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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월국애사 (47)화 (47/96)

47. 감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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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끄무레한 빛이 격자무늬 창살 사이를 타고 들어와 금침 위까지 침범한다.

품에 잠든 두화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자한은 그녀의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렸다.

‘어여쁘구나, 내 작은 꽃.’

마음에 품은 여인과 밤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이토록 달콤하고 가슴이 벅찬지 몰랐다. 그녀를 안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이마 위로 콧잔등 위로 그리고 입술 위로 입맞춤하는 동안 두화는 인상을 찌푸리기만 할 뿐,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아비보다 늦게 일어나는 것이냐?”

“…죄송해요, 저하. 졸려서 눈이 떠지지 않아요.”

게슴츠레하게 한 눈은 감은 것인지, 뜬 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피식 웃은 자한은 작게 벌룽대는 그녀의 콧방울이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그냥 해 본 말이다. 은애하는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리 좋은지 몰랐다.”

부드럽게 이마 위로 내려앉는 입맞춤에 두화가 눈을 살포시 감았다가 떴다.

“낮이 지나 올 것이야. 그때까지 뭐라도 먹고 좀 쉬어라.”

“저하.”

“응?”

달곰하고 그윽한 그의 목소리에 두화는 망설였다.

“…”

두화는 잠시 그를 보다가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몰래 궁을 나가는 것보다 그에게 허락을 받고, 사라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내 입을 뗐다.

“저하, 이리 초야도 치렀으니 잠시 집에 다녀와도 되겠지요? 아버지도 그렇고, 다른….”

“불허한다.”

단박에 거절하는 그의 목소리는 전날 무섭도록 차갑게 말하던 그때와 같았다.

“…!”

두화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리고는 일어나 앉았다.

“…잠시만 다녀오는 것도 안 돼요?”

그도 일어나 앉아 매섭게 변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조금 전까지도 달곰한 눈웃음까지 주던 그였는데, 지금은 북풍 설한보다도다 더한 차가움이 그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두화의 눈을 빤히 응시하던 그가 일어나, 이내 곤룡포를 손수 몸에 걸쳤다.

그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두화는 기다렸다.

어찌하여서 잠시도 허락하지 않느냐, 되묻고 싶지만, 순식간에 변해버린 차가운 모습에 그 어떤 애원도 소용없으리란 걸 두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침소 밖으로 나서던 그가 멈칫 섰다.

“전에도 말하였었다. 난 두 번 말하지 않는다고!”

‘어찌 그리 갑자기 차가워지신 거예요, 저하?’

그의 말이 왜 그렇게 서운한지, 금세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두화는 흔들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 짜냈다.

“…연모한다고 하셨잖아요? 그저 잠시… 아주 잠시만 집에 다녀온다는데 그것도 안 된다니요? 절… 연모하는 것이 맞아요?”

흔들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곤룡포 소매 속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은 그 모습에 연연하여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아직 궁 밖은 그녀에게 위험하다.

곧 받게 될 후궁 첩지보다도 더 확실한 뭔가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그녀의 목숨은 그저 한낱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다. 대비궁과 좌의정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다.

하나, 그 이유보다도 전날 보았던 백도헌과 그녀가 함께 있던 모습이 제게 또 다른 불안감을 가져왔다.

당장이라도 두화가 제품에서 훨훨 날아 어디론가 숨을 것만 같다.

그러잖아도 백도헌 그자가 몇 차례나 그녀를 찾기 위해 저를 찾아왔었던 최근의 일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살갑게 대화하던 모습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널 걱정하면서도 널 빼앗기기 싫은 날 미쳤다 하여도 할 수 없다.’

“사내는 다 그렇다. 나라고 다르겠느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그녀를 아프게 하고 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넌 이미 내 여인이다. 더욱이 저리 초야의 증거가 남았으니, 이젠 궁을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느니. 어디 멋대로 나가 보거라. 내가 나서기도 전에 내명부 법도에 따라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하니 언감생심 궁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이불을 감싼 채 벌떡 일어난 두화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

“하아! 예, 전 저하의 여인이지요. 저의 모든 걸 저하께 드렸으니까. 그럼, 방금 사내는 다 그렇다라고 하셨는데, 그건 무슨 뜻이에요?”

싸늘한 그녀의 말에 심장이 욱신댄다.

“말 그대로다. 내 여인이 되기 전까진 뭔들 못 해주겠느냐? 하나 이제 내 것이니 굳이 지난날처럼 네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결국 돌아서 두화를 차갑게 바라봤다.

“…!”

기어이 두화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는 그녀보다도 그것을 매정하게 지켜만 봐야 하는 자한 자신이 더 괴롭기만 하다.

“그리 울어도 소용없다.”

“…이런 분이셨어요?”

그 한마디에 그녀의 심경이 다 담겨 있다.

찰나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는 그녀를 보며, 자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더는 그녀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성큼 다가가 끌어안았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난 이런 사람이고 체통 없다 하여도 할 수 없다. 세자고 뭐고 내겐 너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데 넌 나 아닌 다른 사내와도 아주 즐겁게 웃고, 금방이라도 내 품에서 날아가 그자에게 갈 것 같더구나. 네가 뭔데!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리도 날 불안하게 만드느냐?”

“…!”

순간 두화는 자신이 궁을 나가려 도헌과 계획한 것을 들킨 것 같아 심장이 마구 뛰었다.

“지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모든 것이 널 위해서니….”

잠시 그렇게 안고 있던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멍하니 있던 두화는 그래도 그에게 모든 사실을 말할 수 없지만, 그를 그만큼 마음에 담았으니 한 번 더 설득하려고 서둘러 의복을 갖춰 입고 막 침소에서 나가려던 참이다.

닫혀있는 동백궁 입구 문 뒤로 그가 누군가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명하는 것이 들렸다.

“동백궁 수규인 맹지 외엔 누구도 들이지 말고, 누구도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접근하는 자는 추포하고, 내 허락 없이 함부로 이 문이 열려서는 아니 될 터!”

그 소리에 놀란 두화가 신도 신지 못하고 달려가 문에 매달려 주먹으로 두들겼다.

“저하, 저하 거기 계시지요? 방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목소리를 들었을 터인데,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저하, 이러지 마세요. 왜 절 가두시는데요? 이 문 좀 열어보세요. 네?”

한참을 그리 애타게 그를 불러봐도 그 어떤 답도 들을 수 없다. 아니, 바로 문 너머 그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겠다.

“저하….”

두화는 불안했다.

이렇게 되면 며칠 뒤 도헌과 만나기로 약조한 날,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문 앞을 서성였다.

그때 문이 열리는 특유의 소리가 났다.

두화는 냉큼 열린 틈으로 몸을 비집고 나가려 했지만, 이내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버렸다.

“비켜요, 나가야겠으니!”

“아니 됩니다, 저하의 명이 있었사옵니다.”

“내가 저하께 말해 볼 터이니, 이 창 좀 치우고 비키라고요!”

두화가 애원하고 화를 내도 병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지친 두화가 숨을 헐떡이며 뒤로 한 발 물러서자 그제야 맹지가 빼꼼 안으로 들어왔다.

맹지는 운 듯 보이는 눈과 흙투성이인 맨발의 웃전을 보고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그 자리에 털썩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 소인이….”

“왜 그래? 일어나.”

“소인이 저하께 고하여 이리된 것입니다. 하오나 전 정말 마마를 이렇게 감금하실 줄 몰랐사옵니다.”

바닥에 엎드려 울며 고하는 맹지의 말에 두화는 헛숨을 토해냈다.

“…뭐라고 했기에 저하가 이렇게까지 하신 건데?”

“전날 소인에게 서북쪽 중문까지 보초 서는 병사의 수와 위치를 알아 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백 장군님을 만난 뒤 갑자기 그리 하명하시니 좀 불안했사옵니다.”

“해서 저하께 다 말했어?”

원망스레 맹지를 바라봤다.

“…예. 하오나 소인이 먼저 아뢴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마마께서 시키신 일을 수행하려고 서북쪽으로 향하려면 세자궁을 지나가야 하옵니다. 거기서 저하와 딱 마주쳤는데 저하께서 대뜸 낮의 일을 고하라 하셨습니다. 해서.”

그래서 그렇게 간밤, 같은 마음인지 확인하며 불안해한 건가?

“소인은 혹 백 장군님과의 만남이 마마께 해가 될 듯싶어, 그냥 세자빈궁에서 돌아오는 것까지만 말씀 올렸더니, 갑자기 역정을 내시며 백 장군님을 언급하셨나이다. 더는 거짓을 말하면 엄하게 벌하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저하께옵서 역정을 내시면 너무 무서운지라….”

‘그랬구나. 이 아이가 말하지 않았어도 장군님과 만난 것을 아신 게야.’

헛웃음을 지은 두화가 비척대며 침소로 들어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구겨진 금침과 간밤 초야를 치른 붉은 자국이 그 위에 수 놓여 있었다.

두화는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그가 저리 역정을 내며 저를 가두려 하는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궁을 벗어나려는 것을 알고 그러신 거야.’

해서 저와 초야를 치렀음에도, 제가 궁에서 나가려고 하니 도로 불안하였던 거지.

“저하….”

하나 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만큼 제 마음도 그 못지않다.

너무도 사랑하기에 곁에 있고 싶지만, 저로 인해 같은 날 태어난 그가 위험해질 수 있다. 세간을 속여가며 이때까지 살아온 그에게 자신과는 만나선 안 될 운명 같은 운명이라고 알려주면 과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아들을 살리기 위해 왕은 같은 날 태어난 아이들을 무참히 죽였고, 또 자신의 명줄을 줄여가며 아들의 불운을 막기 위해 모후는 죽음까지 불사했다는 사실을 그가 알길 원치 않는다.

꺽꺽 숨을 토해내며 울던 두화는 그대로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는 구겨진 금침만 멍하니 바라봤다.

같은 날 태어난 아이가 죽든 혹은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란, 승하한 중전의 유지처럼 저는 반드시 마음이 아파도 그를 위해 떠나야 한다.

한데 이젠 이곳에 갇혔으니 방도가 없다.

***

-아무래도 경비가 삼엄한 것이 이상합니다. 분명 전날까지도 동백궁을 지키는 자가 몇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동백궁 곳곳을 다 막아버리고 그 둘레를 적지 않은 세자익위사들을 세워 경비가 강화되었습니다.

갑자기 날아든 소식통에 느낌이 좋지 않다. 일랑은 삭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 그 밤 무영과 함께 목숨을 걸고 궁에 몰래 잠입하였다. 어둠을 틈타, 빠르고 은밀하게 동백궁으로 향하였다.

궁 내 경비는 크게 변화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동백궁에 접근할수록 일랑의 얼굴은 굳어졌다.

동백궁 주위로 숨은 자들이 대여섯, 그리고 동백궁을 에워싸고 지키고 있는 자가 십여 명이다. 도무지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이제 어찌합니까, 방주님?”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저리 경비가 삼엄하니, 두화도 홀로 궁을 나오지 못했던 게야. 진즉 정보원들이 쓰는 암호를 가르쳐 줄걸. 내 잘못이로구나.’

정보원들이 쓰는 암호까지 가르쳐주면 왈가닥 같은 여식이 더 설치고 다닐까 싶어 염려스러워 부러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가르쳐 주었다면, 궁 안에 있는 정보원을 만나 어떻게 해서든 나왔을 터인데… 그랬다면 저리되지 않았을 텐데….

일랑의 한탄에 무영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저 때문입니다. 제가 두화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게 왜 네 탓이겠느냐? 상대가 상대인만큼 쉬이 나서지 말고 지켜만 보라 했던 내 잘못이지. 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세자가 두화 곁에 맴돌 때, 잠시라도 두화를 국경지대 분타로 보낼 것을.”

하나, 이미 늦었다.

여식이 어떤 상황에서 저리 감금되어 있어, 지키는 자들 몰래 구해낼 재간이 없다.

만약 저들을 뚫고 구해낸다 해도 그다음엔 궁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최근 저를 은밀히 수소문하는 왕의 그림자가 움직이기에, 제 존재가 왕 앞에 드러날 것이다. 그리되면 저로 인해 두화가 제 여식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목숨 또한 장담하지 못한다. 당장 구해내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분노로 주먹을 부르르 떤 일랑은 일단 철수하기로 한다.

“계속 지켜보라고 해. 경비가 언제까지 저리 삼엄하지는 않을 것이다. 느슨해진 그때 다시 온다.”

‘궁 안 정보원을 좀 날랜 자로 배치해 둘 것을.’

상황이 이리되니 모든 것이 후회스럽고 본인의 잘못인 것 같다.

“예, 방주.”

이제 제 여식은 정보를 전하는 이에게 맡겼다.

아주 잠깐이라도 경비가 느슨해진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두화야, 그때까지만 기다려라. 이 아비가 꼭 데리러 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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