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6)화 (46/96)
  • 46. 초야

    자한의 고백을 듣고 이제는 저도 그를 마음에 담았다. 한데 지금 다른 사내의 마음을 듣고 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냉큼 다른 말로 돌려보려 했다.

    “참, 스님은 어찌 되셨는지 아셔요?”

    “…잘 지내신다. 한데 두화야?”

    “예?”

    “지금 예서 지내는 것이 행복하냐?”

    ‘네가 행복하다 하면 내, 더는 네게 마음 주지 않으마. 하나, 그렇지 않다면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이곳에서 내보내 줄 것이다.’

    “모르겠어요. 먹는 것도 잠자리도 모두 호화로워서 세상 행복해야 하는데 그냥 좀 답답해요. 움막에도 가고 싶고, 아버지도 보고 싶어서 나가고 싶지만, 저하 말씀으로는 궁 밖은 지금 저한테 위험해서 나가면 안 된다고 하시네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나가고 싶은 마음과 그를 연모하는 마음이 충돌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토굴에서 본 내용 때문에 마음은 더 심란해지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해서 답답한 마음에 산보를 나갔지만, 운이 없는 건지 또 세자빈과 마주치고 말았다. 책잡힐 일 없이 예도 올리고, 말대답도 하지 않았는데도 1각 정도를 여인의 도리에 대해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는 한번 들은 그 내용을 그 자리에서 읊어보라고 하여, 더러 틀리더라도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한데도 세자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일까지 여인의 도리를 전부 필사해 가져오라고 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들이받고 그대로 궁을 나가고 싶지만, 삼엄한 경계에 나가기도 전에 붙잡혀 웃전에 불경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벌 받을 것이 분명하다.

    자고로 어떤 일이든 성급하게 해서는 될 것도 안 된다고 부친이 그러셨다. 하여 속으로 부처님을 수백 번 찾으며 용케 참아냈다.

    가뜩이나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인데, 세자빈이 아주 그냥 더 꽉꽉 틀어 막아주고 있다. 세자빈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맹지에게 하소연하며 동백궁으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 앞길을 막았다.

    짜증이 나 고개를 드니 빙그레 웃고 있는 도헌이 아닌가.

    밖에서는 저하와 같이 귀찮게 굴어 원수 같더니, 궁 안에서 보니 반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데 지금은 반가운 마음과 별개로 조금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나가고 싶다면 도와주마.”

    가뜩이나 갈팡질팡한 복잡한 마음인데 그가 제 마음을 흔들어놨다.

    “나갈 수 있어요? 경비가 삼엄한데….”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내 도와주랴?”

    잠시 자한을 떠올려 고민하지만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차라리 나가자. 그래야 저하도 살고… 나도 살아.’

    도헌은 그녀에게 한가지 방책을 알려주었다.

    “닷새 후 삭일이 되면 달이 그 모습을 감추게 되니 그걸 이용하자꾸나. 될 수 있으면 어둠 속으로 움직이되, 궁 문 말고, 서북쪽 중문께로 오거라. 중문을 수비하는 병사를 매수해 놓을 테니, 해시(21~23시)에 나오거라.”

    “정말 나갈 수 있는 거죠?”

    “문밖에 내가 기다리고 있으마.”

    “네, 알겠어요. 장군님.”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하는 그녀의 정수리 위로 작은 티가 붙어 있는 것을 본 도헌이 그것을 떼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손길이 머리에 닿자 놀란 두화가 뒷걸음치려 했다.

    “이거.”

    제 손길에 놀라는 모습에 조금은 서운하기까지 하다.

    “아, 전 또 뭐라고….”

    “한데 아까부터 걷는 것이 좀 이상하구나.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아, 별것 아니에요.”

    네가 별것 아니라 하여도, 널 보는 난 이젠 버릇처럼 네 모든 것이 가슴에 스며들어 별것이 되는구나.

    “아닌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다 커서 좀 맞았어요. 한데 좋은 약 바르고 했더니 이젠 좀 걸을 만해요.”

    딴 사람 이야기하듯 말하는 두화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헌이 뒤늦게 인상을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 몰랐는데, 이정도로 때리고 싶었던 걸 보면, 제가 들어와서 싫은 분 아닐까요? 어쩜, 아버지한테도 그렇게는 맞아본 적이 없는데, 회초리 열 대가 부러질 만큼 맞는 건 정말 다신 경험하기 싫네요.”

    맞을 때를 회상한 듯 두화는 끔찍하다는 듯 진저릴 쳤다.

    “대비마마시더냐?”

    “에이, 대비마마나 중전마마한테 맞았으면 좀 덜 억울하게요? 내 또래한테 맞으니 아주 조금 성질은 나더라고요.”

    혀를 내두르며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하지만 듣고 있던 도헌은 화가 났다.

    풍속범을 잡을 때 보니 빼빼 마른 두화를 보고 먹을 것을 많이 챙겨줘야겠다 생각했다.

    ‘이리 연약한 아이가 뭘 잘못하였다고, 저 가는 종아리를 절룩거릴 정도로 때린단 말인가.’

    “어? 그런데 지금 화나셨어요?”

    “아니다. 한데 세자빈은 듣던 소문과는 다른 분이구나.”

    “어찌 아셨어요?”

    “저하의 후궁을 대비마마나 중전마마가 아닌 이상 누가 감히 훈육하겠더냐?”

    씁쓸하게 입술을 늘린 두화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나 소문과는 다 다르답니다. 비단 그분만 그러시겠어요? 저도 꽤 아리땁고 조신하다고 개방에 소문이 나서 사내들이 줄을….”

    “흠, 흠.”

    배시시 웃으며 자화자찬하는 두화를 보며 도헌이 크게 헛기침으로 일관하였다.

    “어? 지금 그 헛기침 뭡니까, 장군님? 저도 뭐 그런 소문이 있는데 지금 못 믿겠다는 얼굴이잖아요?”

    허리춤에 손을 올려 따지고 드는 걸 보니 여기가 궁이 아닌 밖 같다.

    좋은 것을 걸치고 아무리 웃고 있어도 어딘지 얼굴에 그늘져 있어 보이던 그녀가, 이제야 제가 알던 두화로 돌아온 것 같아 도헌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가 한창 즐겁게 무르익어가며 동백궁으로 향하고 있을 때, 다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두화에게 줄 작고 흰 개망초를 꺾어 가지고 오던 자한은 서슬 퍼런 시선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부터 족히 1각은 지날 시각 내내 즐거워 보인다.

    전쟁의 살인귀라 불리는 백도헌을 처음 보았을 때 자신의 사람으로 삼고 싶었고, 동시에 적이 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데 저번부터 느낀 것이지만, 저자 역시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두화를 바라본다.

    “거슬려.”

    잠시 후 자한이 사라진 그곳에는 꽤 많은 개망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

    어둠이 내리자 두화는 맹지에게 대충이라도 지키는 자의 위치나 수를 알아야 들킬 확률이 적기에, 서북쪽 중문까지 가는 길목 곳곳에 보초를 서는 병사의 수와 위치를 알아 오라고 시켰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맹지가 이내 그녀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동백궁을 벗어났다.

    이후 맹지를 기다리던 두화는 간혹 들리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대로 몰래 나가도 되는 것일까?

    한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체한 것 같지?

    “저하한테 죄짓는 거 같아.”

    처음 스치듯 지나치며 그의 돈주머니를 슬쩍할 때부터, 그가 고운 의복을 사주었을 때, 또 심술인지 화가 나서는 홀딱 젖은 저 혼자 남으라 했을 때, 물고기 잡아 같이 먹고, 뜨거운 국밥을 코까지 박으며 먹었던 일, 그 이후 모든 일이 한순간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 일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난다.

    알게 모르게 저 또한 그를 너무 많이 가슴에 차곡차곡 채워 새겨넣었나 보다. 아니, 넘치도록 채웠는지, 이제 나가면 그를 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목이 멜 정도로 벌써 그리워진다.

    ‘어쩌자고 이러니 정말.’

    하지만 가슴이 아파도 나가야 한다.

    그가 주는 사랑만으로도 살 수 있을 테지만, 만약 승하하신 중전마마가 남긴 말처럼, 자신이 나라의 운명을 손에 쥔 저주의 씨앗이라면 그에게 해가 될 것이다.

    그동안은 미신을 믿지 않은 저였지만, 가슴에 누군가를 품으니 그런 것들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를 사랑하니까, 그를 위해서 하루라도 더 멀어져 그의 눈에서 사라져야 한다. 비록 평생 놓지 못할 마음이라도 그래야 한다.

    ‘그래, 그리하는 것이 맞는 게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턱에서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손으로 훑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요란스럽게도 난다.

    “맹지니?”

    한데 맹지치고는 인기척을 내는 발소리가 어수선하기만 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두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동백궁 입구로 향했다.

    끼익.

    문을 열자 흑색 곤룡포를 입은 넓은 등이 가로막고 있다.

    ‘저하!’

    두화는 조금 전, 고민하며 생각하던 것을 들킨 사람처럼, 놀라 멈칫했다.

    바닥을 끄는 작은 발소리에 그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이러다가는 며칠 뒤 못 나갈지도 몰라. 저하에게 들키면 안 돼.’

    죄지은 것처럼 울려대는 심장을 손으로 눌러 애써 진정시킨 두화가 앞으로 한 발짝 옮겼다.

    하지만!

    “나오지 말아라. 내가 들어갈 터이니.”

    어딘지 차갑게 말한 그가 몸을 돌려 성큼 걸어 들어온다.

    발자국을 더 떼려던 두화는 그가 다가오는 움직임에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저하 어쩐… 앗!”

    성큼 걸어온 자한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들어서매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저하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제 성난 발걸음에 숨차하며 따라오는 그녀가 묻는다.

    하나, 자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화를 안아 들었다.

    놀라 목을 잡은 두화가 불안한 듯 또 물었다.

    “저, 저하. 혹 제가 뭘 잘못했어요?”

    여전히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침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료 위로 그녀를 다소 사납게 내려놨다. 제가 왜 이러는지 연유를 몰라 불안하게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마주했다.

    “어째서냐?”

    순간 차갑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피부는 물론 뼛속까지 얼려버리는 기분이다. 그 짧은 하문에 두화는 모든 걸 들킨 것 같아 말을 더듬었다.

    “…뭐가요?”

    “너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라 하지 않았느냐? 한데 왜!”

    부릅뜬 눈동자 속에 당황한 제 모습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왜 이러세요? 말씀해 주셔야 알지요, 저하.”

    “…대답해다오, 나와 같은 마음이라 하였던 것은 거짓이었더냐?”

    여전히 차갑게 내리깔린 목소리지만, 어딘지 애달프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럽지만 그의 이상한 행동과 애잔하게 느껴지는 그 눈빛 때문에, 두화는 궁을 나가기 전까지만이라도 그에게 거짓 없는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

    “…진심이에요.”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흠칫 놀라는 듯 그의 손이 경직된 듯싶었지만, 천천히 그 손을 끌어 제 가슴 위로 옮기었다.

    “저하만 보면… 아니, 이제 저하만 떠올려도 심장이 이리 제멋대로 울려요. 이렇게 느껴지잖아요. 어찌해야 제 마음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으실까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그래도 불안하다.”

    불안해하는 그의 마음이 찰나 제 마음에 닿았던 걸까.

    두화는 고개를 올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놀란 듯한 그였지만, 이내 그 입맞춤에 응했다. 두 사람의 불안하던 숨결은 어느새 한 마음처럼 하나 되었다.

    “이대로 초야를 보내도 되겠더냐?”

    원하는 간절한 눈빛에 두화는 그의 등에 손을 둘러 감쌌다.

    불안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는 생각 못 할 정도로 지금은 오로지, 그의 마음에 또 제 마음에 서로를 원하는 것만 담기로 했다.

    ***

    자연스럽게 떠진 눈에 두화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위가 어두운 것을 보니 아직 날이 밝아오려면 좀 더 있어야 한다.

    고개를 다시 돌리니 자한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간밤의 일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초야를 치른 것이 떠오르자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남녀의 합방이 이런 거구나. 입맞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제 숨소리에 혹 그가 깰까 봐 조바심이 난다.

    가만히 잠든 그의 얼굴 옆선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것이 믿기지 않는다.

    “왜 자지 않고 사람을 빤히 보는 것이야?”

    “예?”

    순식간에 몸을 모로 누운 그가 두화를 바라봤다.

    그녀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선 눈꺼풀만 깜빡인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리 잘난 사내가 지아비가 되니 좋으냐?”

    ‘지아비?’

    설레면서도 곧 그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금세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음, 그리 파고들면 아무리 나라도 사내로서 견디지 못한다.”

    “…그냥 잠시만. 이리 잠시만 있어 줘요,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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