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9)화 (49/96)

49. 진여의 과거

한편 그 시각 성라국의 국경을 지키는 만서성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화월국 국경을 넘어간다.

분명 양쪽 병사들이 국경지대를 지키고 서 있건만, 누구도 국경을 넘는 자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바람에 흔들리는 횃불의 은은한 불빛이 성 외곽을 희미하게 비춘다. 성벽 꼭대기에 올라도 짙은 어둠 때문에, 화월국 국경을 넘어가는 자들이 보이지도 않건만 그곳을 빤히 응시하는 자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곁에 있던 자가 허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대감, 이번 일은 자칫 위험이 따르옵니다. 그러잖아도 호시탐탐 대감을 끌어내리려 하는 영의정과 병조판서가 대감의 뒤를 캐고 있사옵니다.”

“안다, 병길아.”

천천히 몸을 돌이킨 진여가 자신을 염려하는 사내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 오늘의 자리에 어찌 올랐는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것이니라. 그만한 준비 하나 안 했겠더냐? 최근 영의정과 병조판서의 만남이 자주 있다지?”

“예.”

“영의정과 병조판서가 날 제거하려 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거둔 아랫것들에게 먼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라.”

“…!”

병길이 고개를 들자, 진여는 그 턱을 감싸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렸다.

“날 막을 자, 누가 있을까? 난 더 많이, 그리고 저 멀리 이 땅이 끝나는 모든 곳을 정복해 우리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것이다. 하여, 고씨 가문의 장자인 내가 죽은 진결이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드릴 것이야.”

“대감, 지금도 충분히… 읏!”

턱 쥔 손에 우악스레 힘준 진여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광기가 도는 그 눈빛에도 병길은 익숙한 듯 의연했다.

“아니! 충분하였다면 어머니께서 내게 이러지 못하시지!”

눈에 핏발이 서린 진여는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어머니의 품, 따뜻하고 맛난 것들은 모두 제 것이었다. 한데 지금은 아우에게 빼앗겨 버렸다.

“도련님, 또 여기 계십니까? 이러다 마님이 보시면 또 한 소리 듣습니다.”

이제 겨우 여덟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안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병길아?”

“예, 도련님.”

“이상하지?”

“뭐가 말입니까?”

진여는 안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엔 내가 들어가야 하는데, 왜 아우가 생긴 뒤로는 난 못 들어가는 거냐?”

“그, 그건… 소인 같은 놈이 뭘 알겠습니까?”

“너까지 날 업신여기는 거냐?”

병길을 올려다보는 진여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도, 도련님! 당치도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놈의 주인은 도련님이십니다.”

“…진결이가 밉구나. 미워 죽겠다.”

진여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었다. 병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냉큼 진여의 입을 막고는 가택의 구석으로 데려갔다.

반쯤 무릎을 꿇고 앉은 병길이 진여를 올려다봤다.

안쓰러워 죽겠다. 진여보다 다섯 많은 병길은 진여가 업둥이로 들어왔을 때부터 보아왔다. 안방마님의 회임과 동시에 진여는 그전에 누리던 모든 것들을 배 속 아우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제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되십니다.”

“왜? 내가 이 집 업둥이라서?”

“…도련님, 알고 계셨습니까?”

“죄 날 보면 뒤에서 수군거리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내가 업둥이여서 친아들인 진결이만 어머님이 예뻐하는 거라는데.”

“아니 어떤 썩을 것이 그런 말을 합니까?”

진여는 저 대신 화를 내주는 병길의 목에 매달렸다.

“내가 친아들이 아니라서 어머님이 미워하시는 걸까?”

“아휴, 아닙니다. 작은 도련님은 아직 어리시니 큰 도련님보다 더 신경을 쓰시는 겁니다. 도련님 어릴 적을 다 본 접니다. 도련님 어릴 때도 안방마님, 저러셨습니다. 매일 이곳에서 도련님과 안방마님의 웃음소리가 담을 넘어갔습니다.”

“정말?”

“그럼요. 하니, 너무 서운하다고 생각 마시고, 그럴수록 학문에 더 매진하십시오. 훌륭하게 자라시면 어머님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실까요?”

늘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수십 개의 눈이 예전과 달리 힐끗거리고, 잘한다고 칭찬만 하던 입들은 이제 뒤에서 수군거리기 일쑤다. 어린 진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그날부터 진여는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다.

일곱 해 탄일이 되었을 때, 태어난 아우를 본 적이 없어 너무 궁금하여, 안방에 들어간 적이 있다. 몇 개월이나 지나서야 아우를 본 진여는 작은 아이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때 진결이 뒤집기를 하려 시도하다가 팔이 꺾인 채로 엎어졌다.

어린 진여가 보기에 아파 보여 팔을 빼는 과정에 안방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네 이놈, 뭐 하는 게냐 지금?”

호통과 함께 제게서 아우를 낚아챈 모친이 위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니, 전 아우가 궁금하여….”

“시끄럽다. 누가 여기 들어오라 하였느냐?”

“전 그게 아니라… 어머니.”

“게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이것을 끌어내라.”

하인의 손에 끌려 나온 진여는 그날 밤,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당장 내치세요. 전, 정말 아까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대감.”

“어허, 아무리 그래도 어린 진여가 아우를 해치려 했겠습니까, 부인.”

“아니에요. 그 눈을 보셨어야 해요. 진결이 팔을 꺾고 목을 조르려 했다니까요.”

아닌데, 그게 아닌데.

진여는 해명하고 싶어 안방으로 걸어가다가 흘러나오는 부친의 말에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이제부터 진여는 안채 출입을 금하시오. 그럼 되겠소?”

“그걸로 안 됩니다. 당장 내보내세요. 업둥이를 저 정도 키웠으면 할 도리 한 겁니다.”

“부인, 진여가 처음 들어왔을 때 기뻐하지 않았습니까? 진결이 생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어여삐 여기던 부인이 아닙니까?”

“네, 그랬지요. 한데 배 아파 낳은 진결이 보면 진여에게는 더는 눈길조차 가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부정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음.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하인으로 둘 수도 없어요.”

“어찌해서요?”

“이미 호적에도 올랐고, 고씨 가문의 장자라고 다들 알고 있는데, 이제 와 업둥이라고 내치면 가문과 내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겁니다. 하니, 부인이 조금만 참으세요.”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어찌합니까?”

“아랫것들에게 단단히 일러둘 테니, 그만하고 잡시다.”

결국 그날 모든 것을 알게 된 진여는 며칠을 꼬박 앓다가 일어났다. 오직 병길만이 제 곁에서 간호하고 있었다.

몇 해를 그리 지내다 보니 밝고 잘 웃던 진여의 성격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 아랫것들의 시선을 피해 안채에 몰래 들어와 어린 아우를 엿보다가 가곤 했다.

진여의 나이 12살 때가 되었을 때, 어린 진결이 혼자 놀다가 어찌, 어찌 자신이 지내는 골방까지 오게 되었다.

“형아?”

“…”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어린 진결이 더는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제 것을 빼앗아 간 작고 못된 요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괜히 엮여서 모친에게 호되게 혼이 날까 싶어 냉큼 골방의 문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그 후로 진결이는 곧잘 찾아와 진여를 형이라 불렀다. 그런 진결을 보는 진여의 눈빛이 어딘지 묘하게 바뀔 때쯤, 부친의 퇴청이 늦어지고, 하필이면 모친께서 감모에 걸려 안채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유모에게 맡겨진 진결이가 혼자 저를 찾아온 것이다.

“형이랑 놀고 싶어?”

“응, 응.”

“그래, 놀자.”

밖으로 나온 진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진결의 작은 손은 잡았다. 진결은 겁도 없이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별채로 가는 후원 쪽에 작은 우물이 있다.

별채 근처로 간 진결은 재차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숨바꼭질하자.”

“응, 형아.”

“네가 숨어. 내가 술래할게.”

“응.”

진여는 부러 다정한 목소리로 우물을 가리켰다.

“저기 아래 숨으면 누구도 못 찾을걸?”

“와아, 진짜? 아버지도?”

“그래, 아버지도.”

“우웅? 근데 형아가 말해줬으니까 형아는 알잖아.”

“나?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난 모르겠는걸.”

웃으며 뒤도는 진여의 입엔 미소가 사라졌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셀수록 멀어지는 인기척에 진여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열다섯, 열여섯….”

-풍덩!

떨어지는 소리에 이어 허우적대며 자맥질하는 물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질 않는다. 제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곳에 있는 우물, 그리고 그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쉰다섯, 쉰여… 여섯….”

꽤 많은 수를 세고 나서야 진여는 몸이 떨렸다.

‘진결이, 내 아우.’

그러다 모친의 품에서 웃고 있던 진결이와 저를 보고 윽박지르던 모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네가 나쁜 거야. 너만 없었어도 어머닌 내게 소리 지르시지도 않고, 여전히 날 예뻐하셨을 거야. 난 몰라. 난 모르는 일이야.’

그대로 그곳을 벗어나 냉골이나 다름없는 골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 후 병길이 짚신을 삼기 위해 짚을 한가득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도련님, 저녁은 자신 거죠?”

“…”

“도련님, 추우세요? 제가 나가 군불이라도 지필까요?”

대답이 없자, 진여가 자는 줄 알았던 병길은 밤이 늦도록 볏짚을 비비고 꼬아 삼는다.

다음날, 이른 새벽 별채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가택을 찢듯이 울렸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진여는 가만히 일어났다.

곁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난 병길이 골방문을 열었다. 다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는 하인을 붙잡았다.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아침부터?”

“…큰일 났어. 이게 다 무슨 사달이래! 얼른 가 봐야 해.”

진여를 힐끔거리던 하인은 별채가 있는 방향으로 황급하게 뛰어갔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병길이 신을 신고 따라갔다.

진여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의복을 갖춰 입었다.

느긋하게 밖을 나서는데, 하인이 진결을 안고 마당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그걸 본 모친은 비명과 함께 혼절하였다. 축 늘어진 진결을 채 보지 못한 부친도 그만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졌다.

얼마 안 가 진결의 장례가 치러지고, 진여는 골방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고씨 가문의 장자이자 외아들로 돌아왔다.

하나, 친아들을 잃은 모친은 진여가 장성할 때까지도 늘 차갑게만 굴었다.

-네놈이 내 아들을 잡아먹은 거야. 네놈 때문이야.

-넌 내 아들이 아니야!

-널 이 집안에 들이지만 않았어도!

-네가 죽었어야 했어. 내 아들 대신에!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는 말에도 진여는 모친을 기쁘게 하려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고, 매일 웃는 연습을 했다.

아무리 저주의 말을 퍼부어도 웃는 절 보고 웃어주지 않을까 하여, 끊임없이 모친을 보며 웃었다.

아픈 과거를 떠올리던 진여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병길은 진여가 말하지 않아도 상처받은 그의 어린 시절을 알기에, 그저 눈을 감고 그의 노기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이성을 차린 진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허망한 듯한 한숨을 흘린 진여가 병길의 어깨를 무겁게 잡고는 몸을 돌이켰다.

“모두 쉬쉬하며 숨기던 사실을 우연히 알고 난 뒤에도 난, 어머니와 아버님께 버림받지 않으려 서책도 더 읽고, 아우인 진결이에게 좋은 형이 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어머님과 아버님은 진결이에게만 애정을 쏟으셨지.”

“도련님.”

진여는 자신의 손을 들어 요리조리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날 쳐다보지도 않으셨어. 그 모든 사랑이 다 내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열 살 때 진결이 때문에 난 이 새끼손가락이 아직도 펴지지 않는 병신이 되어버렸는데도, 어머님은 내게 화만 내셨지.”

아우를 처음 본 날 이후 또 보고 싶어서, 안채를 기웃거리다가 모친이 없는 틈에 대청마루에 잠들어 있던 아우의 얼굴을 만졌다.

그때, 모친이 제 손을 꽉 쥐고 밀치는 바람에 대청마루의 갈라진 틈에 새끼손가락이 끼어, 잘못된 것이다.

울컥 치솟는 분노와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이 충돌하여 진여는 제 가슴을 퍽퍽 쳐댔다.

“고씨 가문의 진짜 장자인 진결이가 태어났으니, 업둥이인 날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될까 싶어 쉬쉬했던 게지. 큭큭, 하하하! 어머님과 아버님은 차라리 날 쫓아내셨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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