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4)화 (44/96)
  • 44. 동백궁의 비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윗전의 하문에 맹지는 작게 소곤댔다.

    “예. 당시 세수간 궁녀였던 이 씨는 특히 이곳 동백궁을 드나들며, 중전마마의 세숫물과 목욕물 그리고 매화틀 시중을 담당했다고 하옵니다.”

    세자의 생모인 옛 중전께서는 늘 인자하시고 온화하신 성품에, 누가 보더라도 기품있는 미소로 주위 사람들마저 따뜻한 미소를 짓게 했다고 한다.

    그런 중전마마가 회임한 순간부터 뭔가에 쫓기듯 불안해하시고, 때로는 정말 애처롭게 몇 시진을 울었다고 한다. 더구나 간혹 스스로 자해까지 하니, 배 속 아이가 잘못될까 봐 왕이 크게 염려했다고 했다.

    한번은 그런 중전의 기분전환을 위해 왕이 작은 연회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하나, 연회 중 능윤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 하다가 넘어지자, 희빈 박 씨에게 큰소리로 질책했다고 한다.

    -어미가 되어 어찌 한눈을 파는 것인가? 장차 세자가 될 능윤군에게 작은 흠집 하나 생기지 않게 조심해야지!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처음 보는 중전의 호통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뱃속 아기씨가 원자라면 세자가 되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건만 어이없는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중전을 바라만 봤다고 한다.

    이내 진노한 왕의 일갈에 모두 자리에 엎드려 그 명을 받들었다고 한다.

    -회임한 중전이 예민해져 그런 것이니, 방금 들은 이야기는 모두 잊거라. 만에 하나 이 자리에서 들었던 허무맹랑한 소리가 궁을 돌고 돌아 과인의 귀에 들릴 땐, 예 있던 너희 모두의 목이 달아날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니, 함구할지어다!

    진노한 왕은 중전을 거칠게 끌고 연회장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왕의 진노함이 얼마나 컸던지 그날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중전마마의 배가 점점 불룩하게 불러옴에 그 증세가 더 심해져, 보는 이마다 중전마마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회임하여 예민해져 그런 것이겠거니 하여 안쓰럽게 보던 왕도 더는 지쳤는지, 아예 출산할 때까지 중전마마를 동백궁에 감금했다고 한다.

    “회임한 사람을 여기에 가두었다고? 아니, 여기서 저하를 낳으신 거야?”

    “듣기론 그렇사옵니다. 한데… 여기서 단순히 출산만 하신 곳이 아니더라고요. 왜 오랜 시간 동안 폐쇄되어 방치되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왜?”

    정신은 이상하여도 결국 달은 찼고 산달이 되어 머지않아 출산하였다. 그토록 염원하던 왕자 아기씨가 중전에 오른지 5년 만에 태어나니, 나라에 또 이런 경사가 없다 하여, 왕이 몇 날 며칠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라 하였다.

    “근데 이상하게도 저하께옵서 태어나신 날이 그날이 맞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어, 다들 쉬쉬하며 말을 아꼈사옵니다. 뭐, 궁 안에서야 매년 행해지는 4월 초파일 다음날이 저하의 탄일인가 보다 했는데… 이상한 소리를 들었사옵니다.”

    “무슨 소리를?”

    “그게 그러니까 저하께옵서 태어나시기 전날, 멀쩡하던 하늘이 잿빛이 되어 음산했고, 해가 푸르게 빛나서 그렇게 해괴할 수가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죽은 물고기가 강을 가득 메우고, 머리 둘 달린 송아지까지 태어나고 아무튼 하늘이 노하시어 화월국에 저주가 내린 날이라고 궁말에 사는 이들이 말했사옵니다.”

    맹지가 말한 화월국의 저주가 내린 날, 바로 그날은 두화가 태어난 날일이기도 하다.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비밀이다.

    두화는 제 이야기도 아닌데 긴장하였다.

    “…그런 날이 있었대? 근데 그게 왜 저하 탄일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게 그러니까… 귀 좀.”

    혹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맹지가 작은 소리로 두화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그날 태어난 아이들이 죄 죽었다고 하옵니다.”

    “뭐?”

    “하늘이 노해 화월국에 저주를 내린 일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라고 하옵니다. 전설에 의하면 저주가 내린 날, 태어난 아이의 운명으로 나라는 길과 흉으로 갈라진다고 하더라고요. 오래전 화월국에 괴이한 현상이 일어날 당시 그날에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죽여 후환을 없애라는 국무의 간청을 듣지 않은 왕과 대신들이 훗날 크게 후회했다고 하옵니다.”

    그날 태어난 아이의 운명 때문에 나라가 길과 흉으로 갈라진다고?

    ‘하지만 방금 맹지가 분명 그날 태어난 아이들이 죄 죽었다고 했어, 그럼…’

    ‘나 때문에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소리야? 하아,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날 태어났던 아이 중 하나가 장군이 되었는데, 공주를 연모하여 혼사를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결국 그 아이가 화월국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하옵니다. 다행히도 화월국을 지탱하는 백, 설, 천 세 가문 덕분에 당시 왕실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옵니다.”

    천 가문!

    입 밖으로 낼 수 없지만, 두화는 자신의 가문이 다른 이의 입에 오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우며 충성을 다한 가문인데, 간신들의 세 치 혀에 어찌 천 가문을 없앴는지 마음 같아서는 왕이 있는 편전으로 당장이라도 달려가 묻고 싶다.

    하나,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만 그럴 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당장 달려가 물은들, 천 가문의 후예라 하여 내 목숨만 버릴 뿐, 천 가문의 신원이 복권될 일 같은 것은 없을 게 뻔하잖아.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버지께서 진즉 나서셨겠지.’

    저 또한 이런 기분인데 가슴속에 꽁꽁 묻어둔 부친의 심정은 어련하실까?

    가문도 모친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채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

    헤아릴 수 없는 분노가 얼마나 가슴을 에워쌌을까?

    “그런 해괴한 일이 또 발생했으니, 조정에서 말들이 많았겠지요.”

    “설마… 조정에서 그날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 한 거야?”

    “그걸 잘 모르겠는게 저하께서 태어나기 전이니, 왕께서는 그런 명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마치 짜 맞춘 것처럼 그날 태어난 아이들이 죽임당한 것 같다고 이상하다 했습니다. 어떻게 그날 태어난 아이들만 죽었는지 말입니다.”

    만약 정말 누군가가 그날 태어난 죄 없는 아이들을 은밀하게 죽인 것이라면, 너무도 무서운 일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명령한 자도 그걸 실행한 자도 참으로 무섭구나.”

    “저도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사옵니다. 아무 죄 없는 핏덩이들을 어떻게 죽일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

    “참, 그리고 그 이 씨가 분명 그 저주가 내린 날에 동백궁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잠시 세답방에 다녀온 사이, 동백궁에 있던 자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옵니다.”

    모두 사라졌다?

    어떻게?

    “그게 말이 돼? 그럼, 울던 아기도 사라졌어?”

    “예. 아예 아무도 없던 곳처럼 해산한 흔적도 없었다고 하옵니다. 해서 뭔가 두려운 생각에 그 길로 자신이 있던 세수간으로 가, 어릴 적 별성마마(천연두)에 걸리면 열에 아홉은 죽는 무서운 역병을 떠올렸답니다.”

    “별성마마?”

    “예, 살려고 발버둥 친 것이지요. 부러 발진을 만들기 위해 상한 음식을 먹고는 온몸이 붉게 부르트고 가려워하니까, 다음날 쫓겨나듯 궁에서 나갔다고 하옵니다.”

    순간의 기지로 이 씨라는 궁인은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안 그랬다면 세답방에 갔던 잠깐 사이 해산한 흔적이며, 사람까지 어찌 다 사라졌듯 이 씨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으니 중전마마께서 해산했다는 소린데… 중전마마와 해산을 돕던 어의들이나 궁인들은 대관절 다 어디로 갔을까?”

    “다른 이들은 모르겠고, 중전마마께서는 괴이했던 그다음 날 이곳 동백궁에서 저하를 낳으시고는 석 달을 넘기지 못하시고 승하하셨다고 하옵니다. 더러는 산후풍 때문에 그렇다고 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다음날에 이곳에서 저하를 낳으셨다고? 근데 이상하네. 5년 만에 원하던 아이를 낳으면 기쁠 텐데 왜 자결했다는 소문이 났을까?”

    맹지는 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더니 작게 소곤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승하하신 중전마마 외가 쪽이 오래전 대대로 국무를 지낸 가문이라고 하옵니다. 본디 천한 무당과는 달리 귀족 가문에서 신의 계시를 받는 유일한 가문인지라 궁중의 병굿도 하고, 왕실에 축원과 기도를 할 만큼 그 명성이 대단했다 하옵니다.”

    “신기하네. 보통은 무당이나 그런 일을 하지, 귀족은 체면 때문에 숨기려 하지 않나?”

    “그도 그럴 것이 신의 계시를 받고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단명하거나 불운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니, 살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요. 아무리 지금은 국무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 가문에서는 대대로 여전히 ‘신기’라 하는 그 기운이 대물림되었나 봅니다.”

    “설마?”

    ‘신기 때문에 자결했다고? 아니, 그건 좀 이상하잖아. 저하에게서 뭔가를 본 것인가? 그래서 애초 저하를 가졌을 때부터 자결하려고 했던 건가?’

    믿기지 않는 듯 두화가 고개를 뒤로 내빼며 놀라 했다.

    “중전마마께서 회임 당시 울면서 허공에 대고, 누군가에게 빌다가 화도 냈다가 헛소리를 그렇게 했다고 하옵니다. 특히 아이를 낳기 전부터 궁녀 누구도 뒤꼍엔 오지도 못 하게 하고 한 시진씩 뭘 그리하고 오는지 온몸이 흙투성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흙투성이라고?”

    뒤꼍… 흙투성이라….

    그럼, 설마 토굴을 만든 것이 승하하신 중전마마야?

    맹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예. 궁말에 있던 또 다른 궁인이 말하길, 중전께옵서 해괴했던 그다음 날 홀로 왕자를 낳으셨다고 하는데,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좀 그렇긴 하네. 중전마마이시면 분명 산실청이 설치되고, 해산을 돕는 자들이 꽤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러니까요. 뭐, 그 궁인 말로는 해산 흔적도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산 당시 그 곁에 궁인이 아무도 없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더욱이 이 씨는 전날에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그다음 날 해산을 했다고 하니까요.”

    “…”

    “아무튼 그 궁인 말로는 왕자를 낳으시고 몸을 추리셔야 하는데, 매일 새벽만 되면 뒤꼍에 가셨다고 하옵니다.”

    토굴이구나.

    ‘하면 중전마마께서는 토굴에서 왜 그런 짓을 하신 게지?’

    부적과 함께 발견된 사람을 저주하던 물건들, 그렇다면 그건 누구를 향한 저주였을까?

    “여기서 또 누군가 뒤따르려고 하면 그렇게 노하셨다고 하옵니다. 온화하신 중전의 모습과는 달리 앙상해진 얼굴로 역정을 내니, 그 모습이 하도 괴상망측하여 귀신을 보는 것처럼 섬뜩하기까지 했다고 하옵니다.”

    “혹 중전마마께서 신기를 물려받으신 걸까?”

    여태까지 맹지에게 들었던 것을 종합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승하하신 중전마마가 신내림을 받았고 그 때문에 뭔가 중요한 걸 알고, 회임했으면서도 불안해하며 때론 자해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해산을 한 날 저하의 탄생을 숨기고, 다음날 해산한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저하와 같은 날 태어난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 같다.

    ‘아, 머리 아프네.’

    이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기려 했다.

    만약 그 저주받은 날에 저하가 태어났다면, 그것을 감추려 한 사람은….

    ‘누가 이처럼 잔인하고 의도적으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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