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2)화 (42/96)
  • 42. 좋다고 해야 해요? 아니면 무서워해야 해요?

    매번 밀어내던 그녀가 지금 희망을 주고 있다.

    “뭐?”

    분명 들었음에도 재차 물었다.

    “솔직히 지금도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요. 제 신분과 처지가 저하와 맞지 않는 건 사실이니까요. 한데 자꾸만 제 심장을 툭툭 건드려요, 저하가.”

    “두화야.”

    애처롭게 부르는 그 이름에 두화의 심장이 요동쳤다.

    세자빈에게 회초리로 맞을 적엔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고 여겼다. 한데 처소에 돌아오니 이곳도 며칠 있었다고 그사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안심되는 공간 안에서 뒤늦게 밀려든 고통으로 혼절하여 깨지 못했다.

    너무 심한 고통에 잠깐씩 깰 때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보고 싶었다.

    그제야 알았다.

    저를 연모한다는 그의 말처럼, 저 또한 어느새 그를 마음에 채우고 있었나 보다.

    이젠 채운 것이 흘러넘쳐 막을 수가 없는지 감히 입 밖으로 그 마음을 드러냈다.

    “저도 저하를 마음에 채웠다 하면… 제가 너무 늦었을까요?”

    고개를 든 자한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아까와 달리 저를 보는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대로 입술을 맞대었다.

    서로를 원하는 마음이 하나의 숨이 되어 오가기를 여러 번, 겨우 떨어졌을 때 두 사람의 심장은 미칠 듯 뛰고 있었다.

    “…답이 되었느냐?”

    “모르겠어요.”

    “네가 내 속을 태웠으니, 말로는 안 할 것이니라. 모르겠다 하니 한 번 더 할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피식 웃은 자한이 약사발을 들었다.

    “자, 아 하거라. 먹여주마.”

    “되었어요. 제가 먹어요, 주셔요.”

    “어허. 아 하래도.”

    자한이 정성스레 약을 먹여주고, 입가에 흐르는 약물을 비단 손수건으로 톡톡 눌러 주기까지 한다. 결국 두화는 그가 떠먹여 주는 대로 약을 다 먹었다.

    자한은 두화의 다리에 시선을 뒀다.

    “많이 아프지?”

    “…조금이요.”

    “미안하다.”

    두화는 대답 대신 그의 품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말없이 그대로 있기를 한참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하.”

    “응?”

    고개를 빼꼼히 올려다본다.

    약을 먹어 그런 건지 아까와는 혈색이 조금 나아진 듯싶다.

    “한데 안 가셔요?”

    생각도 못 한 그녀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가긴 가야 하는데….

    아니, 또 그게 이제 마음이 통했는데 보내지 못해 안달이니, 조금은 서운하기도 하고 장난기도 발동한다.

    “흠, 자고 갈 것이다.”

    “예?”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다.

    화들짝 놀란 두화가 품에서 떨어져 두 눈을 깜빡이며 저를 피하려 든다. 그런 그녀를 도로 끌어와 제 품에 안아 천천히 뒤로 누웠다. 품에 쏙 들어온 그녀를 안고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잘 것이다. 하니, 너도 자거라.”

    “…저하, 정말 주무시고 가실 거예요?”

    조심스레 묻는 얼굴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부터 내 마음을 몰라주고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답을 하면 이렇게 할 것이니.”

    그대로 입술이 포개어졌다.

    “당장이라도 너와 초야를 보내고 싶다만, 오늘은 참을 것이다.”

    “…”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를 보며, 두 눈 동그랗게 뜬 두화의 얼굴이 또 붉어졌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라.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넌 모를 것이다.”

    “제가 뭘 어쨌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던 두화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지금 네 표정이 날 미치게 만드는 걸 너는 모른다.”

    영문을 모른 두화의 입술이 삐뚜름하니 내밀어졌다.

    “네 다리가 나으면 그때 널 취할 것이야.”

    “…”

    “왜, 이제야 겁나느냐?”

    “겁은 무슨… 그냥, 이래도 되나 싶어서 그러죠. 아버지 허락도 받지 않았고, 무엇보다 제가 잘 있는지 걱정하실 텐데….”

    “서찰을 써다오. 서찰이라도 전해지면 걱정을 좀 덜 하지 않겠느냐.”

    “예?”

    그건 더더욱 아니 될 말이다.

    궁에 들어온 걸 알면 엄청나게 꾸지람을 받을 것이다. 예전부터 부친은 궁이라면 눈빛이 무섭게 변하셨다.

    ‘아휴, 큰일 날 소리를….’

    “저하, 그러지 말고 제가 한번 다녀올게요, 네?”

    ‘누구든 내 소식을 알기 전에 내가 먼저 아버지께 잘 있다고 전해야 해. 분명 정보원이 여기 어디에도 있을 텐데… 진작 정보원끼리 알아보는 표식이라도 익혀둘걸.’

    “…그건 안 된다고 아직.”

    “왜요, 제가 저하를 떠날까 봐요?”

    자한은 그녀의 머리를 꼭 끌어 품에 안았다.

    “떠나면… 다시 잡아 올 것이다. 그리고도 또 도망치면 내 옆에 묶어서라도 난 이젠 널 보낼 수가 없다.”

    “와아, 이런 건 사랑받아 좋다고 해야 해요? 아니면 무서워해야 하는 거예요?”

    미간을 좁히며 어이없는 말로 따지고 드는 모양새가 웃겨, 자한은 그녀의 머리맡에서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널 연모하여 그런 것이니, 좋든 무섭든 그런 것들은 네가 감당하거라.”

    “무슨 사랑이 그래요? 너무해요, 정말.”

    두화가 작게 웃으며 말하자, 조금 전까지도 장난기 다분하던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지금 궁을 나가면 위험해.”

    “…?”

    어떤 핑계로든 그녀를 잡을 수는 있다. 하나, 사소한 오해가 생긴다면 그간 핑계를 댄 것이 그녀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결국은 제게 몇 배의 고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하여 자한은 차라리 사실대로 말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날 그 촌마을에서 자객들의 목표는 내가 아닌 너였다.”

    두화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들어맞자 혹, 부친이 말해 준 놈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욕심에 널 궁으로 데려와 치료하고 널 곁에 두고 싶었는데, 그날의 일을 조사하다 보니 널 노린 자객을 조종한 배후가… 대비궁이고, 자객을 보내 대비와 뜻을 함께한 자가 바로 세자빈의 부친인 좌의정이다.”

    배후가 생각도 못 한 사람들이라 두화가 놀라 되물었다.

    “예?”

    할 말을 잃었다.

    어쩌다 궁에서, 그것도 대비마마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좌의정의 눈에 제가 찍혔을까?

    “아마, 세자빈도 알 테지. 그러니 널 그리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게야. 인두겁을 쓰고 사람을 해하려 한 것도 모자라, 뜻대로 되지 않으니 널 핍박하여 쫓아내려는 게지.”

    자한은 그녀의 이마 위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올려줬다.

    “하여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다. 나가면 좌의정이 널 어찌할지 모를 일이야.”

    “…그러면 궁 안은 괜찮은 거고요?”

    “혹시 모를 독에 대비하라고 맹지를 곁에 둔 것이다. 궁 안이니 자객이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세자익위사 둘을 근처에 배치해 놓았다. 위험해지면 그들이 나설 테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난 저하를 밀쳐내기 바빴는데, 저하는 내가 위험할까 봐 그동안 동분서주하였구나.’

    두화는 제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도 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한층 더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부풀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부비하며 문질렀다.

    “어찌 갑자기 아이처럼 이러느냐?”

    “그간 저하의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해서요.”

    “그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고마워요, 저하.”

    “되었다. 네게서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두화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은애해요, 저도.”

    “…!”

    그대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그가 제게 했던 입맞춤처럼은 흉내 낼 순 없어도 제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들어 냉큼 고개를 내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묵직한 한숨이 느껴진다.

    “두화야, 부탁이다. 그냥 자라.”

    “치이, 부끄러워도 저하께 제 마음을 드러냈는데 왜 자꾸만 자라고만 하세요?”

    미칠 것 같은 사내의 마음에 아주 기름을 붓는다.

    “내 분명 참으려 하였다.”

    “예?”

    “이건 다 네 책임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도 참거라.”

    이내 닿는 그의 입술에 두화는 숨이 터질 것만 같았다.

    “더는 안돼… 요.”

    “안 된다는 그 말, 불허한다.”

    모든 책임을 두화에게 전가한 자한은 꾹꾹 눌러 참았던 사내의 본성을 터트렸다.

    이글대는 눈빛으로 그녀를 옭아맸다.

    제 마음을 받아들인 그녀와 화촉을 밝히고, 금침 위에 누워 어화둥둥 속삭이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지만 다급하게 품질 못하겠다.

    아끼는 마음만큼 제 벅찬 마음을 그녀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저하….”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건만 취하는구나, 두화야.”

    그가 내리는 달곰한 입맞춤이 계속될수록 기분이 이상하고 몽롱하다.

    하지만 그의 발이 아픈 종아리를 건드는 순간, 달곰한 기분은 날아가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아야!”

    자한이 열락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상처투성인 그녀의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다. 살짝만 닿아도 아픈 상처인데 고통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 환자를 두고 내 무슨 짓을 한 거야!’

    자책하며 그녀에게서 떨어져 옆에 누웠다.

    잠시의 정적에 두 사람 모두 세상 어색하여 그저 천장만 바라봤다.

    “저….”

    “그러니까.”

    동시에 말문을 트니 그제야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돈다.

    “먼저 말하거라.”

    “아니요. 저하께서 먼저 말하세요.”

    “흠. 내, 너무 성급하였다. 네 몸이 성해지면 제대로 화촉을 밝힐 것이야. 하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여라.”

    엉큼한 웃음을 지으며 두화의 콧등을 톡 손가락으로 쳤다.

    살짝 콧등을 찌푸린 두화가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말에 부끄러워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

    ‘조금 전도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어지러웠는데, 대체 사내와 여인의 춘정이 통하여 제대로 된 합방을 하려면, 얼마나 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거야?’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하려니, 조금 전 그의 손길과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뜨겁게 달궈지는 것만 같다.

    ‘아, 부끄러워. 아까 같은 행위를 또 하는 것이잖아.’

    말로는 아니 된다고 외쳤어도 그의 온기를 받을 때 싫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부끄러워하는 거냐? 아니면 지금 당장 원하는 게야?”

    그의 품에 머리를 박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였다.

    “그리 자꾸 날 자극하면 정말 아픈 널 취할 것 같구나. 하니, 그만… 흠.”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 두화는 그제야 그의 생김새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살짝 매서운 눈이지만, 웃을 땐 다정해 보이고, 어딘지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어? 콧방울 안쪽에 작은 점도 있네.’

    아래에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그의 비밀을 혼자만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오늘, 네 이야기로 편전이 떠들썩했다.”

    “…?”

    제가 무어라고 나랏일을 하시는 분들이 저에 대해 논의를 할까?

    “누군가 고의로 네 신분을 궁 안에 퍼뜨렸다.”

    “네? 아…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돼요?”

    “왜? 쫓겨나게 될까 두렵더냐?”

    “아니요. 쫓겨나면 제가 뭐 갈 곳이 없답니까? 집으로 가도 되고….”

    “쫓겨날 일도 없거니와 쫓겨나도 내, 다시 데려올 것이야. 하니, 내게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

    “약조한 것이다.”

    쉽사리 대답하지 않는 두화 때문에 자한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 궁은 나가고 싶다고 아무 때나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데도 뭔지 모르게 불안한 것은 왜일까.

    그런 제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두화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널 믿을 것이다. 내 사람이니.”

    작고 둥근 어깨를 감싼 손이 부드럽게 그러안았다.

    그의 품에 더욱 기대게 된 두화는 아까와 달리 조금은 편안해진 그의 심장 울림을 엿들을 수 있었다.

    “…해서 어찌 되었어요?”

    “내 그러잖아도 네 신분을 만들었다.”

    “가짜 신분이요?”

    “그래. 이제부터 너는 오씨 가문의 외동딸인 오화연이다.”

    두화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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