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8)화 (48/96)
  • 48. 그를 위해 연기해야 해.

    한편 세자빈 련하는 초아를 기다리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내, 분명 오늘까지 여인의 도리에 대해 필사해 오라 했거늘, 감히 명을 어겨? 저하의 총애를 받으니 내 명이 우스웠던 게지. 오냐, 어디 내 앞에서도 그리 행동해 보아라. 내, 오늘은 네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홀로 분을 터뜨리는데 동백궁에 갔던 초아가 돌아왔다. 부산스럽게 침소에 들어온 초아가 신이 나 떠들기 시작했다.

    “마노라, 소인이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지만 련하는 초아의 뒤를 보고는 두화가 보이지 않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초아를 질책하였다.

    “데려오라던 것은 어찌 오지 않고, 너 혼자 온 것이야?”

    “그것이 끌고 오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옵니다.”

    “뭐야, 왜?”

    “지금 고 여우 같은 후궁 마마는 지금 동백궁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말에, 초승달처럼 아름답게 휘어진 련하의 눈썹이 꿈틀 치켜 떠졌다.

    “어찌하다가? 아니, 누가 감금했다고 하더냐?”

    “비녀 하나 주고 뭘 물어보고 싶어도, 동백궁엔 맹지 고것 말고는 허드렛일할 나인 하나 없으니 알 길이 없지 않사옵니까? 하여 동백궁을 둘러싼 병사들에게 물어보는데 이게 또 다들 ‘물러가시오’라고만 하니….”

    “해서 아무것도 알아 오지 못한 것이냐?”

    “아휴, 제가 또 누굽니까? 헤헤.”

    히죽 웃은 초아가 살살거리며 종알댔다.

    “물러가라고 막아서도 제가 마노라의 명으로 후궁 마마를 데리러 왔다고 그냥 막 문을 열려고 하니까, 지키던 병사가 저하의 명이니 누구도 동백궁을 드나들 수 없다고 성질을 부리지 뭡니까!”

    “그 말은?”

    “예. 그러니까 소훈 마마가 저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여 지금 갇힌 것 같사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꼼짝없이 그 폐가 같은 곳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는 말에 련하는 그간 제 속을 꽉 막고 있던 것이 내려가는 듯싶었다.

    “마노라, 암만 생각해도 고 여우 같은 것이 주제를 모르고 총애 좀 받는다고 건방지게 굴다가 그리된 것 같사옵니다. 아주 그냥 제 속이 다 시원하옵니다.”

    초아의 말에 눈을 흘기면서도 련하의 입꼬리가 즐거운 듯 올라간다.

    “누가 들을라.”

    “감히 세자빈 마노라께옵서 계신 곳에 누가 쥐새끼를 풀었겠사옵니까?”

    “암만 그래도 항시 입을 조심하거라.”

    “예, 명심하겠나이다. 한데 마노라께옵서도 기분이 한결 풀리시지요?”

    “뭐, 내 아랫사람이 갇혔다니 썩 좋지는 않다만….”

    말끝을 흐리는데 어찌 입꼬리는 올라가는지 싶다. 괜히 멋쩍어 헛기침한 련하는 가체를 매만졌다.

    “오면 혼쭐을 내주려고 기다렸건만, 감금되었다니 하는 수 없구나. 이번만은 내 너그러이 용서하여 시일을 늦춰줘야지. 그럼, 오늘은 일찍 침수 들어야겠구나.”

    바로 옆 꽃잎이 수 놓인 창을 톡 열어젖혔다.

    먹구름마저 끼어 밤하늘이 컴컴하다.

    “예. 소인이 냉큼 족욕 하실 물 대령하고, 금침 깔아드리겠나이다.”

    “천천히 하거라. 왠지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 않은 밤이구나.”

    ***

    한편 그 시각, 눈꺼풀을 천천히 든 두화가 맥없이 일어나 앉았다.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촛대 앞에 세자가 술을 따라 들이키고 있다.

    언제 온 걸까?

    ‘나, 언제 금침 위에 누웠지?’

    “감모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맨바닥에서 잠든 것이야?”

    “…저하.”

    여전히 술잔을 채우며 돌아보지 않는 그다.

    두화는 가만히 그의 등을 보다가 손을 뻗어 본다.

    이 거리에서는 그가 닿지 않는다.

    ‘그래, 이래야 해. 저하도 나도 살려면 이리 닿지 말아야 하는데….’

    괜히 또 눈물이 핑 돈다.

    행여 그가 볼까 몸을 돌려 눈물을 훔쳤다.

    순간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에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아!”

    “내게서 등 돌리지 마라.”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점점 더 허리가 옥죄어온다.

    ‘… 술을 드실 만큼 그리 괴로우세요? 혹 제가 떠날까 괴로우신 겁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 하는 말은 이내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금침 위로 톡 떨어졌다.

    그리고 바로 등 뒤에서 전해지는 축축함이 무엇인지 알기에 두화도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흡!”

    그렇게 두화는 벽을 보고 울고, 그런 두화의 등에 얼굴을 묻은 자한 또한 울었다.

    사내의 우는 소리를 처음 듣는다.

    소리 죽여 우는 그 눈물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말 한마디 없어도 등을 적시는 그의 눈물이 그리고 참는 듯 흐트러진 숨소리가 제 가슴을 무너뜨린다.

    지금도 이렇게 가슴 아프고 힘든데, 이제 정말 그를 위해 두화는 연기를 해야 한다.

    ‘은애하지 않아서 저하를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이니, 부디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마세요. 차라리 저하의 마음을 저버리고 떠난 매정한 년이라 절 욕하시면서 사세요, 저하.’

    단 며칠이라도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젠 궁을 나가야 하는 이유가 그냥 집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둘 다 살기 위해서로 바뀌었다. 그래서 더 힘들고 괴롭지만,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이곳이 비워지는 그때 그가 용서치 않는다고 하여도 그때까진 철저하게 연기를 할 생각이다.

    허리를 옥죈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천천히 그 손을 풀고 몸을 돌려 그와 마주했다. 붉어진 눈을 보니 목이 메고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두화는 부러 더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어찌 우세요, 아이처럼?”

    그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훑고는 그 눈가에… 볼에 입맞춤하였다.

    “…!”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며 속삭였다.

    “안아 주세요, 저하.”

    두 사람은 서로가 눈물 흘린 것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자한은 동백궁을 폐쇄하고 그녀를 감금하다시피 하여 두화가 저를 원망하고 화가 난 줄 알았다.

    제 마음도 모르고 제게서 벗어날 궁리만 하는 그녀가 괘씸하기도 하거니와, 정말 제 품에서 벗어나 이 궁을 훨훨 날아가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불안하기만 했다.

    하여 자시(23~01시)임에도 동백궁을 찾았다.

    불 꺼진 방을 보고 돌아가려 하였으나, 제가 나간 뒤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맹지의 말에 조용히 침소 문을 열었다.

    들어가는 그 근처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촛대에 불을 켜자, 아침에 얼핏 보았던 구겨진 금침이 그대로임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을 보자 뭔가가 가슴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그녀를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움막보다야 이곳이 훨씬 나을 터인데 왜 자꾸 저를 떠나려 하는지 서운하고 속이 상했다.

    또 번번이 백도헌 그자와 엮이는 것이 화가 났다.

    누군가를 향해 이토록 분노한 적이 없었다.

    하나, 맹지에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 땐 백도헌 그자의 의중을 단번에 파악했다. 하여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감히 제 후궁을 궁에서 빼내려고 하다니!

    좌의정한테도 이정도의 살기를 드러낸 저가 아니었거늘.

    아예 동백궁에 가두면 백도헌 그자와 만날 일도 없거니와, 두화의 마음도 동백궁 담벼락을 넘어가지 않겠지. 잠시 미련한 생각에 그녀를 감금했다.

    침소 문을 열고 들어온 맹지에게 술상을 보아오라 했다. 잠시 후 술상을 가지고 온 맹지에게 더는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자라고 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구겨진 금침을 반듯하게 펴고, 그 위에 그녀를 바로 눕혔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눈가를 보니 또 언짢은 기분이 올라온다.

    한잔 술에 궁을 나가고 싶어 하는 그녀를 이해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또 금세 그리되면 백도헌 그자와 엮일 테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부아가 치민다. 그렇게 어지러운 생각을 안주 삼아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음에도 취하질 않는다.

    그렇게 술병의 술이 떨어질 때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녀를 보자 그녀가 저를 피하듯 등을 돌린다.

    괘씸하다.

    하나, 괘씸한 마음 이전에 그녀에게 버림받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가 끌어안았다.

    분명 화가 나는데, 왜 그녀와 이리 닿아 있는 순간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세자로서 사내로서 누군가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 등 뒤에 얼굴을 묻자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취해서 그런 것이겠지. 그래, 취기 때문에 그런 게야.’

    붉어진 제 눈에 입맞춤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저를 원망하고 미워할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보다. 가슴속에서 치솟는 울컥함에, 안아달라고 손을 뻗는 그녀를 온 마음을 다해 안았다. 아니,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안았다.

    “저 때문에 울지 마세요, 저하.”

    제 얼굴에 닿은 그녀의 손길에 자한은 그대로 그녀의 어깨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어깨에 입맞춤하고 속삭였다.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운 것인지… 이런 내가 한심하지 않으냐?”

    두화는 말없이 그의 등에 손을 올리고는 천천히 토닥토닥 위로하듯 두드렸다.

    그 밤, 자한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생전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

    안개에 가려 그 얼굴조차 희미하게 보이는 누군가가 저를 불렀다.

    -아가, 우리 세자.

    -누구… 어마마마이십니까?

    두리번거렸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어미가 우리 세자에게 참 미안하구나.

    뭐가 그리 미안하다 하는 것일까?

    모후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 자한은 안개를 손으로 휘저으며 앞으로 나간다. 하지만, 딱 처음 그거리만큼 벌어져 모후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 붙이를 조심하거라.

    -예?

    잘 들리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지만, 여전히 가까워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모후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점점 더 사라지고 있었다.

    -어마마마! 보고 싶사옵니다. 제발 소자를 두고 가지 마시옵소서, 어마마마!

    허공을 휘젓는 두 손에 온기가 느껴지고, 누군가가 저를 애타게 부른다.

    헉, 숨을 토하며 깨어난 자한은 제 손을 붙들고 걱정하는 두화가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 깨고도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아니… 처음으로 모후를 뵈었다.”

    “예?”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 두화는 조심스레 그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키었다.

    “한데 어찌 그리 소리를 지르셨는지요?”

    “모후를 뵙는 것이 처음인데 모습이라도 뵙고 싶었거늘… 안개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한 것 같은데 멀어서 들리지 않았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던 걸까?’

    두화는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

    함께해서는 안 될 인연과 함께하는 지금, 위험하니 피하라고 자식의 꿈에 나타난 걸까?

    생각이 많아지니 얼굴이 굳어진 모양이다.

    “꿈은 내가 꾸었는데 어찌 네 얼굴이 심란한 것이야?”

    “아, 아니에요. 저하.”

    두화의 볼을 만지던 자한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조금 더 자자꾸나.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인데 나 때문에 깼구나.”

    “예.”

    자한의 품에 얼굴을 묻은 두화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차라리 뒤꼍의 토굴과 승하하신 중전이 남긴 유지를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을까?

    ‘아니야, 그리되면 부모의 생을 갉아먹은 것이라 자책하며 괴로워하실 거야.’

    하아,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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