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5)화 (45/96)
  • 45. 도헌과의 재회

    ‘왕이로구나!’

    왕이라면 가능하다. 중전에 오른지 5년 만에 얻은 왕자이니 왕자를 살리려고 빼돌리고, 다른 아이들은 저주를 핑계로 혹은 왕자의 앞날에 불운을 끼치지 않게 몰래 모두 죽였다면!

    ‘세상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불안하게 마구 뛰었다.

    당시 가문에 닥친 화가 두화에게는 목숨을 구할 기회였던 것.

    자칫 가문이 멸문당하지 않았다면, 저 또한 세상에 빛을 보자마자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신기를 받으셨다면 자신의 죽는 날도 미리 짐작하였을 텐데, 설마 소문처럼 자결하셨을까?”

    “거기까지는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그 궁인 말로는 승하하실 때까지도 손톱 밑에 흙이 묻어 지저분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산후풍 때문에 늘 추워하시긴 했지만, 그 증상이 누구나 겪는 정도라 했사옵니다.”

    산후풍도 자결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뭘까?

    두화는 문득 다시 한번 토굴에 있던 두루마리와 주변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벌떡 일어나자 맹지가 덩달아 일어섰다.

    “어디 가시려 그러시옵니까?”

    “뒤꼍 토굴에. 아, 망보고 있다가 저하 오시면 알려줘.”

    “아휴, 아직 낫지도 않은 다리로 거길 왜 또 가시옵니까?”

    맹지의 잔소리에도 두화는 횃불을 손에 들고 토굴로 향했다.

    넝쿨을 제치고 토굴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처음 봤을 때처럼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냥 지나쳐 나가려는데 두루마리가 놓인 작은 책상이 살짝 기우뚱해 보인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살펴봤다.

    “그냥 책상인데 왜 삐딱하… 어?”

    자세히 보다 보니 그제야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꾸로 들어 책상다리를 바닥에 툭 치니 조금 짧은 쪽 다리가 부서져 떨어져 나간다. 부서진 다리 안쪽이 비어있었다.

    손바닥 위에 놓고, 톡톡 치니 빈 곳 안쪽에서 뭔가가 톡 떨어진다. 둘둘 말린 서신을 묶은 작은 방울이 영롱한 소리를 냈다.

    횃불을 벽에 기대어 놓고 방울을 풀었다.

    딸랑!

    왠지 음침한 이런 곳에서 듣는 것치고는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진다. 서신을 펼치자 정갈한 글씨가 눈을 사로잡았다.

    -아주 운이 좋다면….

    “승하하신 중전마마가 남기신 유언인가 보네.”

    서신을 들고 두화는 잠시 눈을 감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를 취했다. 그러고 나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아주 운이 좋다면 우리 왕자가 이것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 죄 많은 어미가 하늘에 바라고 또 바라 기도하였다.

    “저하를 싫어하신 게 아니네.”

    -널 가졌을 당시 화월국 전체를 덮는 푸른빛의 태양이 이 어미를 집어삼키는 태몽을 꾸었단다. 아주 오래전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 저주받은 날의 모든 진실을 널 갖은 그날 꿈으로 보았단다.

    “아!”

    두화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과거를 보았으나, 이는 어찌 보면 예지몽과도 같은 것이기에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지. 하여 처음엔 두려웠고, 그다음엔 하늘이 미웠고, 그리고 내 운명이 서글펐단다.

    나라의 국운을 결정지을 저주의 씨앗인 널, 이 나라 중전인 내가 어찌 낳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토록 회임하신 걸 아시고 힘들어하신 거구나.’

    -해서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까 두려웠다.

    이 죄 많은 어미가 앞날을 볼 수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단다. 하여 중전에 오른지 5년 만에 내게 온 네가 저주의 씨앗이라는 말을 감히 전하께 알리지 못하였단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두화는 앞서 맹지가 말한 뒤죽박죽 하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었다.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중전마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날을 보고 홀로 견뎌내며 괴로워하던 중전마마가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내게 온 소중한 너라도, 나라의 국운을 뒤흔들 저주의 씨앗을 세상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것뿐이었다. 하여 너 홀로 보내기 죄스러워, 이 어미도 같이 가려 몇 번이고 죽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신이 만류하더구나.

    “…!”

    -네가 없다 하여도 결국 닥칠 것은 닥친다고. 애먼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말이다. 해서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럼에도 두려웠다. 앞으로 닥칠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데 어찌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느냐?

    읽어 내려갈수록 빨리 뛰는 심장과 별개로 마음이 아파졌다.

    -애먼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신의 말씀대로 이 어미는 이제 마음을 바꿨단다. 아직 네가 어미의 배 속에 있지만, 네 앞을 막는 저주의 불운은 이 어미가 모두 지고 가마.

    이 부분을 읽던 두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려 작은 함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저주한 듯한, 제웅과 손발톱, 그리고 머리카락까지 들어있어서 처음 그것을 봤을 때 몹시도 기분이 언짢았었다.

    한데 그것들이 모두 타인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승하하신 중전마마가 본인을 저주하여, 자신의 명줄을 내어주는 대신 저하의 불운을 안고 가신 듯싶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해?’

    갓 태어난 아이를 위해 홀로 견뎌야 했을 그 시간이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불쌍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내가 꿈에서 본 대로라면, 저주받은 날에 태어난 생명은 분명 다음날 태양을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니라.

    “하아, 알고 계셨던 거야.”

    -하나, 왕자의 불운은 내가 짊어지고 가니, 아무리 성덕이 높은 전하라 하여도 우리 왕자를 해하지 못하게 보이지 않는 분들이 지켜주실 게다.

    이 부분은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죽은 끔찍한 일들이 전하의 의중일 터인데, 세자 저하는 왕의 아들이라서 산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산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한데?’

    -왕자야, 네가 약관이 되는 해, 운명은 또 한 번 바뀌게 될 것이야. 만나지 말아야 할 세 개의 인연은 우리 왕자를 아프게도 또 피를 보게도 그리고 비로소 액운을 끝낼 수 있게도 할 것이야.

    “하아, 다행이다!”

    하지만 그다음 구절을 읽는 두화의 표정을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만다.

    -세 개의 인연 중, 왕자와 만나지 아니하여도 극강의 흉살을 지닌 자가 존재하니, 이 어미는 그것이 제일 불안하구나. 그것을 막지 못하면 그 흉살이 결국 왕자와 화월국을 집어삼킬 것이야.

    흉살을 지닌 자!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두화는 마저 읽어 내려갔다.

    -세 개의 인연 중, 다행스럽게도 하나의 길한 인연이 왕자의 앞길을 탄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나, 국운이 바뀔 수도 있는 인연들이니, 만에 하나 왕자의 탄일과 같은 날에 태어난 아이를 만난다면 반드시 죽여야 네가 사느니, 죽일 수 없다면 피하기라도 하여야 한다.

    손에서 서신이 바닥으로 힘없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만나지 말아야 할 세 개의 인연 중 하나가 바로 나인 것을.’

    저도 모르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두화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나가 죽어야만 살 수 있는 독 같은 운명인 줄도 모르고, 이미 그 마음이 넘치도록 커져 버린 것을 이젠 어찌하면 좋단 말이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

    한편 도헌은 두화가 걱정되어, 자객의 공격을 받은 그 날 이후 다리 밑 움막으로 찾아가 봤지만, 그곳에서는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두화를 데려간 이가 세자이니, 혹 궁으로 데려왔을까 싶어 두 번이나 입궁하였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세자와 만날 수가 없어 두화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왠지 세자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

    한데 전날 편전에서 거론되어 논의하던 대상이 바로 두화였다고 들었다. 그제야 그녀가 동백궁에 있다는 사실에 찾았다는 기쁨과 동시에, 꼭꼭 감추어 이젠 정식 후궁으로 만든 세자가 원망스럽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직접 물어봐야 답답한 가슴이 숨통을 트일 것 같다.

    곳곳에 보는 눈이 있어 바로 동백궁으로 향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다. 한데 동백궁은 너무도 조용하여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퇴궐해야 하는데 얼굴조차 보지 못하니 낮은 한숨만 나온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다시 와야겠구나.’

    돌아가려던 그때 반대쪽에서 절뚝이며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가 보인다.

    궁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오는 여인, 한눈에 봐도 전과 확연하게 다른 차림새지만 여전히 궁 밖에서 보던 그녀다.

    이야기할 때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거나 손동작을 크게 하자, 곁에 있는 궁인이 난처해한다. 그 모습에 그녀가 해맑게 웃는다.

    그녀에게 성큼 걸어 그 앞에 섰다.

    “우와, 장군님?”

    궁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두화는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도헌은 반가운 그녀를 보고도 이젠 전처럼 편히 대할 수 없음에 씁쓸했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오래간… 만입니다.”

    “어찌 공대하세요?”

    “…저하의 후궁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색한 그와의 인사에 두화는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네요.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첩지를 받은 것이 아니니, 예전처럼 편히 대해주세요, 장군님.”

    두화는 도헌에게 시시콜콜 말하지 않고 둘러댔다.

    “그러마.”

    두 사람이 인사를 주고받을 때조차 맹지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두리번거리며 날을 세웠다.

    “아, 참! 맹지야, 이분은 백 장군님.”

    “…예? 설마 살… 아니, 화월국의 영웅이자 자랑인 그 백 장군님이요?”

    화들짝 놀라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맹지가 신기하여 물었다.

    “응. 한데 장군님을 그리 불러?”

    맹지는 부끄러운지 도헌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두화에게 속닥이면서도, 그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그럼요. 우리 궁인들한텐 정말 신비로운 분인걸요. 우락부락한 장군님들 틈에 준수한 외모의 장군이 있는데, 생긴 것과는 달리 그 손속에 정을 두지 않으니 그 손에 검이 춤을 추어 적을 섬멸한다!”

    우러러보는 그 마음이 눈에 다 드러난다. 풀린 눈은 여전히 장군을 힐끔대며 배시시 웃는다.

    “저분은 우리 궁인들 틈에서는 영웅이자 흠모하는 분이옵니다. 저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 한데 너무 잘생기셨사옵니다.”

    살인귀라 소문난 장군을 직접 보다니, 맹지는 소문 때문에 두려우면서도 훤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금세 헤벌쭉해진다.

    엉뚱한 맹지 덕에, 잠시 웃은 두화가 도헌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천천히 동백궁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맹지도 뒤에서 따라갔다.

    “어떻게 지내셨는….”

    “그날 다친 것은 어떠….”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은 웃음이 터졌다. 서로 먼저 말하라고 양보하다가 또 웃고 만다.

    “그날 다친 곳은 괜찮으냐?”

    “예. 뭐, 저하께서 좋은 약도 주시고 비싼 옷에 평생 먹어 보지도 못한 보양식과 음식까지 주셔서요. 이것 보셔요, 며칠 되었다고 벌써 얼굴에 살도 올랐다니까요.”

    ‘장군님도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웃으며 말하는 두화를 보며 도헌은 괜히 마음이 쓰리다.

    ‘염려했던 것보다는 잘 지내 보이는구나.’

    “…다행이구나.”

    “한데 궁엔 어쩐 일이세요?”

    후궁 첩지까지 받게 되었으니 벌써 세자의 여인이 되어 버린 것이냐고, 정작 묻고픈 말은 입 안에서 맴돌 뿐 할 수가 없다.

    “그날 사라져서 걱정이 되었다. 예 있는 줄도 모르고 몇 날 며칠 찾았다.”

    “정말요? 제가 뭐라고 그리 신경을 쓰세요?”

    두화는 괜히 웃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그러게 말이다. 네가 뭐라고 날 이렇게 신경 쓰게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말이다. 넌….”

    말을 끊은 그의 표정이 어딘지 차가우면서도 쓸쓸해 보인다.

    “…?”

    “내게 넌 그냥 두화다. 그래서 네가 신경이 쓰인다 나는.”

    ‘내게 넌 저하의 후궁이 아닌, 두화다.’

    도헌의 말에 두화는 문득 자한의 얼굴이 떠올라, 도헌과 눈을 마주친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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