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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월국애사 (43)화 (43/96)
  • 43. 제대로 된 합방을 하려면, 얼마나 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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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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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연히 부친이 살아계시고, 감히 천씨 성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어도 자신이 천 씨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돌아가신 가문 사람들이 안다. 그런 제가 다른 가문의 여식이 된다니, 어찌 부친을 웃는 낯으로 뵐 수 있단 말인가.

    “저하, 저는….”

    “안다. 네 이름이 두화이고, 엄연히 가족이 있겠지. 하나, 궁에서 당장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었느니라. 할마마마가 좌의정을 동원하여 널 없애려 했을 땐 진즉부터 네 신분을 알고 계셨을 수도 있고, 오늘과 같이 편전에서 공론화시켜 널 내쫓을 계략도 세우셨겠지.”

    이미 한번 궁 밖에서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하여 저를 위해 그리했다는 그의 말에 무턱대고 화도 못 내겠다.

    “난 그럴 것에 대비했을 뿐인데, 오히려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네게 귀족 신분을 줄 수 있었고, 또한 전에 풍속범을 잡느라 네가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아바마마께서 너를 종4품 승휘로 승격하셨다.”

    “예?”

    ‘세상에.’

    이렇게 되면 정말 나갈 수 없게 된다. 소훈이지만 아직 정식으로 첩지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데 편전에서 그것도 전하께서 그리 명하셨으니 이젠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이 갈팡질팡 요동쳤다.

    조금 전 그와 낯 뜨거운 행위에 심장이 녹아드는 것 같이 뜨거워졌었다. 또 그와 같은 마음에 부끄럽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데 막상 정식으로 그것도 공론화되어, 후궁 첩지가 내려져 정녕 나갈 수 없게 된다고 하니, 앞이 막막하기만 하다.

    그를 연모하는 마음과 별개로, 여전히 움막으로 돌아가 부친도 무영도 개방 식솔들도 보고 싶다. 한데 이젠 정말 큰일 났다.

    ‘이제 어쩌면 좋아!’

    “어찌 안색이 좋지 못하구나. 다리가 많이 아픈 것이냐?”

    차마 정말로 나가지 못하냐고?

    나가게 해 달라고 청하지 못하겠다.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제 마음을 드러냈을 때, 행복해하는 그의 얼굴이 떠올라 그저 고개만 흔들고는 그의 품에 기대었다.

    “내 너의 상태를 잠시 망각하였어. 여러 가지로 오늘 곤하고 괴로웠을 터인데….”

    “...”

    “후궁 첩지는 아바마마께서 모후께 전하게 되면, 모후의 인장이 찍혀 동백궁으로 내려질 것이야. 할마마마는 첩지를 내려주지 않으실 요량이셨겠지만, 너의 후궁 첩지가 공론화된 만큼 또 아바마마의 명이 있었으니 아마 수일 내로 내려질 것이다. 하니, 앞으로는 세자빈이 오늘처럼 험하게 구는 것은 덜할 것이야.”

    “…예.”

    혼란스러움에 두화는 쉬이 잠들지 못하였다.

    ***

    20여 년 전, 전설로만 여기던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던 그 날 이후, 왕은 쉬이 잠들지 못하는 불면병에 시달리고 있다.

    오늘도 겨우 선잠이 들었건만, 역시나 갓난쟁이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죽어 나간 충신들의 울부짖음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뜰 수밖에 없다. 벌써 축시(01~03시)에서 인시(03~05시)로 넘어가지만, 한번 깨고 나면 쉽사리 눈을 붙이기 힘겹다.

    어의 말로는 ‘사려 과다’로 인해 비장이 손상되어 그러니, 억지로라도 심신을 평안케 해야 한다고 당부하지만, 잠만 들면 제 발아래 어린 핏덩어리들이 한꺼번에 울기 시작한다.

    귀를 막아도 처절한 울음소리는 마치 바늘이 되어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제 심장을 연신 찔러댄다. 비록 꿈일지라도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여 꾸준하게 복용하고 있는 탕약이 있어도 별다른 호전을 보이지 않기에, 꿈에 시달리다가 깬 이 시간이 제일 예민하다.

    물 한잔을 겨우 넘기고 숨을 고르는데, 침전의 비밀 통로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왔느냐?”

    “예, 전하.”

    “어찌 되었느냐?”

    “송구하옵니다. 도성 일대를 뒤지고 있으나 그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면, 이미 도성을 벗어난 것이냐?”

    “소인의 생각으로는 아직 도성에 있을 듯싶습니다. 영상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필히 궁 가까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젠 두통까지 이는 것 같다.

    왕이 머리를 짚자, 어둠 속에서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의를 들라 할까요?”

    “되었다. 이런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더냐? 음… 너 혼자 해결하기 힘들면 사람을 붙여주랴?”

    “아니옵니다, 전하. 인방을 이용해서라도 소인이 기필코 찾아내어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겠나이다.”

    복면인의 확고한 의지에 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를 거둔 복면인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서히 닫힌 비밀 통로를 한참을 바라보던 왕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이미 한번 죽인 벗을 또 죽이라 명하였지만, 마음은 좀처럼 편치 않다.

    ‘만약 그때 왕권이 무너지기를 각오하고, 일랑이 아닌 설변도 그자를 버렸다면… 그랬다면 상황은 바뀌었을까?’

    왕이기에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남들 앞에 후회를 드러내지 못한다. 벗을 버리고 이뤄낸 업적에 조정은 평화를 찾고 백성은 태평성대를 누리는데, 자신은 아직도 과거에 얽매어 괴롭기만 하다.

    ‘모두 다 내 업보지.’

    이렇게 왕은 또 밤을 새우고 만다.

    ***

    두화가 눈을 떴을때 자한은 곁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보낸 귀한 음식 재료와 약재가 당도해, 맹지 입이 귀까지 걸렸다.

    하지만 두화는 간밤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에 심란하기만 하다.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이 자꾸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반면 곧 첩지가 내려진다는 사실에 이제 어찌해야 할지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만 하다.

    다소 늦은 아침을 먹고 약까지 마셨다. 퉁퉁 부은 종아리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생각이 깊어지니 가슴이 답답하여 후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아픈 다리로 잘도 나다니는구나.”

    뒤돌아보니 세자가 뒷짐을 지고 서서 왜 돌아다니느냐 웃으며 질책하고 있다.

    “또 오셨어요?”

    성큼 다가온 자한이 두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머,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가 볼까 두리번거리는 두화의 입술에 쪽 입맞춤을 한 자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 하긴, 다리 아픈 내 여인 안아 주고 있지 않으냐?”

    “…원래 이렇게 능글능글하셨는지요?”

    살짝 눈을 흘기며 묻자, 자한이 눈웃음을 짓는다.

    “글쎄다. 나도 몰랐는데 너 때문에 이번에 알게 되었다.”

    “내려주세요. 맹지가 보겠습니다.”

    “그래, 맹지. 내 분명 나가기 전 널 잘 돌보라 명하였거늘 이리 돌아다니게 만들었으니 혼을 내줘야겠구나.”

    그냥 하는 말인 것을 모르지 않는다.

    두화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상처 좀 있다고 방에만 있으면 더 안 좋아요. 괜히 엄한 아이한테 그러지 마셔요, 저하.”

    “정 원하면 그리하마. 뭘 하고 있었느냐?”

    “…그냥 답답해서 걸었어요.”

    “밥은 먹었고?”

    “예.”

    “약도 먹었느냐?”

    “예.”

    아이에게 대하듯 하나하나 챙겨 묻는 그의 섬세함에 웃음이 터졌다. 머릿속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데도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어찌 웃어?”

    “좋아서요.”

    그가 피식 웃는다.

    천천히 걸어 그늘진 마루에 앉았다. 한데 그가 내려주지 않고, 자신의 무릎 위에 저를 앉혔다. 차를 내오던 맹지가 그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뒤꼍으로 후다닥 도망간다.

    정말 낯부끄러워 미치겠다.

    “내려주셔요. 어휴, 맹지가 다 보았으니 이제 창피해서 어찌 얼굴을 봅니까?”

    “보면 좀 어때서? 내가 모르는 여인을 안았더냐?”

    어서 답해 보라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아니요.”

    “하면 내 여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냐?”

    “예?”

    “지금 인정하지 않았느냐? 이미 간밤 수십 번도 더 입맞춤도 하… 읍!”

    이번엔 정말 맹지가 들을까 부끄러워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왜 이러세요, 정말? 내가 아주 대낮부터 낯부끄러워 죽겠어요, 진짜!”

    “으으읍으!”

    “예? 아….”

    손을 떼자 바로 그의 숨이 확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미 입술은 하나로 붙어버렸다. 이글대는 그의 눈빛이 간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눈을 깜빡이던 두화는 그 이글대는 눈빛에 눈을 꼭 감아버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고 싶은 욕심은 사내로서 당연하다고 자한 스스로 세뇌하였다.

    “두화야, 다리는 언제 낫는 것이냐?”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굳은 인상으로 묻는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 울림이 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입맞춤해 낯 뜨거워 또 어색해질까 봐 두화는 부러 딴소리하였다.

    “저하, 숨을 좀 천천히 쉬어 보셔요. 이리 빨리 뛰면 정말 큰일 나거든요.”

    말의 앞뒤도 생각하지 않고 했더니, 두화 자신도 웃음이 났다.

    ‘나 미쳤나 봐. 이 와중에 숨을 천천히 쉬라니… 아휴.’

    “…뭐라?”

    크게 웃음을 터뜨린 자한은 이런 두화를 꽉 끌어안았다.

    “매일 이렇게 웃게 해주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이 찼지만, 세상이 몽롱해질 만큼 그와의 입맞춤은 기분이 좋다. 하나, 또다시 밀려드는 여러 가지 생각은 차곡차곡 그와 쌓이는 행복한 기분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그때 밖에서 사림이 자한을 찾았다.

    “시간이 되는대로 또 찾을 것이니, 다리 빨리 낫게 너무 돌아다니지 말아라.”

    웃으며 말하고는 이내 동백궁을 나갔다.

    그가 남긴 뒷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 다리 빨리 낫게 너무 돌아다니지 말아라.

    그리고 전날 웃으며 제게 했던 말.

    -… 네 몸이 성해지면 제대로 화촉을 밝힐 것이야. 하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여라.”

    그냥 빨리 나으라는 말일진대, 왜 자꾸 전날의 말과 연관 지어 떠오르지?

    왜….

    얼굴은 붉어지고, 심장은 또 이리도 빨리 뛰는지 정말….

    모르겠다.

    ***

    이틀 동안 몸에 좋은 보양 음식과 최고의 약재로 지은 탕약을 먹고 약을 발라 그런지 상처는 금세 꾸덕꾸덕해져 고통도 줄었다.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맹지가 송골송골 땀까지 흘리며 돌아왔다.

    “어딜 다녀오길래 땀까지 흘려?”

    “저번에 시키신 거 알아 왔사옵니다.”

    뭘 시켰었나 생각하다가 토굴을 떠올렸다.

    “토굴? 그래서 알아냈어?”

    “예, 제가 또 마당발이라 궁 구석구석 모르는 이가 없사옵니다. 거기에 미움 사는 이도 없어서… 아, 세자빈궁의 초아랑만 앙숙이고, 그 외 궁인들과는 다 잘 지냅니다.”

    “맞아, 착한 맹지 보면 그럴 거 같아.”

    “헤헤. 참, 여기 동백궁에 대해서 아는 이는 거의 없었사옵니다. 승하하신 중전마마의 별궁 같은 곳이라고만 알고 별 이야기는 없었사옵니다. 한데….”

    맹지는 알아 온 것들을 죄 이야기했다.

    이곳 동백궁은 본디 세자의 모후인 중전마마를 총애하여 왕이 하사한 별궁이다. 당시 능윤군을 낳은 희빈 박 씨가 있었지만, 승하한 중전마마를 왕이 얼마나 아끼고 은애하는지를 모르는 궁인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전에게서 후사가 나오지 않자, 조정에서는 희빈 박 씨의 아들 능윤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하지만 왕은 왕실의 후손이 중하다고는 하나, 오로지 적통만이 세자로 책봉한다는 그 뜻이 단호하였다.

    능윤군이 세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중전께서 회임하였다는 소식에 조정도 궁 밖 백성도 모두 기뻐하였다.

    한데 그토록 원하던 회임을 한 순간부터 중전과 왕의 갈등이 깊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지만, 궁 안에서는 더 알 수 있는 게 없어서 맹지는 궁말을 찾아갔다. 나이가 들거나 병든 궁녀가 궁을 나가 모여 사는 곳이 궁말이다. 궁말이라는 곳에 사는 세수간 궁녀였던 이 씨가 한 말이 제일 이상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회임을 하였는데, 왜 중전과 왕의 갈등이 깊어졌는지 두화는 의아하기만 했다.

    “금실이 좋았다면, 회임했으니 더 사이가 좋아야 하는 게 아닌가?”

    두화는 뭔가 이상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지요. 그것도 몇 해만의 회임이니, 궁 안팎으로 정말 잔치였는데 정작 승하하신 중전마마는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하옵니다.”

    “그, 이 씨라는 궁녀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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