! 지금부터 신선하고 좋은 재료들로만 챙겨서 서둘러 가지고 와.”

    “예.”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가는 맹지를 보는 두화는 모처럼 심기를 다잡았다.

    잠시 뒤 대비전과 중궁전 그리고 세자빈궁에 올릴 탕과 전을 만들었다.

    나갈 채비를 하던 두화는 혹 맹지가 들어올까 싶어, 침소 문을 바라보더니 작은 보따리를 냉큼 배에 감쌌다.

    승휘에 걸맞게 몇 겹을 입어야 하는 복색이라, 다행히 보따리를 숨긴 태가 크게 나지 않았다.

    ‘됐어. 지금 시각이면 다녀오는 중간에 할 수 있을 거야. 맹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만든 것들은 맹지가 들고, 곱게 의복을 입은 두화가 문 앞에 섰다.

    “승휘 마마께옵서 웃전에 후궁으로서 첫인사를 드리러 가시오니 문을 여시오.”

    낭랑하게 울리는 맹지의 말에, 동백궁을 지키던 자들이 문을 열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배에 꽉 동여맸지만, 그래도 혹 풀어져 여기서 들킬까 봐, 두화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문턱을 넘어섰다.

    ‘나왔다!’

    이 낮은 문턱을 넘기가 그리도 어려웠다.

    두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잠시지만 그와 있었던 모든 시간을 보낸 동백궁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 너머 뒤꼍에,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토굴을 향해 잠시 눈을 감았다.

    ‘저 또한 중전마마와 같은 마음으로 저하를 지키려 해요. 해서 저하를 지키기 위해 제 마음 따위 곱게 접어 평생 펼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부디 오늘 나갈 수 있게 도와주셔야 해요.’

    두화는 비장한 마음을 안고 대비궁부터 찾아갔다. 하나, 문 앞에서 몸이 불편하다는 연유로 차후 다시 오라는 말뿐, 문전박대를 당했다.

    불편한 자리에서 싫은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축내는 것보다야 오히려 잘 되었다. 오히려 맹지가 더 분통해 하며 중궁전으로 길을 틀었다.

    분명 중궁전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하겠거니 여겼던 두화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명에 잠시 놀라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들어가시지요.”

    궁인의 말에 두화는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소 떨어진 거리에서 중전께 예를 취하였다.

    “고개를 드세요, 오 승휘.”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던 두화는 낯설기만 한 제 성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맞다. 지금 난 오화연이지.’

    “이 사람이 불편합니까?”

    “…”

    뻔한 것을 왜 묻지?

    듣기 좋은 말로 웃전의 기분을 헤아려야 할까, 아니면 제 소신대로 말을 올려야 할까? 찰나 고민하던 두화는 이제 곧 궁을 나갈 테니 생각대로 말하자 싶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달싹이던 입술을 겨우 뗐다.

    “중전마마, 솔직히 말씀 올리자면… 그렇사옵니다.”

    버럭 호통을 치거나 무슨 말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기색이 없다.

    살짝 고개를 드니 중전의 표정이 참으로 오묘하기만 하다. 언짢은 기색보다는 뭔가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저를 빤히 보는 것이 아닌가.

    “역시 재미있어.”

    “예?”

    “승휘,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어리둥절하다.

    호되게 호통이라도 칠 줄 알았건만, 이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다. 그리고 중전은 좀 전과는 달리 정말 편한 사람을 대하듯 두화에게 하대하고 있다.

    “왜 그리 멍한 표정인 게냐? 설마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모르겠어서… 그러니까 모두 저를 성에 차지 않아 하시는 줄 알았사옵니다. 조금 전에도 대비궁 문턱조차 밟지 못하여, 솔직히 중전마마 또한 소인을 내치실 줄 알았사옵니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중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피식 웃으며, 곁에 있던 상궁에게 다가오라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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