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폭풍전야
한번 이리 과거를 회상하며 심기가 언짢게 되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괴로워한다. 옆에서 쭉 봐왔던 병길은 그것을 알기에, 감히 진여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쉬… 그만하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도련님.”
이렇게라도 진정시키지 않으면,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른다. 제 주인의 병적인 이런 모습을 아는 자는 병길만 빼고, 주인마님과 안방마님마저 가택에 감금되어 일체 외부와 접촉을 금한 지 꽤 되었다.
“…하아, 하! 난… 누구지?”
허탈한 한숨과 함께 힘겹게 내뱉어지는 숨소리만 들어도 병길은 가슴이 아프다.
“제 주인이십니다.”
“내 진짜 친모는 왜 하필 날 그 지옥으로 보낸 걸까?”
“고씨 가문이 지옥이었다면, 도련님은 그곳의 주인인 염라대왕이십니다. 그러니 그 불구덩이에서 절 구해내셨지요.”
힘을 갖게 된 순간, 제일 먼저 병길을 면천시켜 주었다. 천한 신분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병길은 죽을 때까지 진여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
그제야 불안하게 흔들리던 진여의 눈동자에 안정이 돌아왔다.
“그래, 난 너만 있으면 된다, 병길아.”
“예. 도련님은 제가 지켜드립니다.”
겨우 안정을 찾은 진여가 칠흑같이 펼쳐진 성 너머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 친모는 누굴까? 살아는 있는 걸까?”
지금 성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의 최고봉이 바로 고진여이니, 만약 친모가 살아있어 그 명성을 한 번쯤 들어봤다면 찾아왔을 것이다.
한데 여태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성라국 사람이 아닌 걸까?
이렇게 허한 생각이 가득한 날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더구나 저를 버린 친모가 이상하게도 그립다.
“제가 반드시 찾아드리겠습니다.”
“살아있다면… 한번은 만나고 싶구나.”
“…”
“가자, 이제부터 조금 서둘러야겠구나. 돌아가는 대로 대장군을 은밀하게 내 처소로 부르거라.”
진여의 날카로운 눈빛을 본 병길은 한시름 놓았다. 이성을 차리고 금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
***
이른 아침부터 사가에서 온 서찰을 받은 련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노라, 사가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그래 보이느냐?”
“예, 즐거워 보이셔서 소인도 덩달아 기분이 좋사옵니다.”
즐겁다?
어쩌면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당장은 아니지만….
“초아야, 아버님을 뵈어야겠다.”
“예, 연통을 넣겠습니다.”
***
설변도는 일전에 괴한의 침입에 가산이 털리고, 제 몸에 몹쓸 글귀까지 새겨져 망신스러워 전처럼 쉬이 밖을 나다닐 수가 없다.
더구나 왕의 명으로 그간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하는 데 있어, 그 첫 번째로 조사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럴 때를 대비해 이중장부를 철저하게 관리했고 빠져나갈 구멍 정도야 마련해 두어, 쉬이 풀려날 수 있었다.
하나, 제가 첫 번째로 지목받은 것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왕 앞에 나가 엎드려 울부짖었다.
-전하, 소신 이날 이때 화월국을 위해 헌신하였나이다. 부조리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주시옵소서.
아무리 울부짖음에도 왕은 별 대꾸가 없었다.
하여 미리 준비하여 가지고 간 작은 단도를 꺼내었다. 그제야 왕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변도는 사람의 눈빛이나 표정, 작은 행동으로도 그 사람의 심리를 들여다보는데 능통했다. 그랬기에 몇 차례 위기가 닥쳐왔을 때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해서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단도를 들어 제 심장 바로 옆을 찔렀다. 아무리 찔러도 손톱만큼만 들어가게 미리 장치를 해둔 단도였기에,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을뿐더러, 살짝 찔린 부분에 피가 흐르니 누구든 깜빡 속을 수밖에 없다.
가슴을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지니 그제야 왕이 다급히 다가와 안았다.
-어허, 좌의정 어찌 목숨까지 걸으려 하시오.
-전하, 소신은… 으윽, 결백하옵니다.
-… 믿겠소. 어의에게 이를 터이니 최상의 약재를 써서 치료받고 자택에서 푹 쉬시오.
껄끄러운 왕의 표정을 읽었지만, 설변도는 못 본 척 넘어갔다.
그렇게 해서 그날 이후 가택에서 여유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데 세상 무엇보다도 귀한 여식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위다.
사사로이 장인과 사위로 대화를 좀 나누려 해도 찬 바람 쌩쌩 부니 가까이할 수가 없다. 뭐, 세자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익히 눈치챘다. 한데, 아무리 제가 미워도 어디 한군데 미운 구석이 없는 그 여리고 참한 제 여식을 저리 박대할 수는 없다.
대비궁을 살살 구슬려 매달 합방을 강요하여도 어찌 된 것인지 도통 회임소식이 없다. 그러다 대비궁에서 날아온 서찰에 눈이 뒤집혔고, 바로 제 사병을 보내 제 여식의 눈물의 원흉을 제거하라 하였다.
한데 그 원흉을 세자가 궁에 들였다.
그것도 후궁으로 말이다.
어허,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구나.
‘나를 믿지 못해 늘 눈엣가시로 보는 왕이나 그 아들이나 모두 본보기를 보여줘야 정신을 차리지, 암.’
해서 화월국을 늘 탐하는 성라국과 손잡기로 하였다.
이 거래를 통해 이득을 꾀할 참이다.
성라국의 침범은 왕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될 테고, 전쟁에 출병할 병력이 부족하니, 제 사병이 병력에 크게 작용할 것이다.
물론 제게 손을 내밀 터이니, 제 것을 1할 내어주고 전쟁이 끝나는 대로 저는 3할을 받아 챙기면 된다. 무지한 백성들이 죽어 나가긴 하겠지만, 이만한 이득을 취하는 도박이라면 해 볼 만하다.
결국 처음에 그들이 원했던 대로 변방의 동보성과 수환성, 그리고 매년 화월국의 우수한 비단 500필과 향료 50단지를 내어주기로 했다고 병조판서가 전서구를 보내왔다.
비록 손해 보는 거래이긴 하나, 내어주는 것이 많은 만큼 훗날 백성들을 쥐어짜, 걷어 들이면 그만이다. 자세한 사항은 서둘러 도성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병조판서에게 듣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면 그만이다.
그러던 와중에 여식의 연통을 받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또 속앓이하며 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간 발걸음을 끊었던 궁이지만, 서둘러 입궁하였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기셨사옵니까? 어찌 소신을 찾으셨는지요?”
“아닙니다, 아버님.”
생각과는 다르게 미소까지 보여주는 여식의 모습에 설변도는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냥 아버님과 차 한잔 나누고 싶어 이렇게 들르시라 했습니다. 혹 예까지 오시라 하여 언짢으셨는지요?”
설변도는 두 손을 들어 휘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저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은 아닌가 걱정하였는데 좋아 보이시니 다행이다 생각했습니다.”
부녀의 모습을 본 초아는 기분이 좋아 냉큼 준비해 둔 다과상을 가지러 자리를 비웠다. 초아가 나가는 것을 본 련하가 찻잔을 내려놓고 작게 소곤거렸다.
“준비가 끝났다는 일은 언제 시작되옵니까, 아버님?”
“아마도 삭일 날 밤이 될 것 같사옵니다. 저쪽에서는 그리 소식을 전해왔지만, 워낙 불같은 자들이니 약조를 지키지 않을 수도 있어, 제 사병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아직 병판이 당도하지 않았기에 자세한 사항은 더 들어봐야 알겠지만, 욕심 많은 성라국 부마라면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하여 자신도 그에 대비하려 한다. 판이 커진 만큼 저와 손을 잡은 대비에게 알려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권력보다도 세자를 끔찍하게 아끼는 대비이기에, 전쟁이 일어나면 세자가 출병하게 되니, 분명 이번 일을 반대할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으나 그렇게 되면 저하께서도 출병하시게 되겠지요?”
“화월국 세자신데, 나라에 변고가 들었으니 당연히 출병하셔야지요. 아무리 전하가 막으려 해도 대신들이 장성한 세자 저하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설변도는 이제 화월국이 제 발아래 놓일 것에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리고 련하는 세자가 출병하여 궁에 없을 때, 총애하던 후궁이 처참한 모습이 되어, 그가 돌아왔을 때 그가 울부짖는 모습을 상상했다.
두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사람들처럼 웃으며 만끽했다.
***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으읏!”
두 사람의 신음이 동시에 터졌다.
“…아프십니까?”
“읏! 조금.”
두화는 바로 입에 손가락을 넣어 쪽 빨았다.
호들갑을 떤 맹지가 냉큼 천으로 두화의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누가 보면 칼에 베이기라도 한지 알겠다.
“이렇게 쪽 빨면 괜찮아. 뭘 또 그리 칭칭 감싸려고 해?”
“피가 계속 나지 않사옵니까?”
두 번째 손가락을 열심히 쪽 빨던 두화가 뽁 소리와 함께 손을 빼, 맹지에게 흔들어 보여주었다.
“봐, 피 멈췄지?”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시옵소서. 체통을….”
“알았어. 저하의 후궁으로 체통을 잘 지킬게.”
‘그래, 며칠 남지 않았지만 노력해 볼게, 맹지야.’
작은 천위에 열심히 뭔가를 수 놓았다. 어째 천 위에 놓인 수보다, 제 손가락을 찔러 붉은 수를 더 많이 놓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배우는 수이다 보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차라리 검이나 활을 잡는 편이 더 쉬운 것 같다.
“와, 다 되었다. 어때?”
천을 들어 보이자 맹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그랗긴 한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또 제가 모시는 웃전께서 실망할까 말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음,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하셨지요?”
“불두화꽃이야. 향은 나지 않는데 하얗고 동글동글하고 복슬복슬한 것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꽃이지.”
자세히 수를 들여다본 맹지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아, 불두화란 꽃이 이렇게 생겼사옵니까? 소인은 처음 보는지라… 수를 처음 하시었는데 잘하셨사옵니다. 그럼, 마무리해서 책상 위에 깔까요?”
“아니야. 이건….”
입꼬리를 올린 두화가 수 놓은 천을 입가에 대고 부끄럽다는 듯 웃는다.
‘한데 어찌 몸은 비트시옵니까? 겁나게시리.’
“그럼, 어디다 쓰시게요? 아, 저 자개장 위에 까실 겁니까?”
빛을 받을 때마다 오색으로 빛나는 자개장을 가리키며 맹지가 웃었다.
“아니, 저하께 드릴 손수건이야.”
“예, 저하께… 예?”
진심으로 놀라 되물었다.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린 맹지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수 놓인 천을 다시 꼼꼼히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꽃보다는 그냥 동그란 무언가다.
뭔지 모를 무언가!
‘이런 것을 선물로 드린다니, 무조건 말려야 해.’
“마, 마마. 음, 원래 첫 작품은 자신이 꼭 가지고 있어야 하옵니다. 처음이라 시간도 정성도 배로 들인 것이니 얼마나 이것이 마마께 귀중하겠사옵니까?”
‘이걸 선물로 드리다간 분명 있던 총애도 떨어져 나갑니다, 마마.’
좋았어.
웃전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에둘러 말도 참 잘했다 싶다.
엉망인 수를 보면 마마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물론 세자의 성정이 이런 것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예쁘고 완성도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이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던 맹지는 그만 두화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래? 음… 그러니까 더 저하께 드려야겠다. 내 정성이 들어간 거니까.”
“아! 마, 마마.”
그냥 중도에 도와드릴 것을, 극구 괜찮다고 하는 웃전의 말에 취미로 하시려니 했지. 이리 만든 것을 저하께 드릴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정말 요리보고 조리 보고 객관적으로 봐도 선물로서는 엉망진창인 자수다.
“참, 맹지야!”
“예, 마마.”
“저하께옵서 오늘 밤에도 오시겠지?”
“예, 오신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럼, 술상을 좀 준비해줄래. 난 씻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