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1)화 (41/96)
  • 41. 꿈틀대는 분란의 조짐

    결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기에, 사람을 시켜 다시금 계집을 조사케 했다. 귀족은커녕 일개 천민도 아니었다. 대비의 서신에 쓰였던 것처럼 벌레만도 못한 거지였다. 보고를 들으면서도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이 나라 세자란 놈이 계집 보는 안목이 저보다도 낮다.

    ‘아무리 계집이 없어도 어떻게 벌레보다도 못한 천하디천한 거지를 데려다, 궁에 앉힐 생각을 해? 쯧쯧쯧!’

    용납할 수 없다.

    이는 제 여식을 업신여기는 처사였으며, 또한 제 가문을 무시하는 것이다.

    세자가 총애한다는 계집이 천한 거지의 신분이라는 것을 궁 곳곳에 소문을 내어, 오도 가도 못하게 궁지로 몰았다고 여겼다. 한데 이것이 세자에게 전화위복이 되어 계집의 신분이 귀족으로 상승하고, 승휘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일이 제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니 화가 머리로 쏠려 쓰러질 것 같다.

    ‘분하군!’

    올해 제 운이 좋지 않은지 풍파가 끊이지 않는다. 자객이 들어 제 몸을 종이 삼아 난도질하고, 제 피 같은 재산을 쓸어가고, 이젠 여식까지 불운을 겪고 있다.

    ‘젠장, 불운이 오면 내가 부서뜨리면 그만이다. 내가 설 별도란 말이다. 감히 내게 도전하는 것들은 죄 쓸어버리면 될 일이야.’

    “대감, 하면 동백궁의 일은 소신이 맡지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있는 한, 제 여식과 제 자리가 위태로울 일은 없을 것이다. 한데 세자가 저리 나온다면 아무리 여식이 그 자리를 지킨다고 하여도 빈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이다.

    ‘어찌할까?’

    부서진 호두알맹이를 톡톡 손가락으로 치던 설변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뭔가 생각이 끝난 듯 그의 손가락 아래서 제자리를 맴돌며 굴러다니던 작은 호두알맹이가 순간 짓이겨져 버렸다.

    “아무래도 우리 혈기 왕성한 사위에게 경각심을 좀 줄 필요가 있겠소이다.”

    그래도 제 딴에는 진여의 제안에 그것도 고민이라고 진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세자와 왕이 저리 나오니, 조금은 망설이던 것이 단박에 결단이 내려진다.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우리가 나설 필요 있겠습니까? 그자의 거래에 응하면 일은 알아서 저쪽에서 진행하겠지. 하면 전하도 어쩔 수 없이, 병권의 삼 분의 일을 가진 내게 손을 내밀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를 파하는 대로 수결하여 은밀하게 그자에게 보내야겠다. 빠른 시일 안에 은밀하게 회동하여 계책에 대해 다시 논해야겠다.

    “저는 아직도 성라국과 손을 잡는 것은 좀 위험부담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대감.”

    여전히 걱정이 많은 병조판서가 불안한 듯 말한다.

    ‘당연히 전쟁을 일으키는 건데 위험하지. 하나, 저들이 원하는 땅덩어리와 비단을 내어주더라도, 내가 얻을 이득이 훨씬 크니까 거래에 응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병권을 내어주고 또한 전쟁에 동원되는 군량미가 군자감에서 나오더라도 제 쪽에서 부족한 부분을 조력해 줄 것이다. 하여 전쟁에 승리한다면 제가 이룬 공을 내세워, 조정의 대다수를 제 쪽 사람으로 채울 것이다.

    또한 제 권세로 세자빈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 것이다. 세자와의 합방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권을 가지고 겁박해서라도 합방하게 만들어 후사를 봐야지. 세자빈에게서 후사가 태어나면, 있으나 마나 한 세자는 그때 제거해도 상관없다.

    그땐 손주를 등에 업고 제가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갈 테니 말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끓어오른다.

    “때론 위험을 감수하며 차지해야 그 희열이 더 큰 법이지요. 전하께 병권을 내어주고 우린 조정에 우리 사람들로 물갈이를 하는 조건을 내밀면 됩니다.”

    “오오, 역시 대감이십니다.”

    “빠른 시일 날을 잡아 일을 마무리해 보도록 하겠소. 병조판서는 저쪽에서 뭘 좋아하는지 미리 준비해 두시게.”

    하나, 병조판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대감, 먼저도 그자는 우리가 준비해간 것을 업신여겼습니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또 같은 수모를 당하기엔!”

    병조판서의 말에 설변도가 작게 혀를 찼다.

    “지금은 우리가 더 원하는 것이 많으니, 이를 티 내지 않으면서도 저쪽에서 더 안달이 나게끔! 눈에 차는 선물하나 안겨 헤벌쭉하게 만들어야 일이 쉬이 성사되지 않겠는가? 세상 호화롭고 귀한 것들로 구해보시게.”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병조판서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하자 설변도도 더는 말하지 않고, 서책 하나를 돌렸다.

    “대감,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로 수결을 남기려 하네.”

    설변도의 말에 몇몇 대신들의 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설변도가 잔을 들이키고 조용히 내려놨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사람도 붙잡을 생각 없으니 나가시게.”

    ‘치부책 하나 정도는 있어야, 감히 네놈들이 날 배신하지 않지.’

    하지만 대신들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저리 말하는 설변도의 숨겨진 뜻을 모르지 않는다. 만약 문을 열고 나간다면 이 집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숨이 멎을 것이다. 눈치 빠른 자들은 서둘러 자신의 가문과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모인 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제 손에 돌아오자, 설변도는 그제야 웃으며 잔을 채워 들었다.

    “자자, 그럼 기분 좋게 한잔들 합시다.”

    설변도가 술잔을 비우자, 모두 자신들의 뜻이 벌써 이루어진 것처럼 즐거워했다.

    ***

    늦은 시각 탕약을 한 번 더 올리려고 맹지는 어두운 후원에서 약을 달였다. 후후, 불씨를 불고 부채질을 하는데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거, 거기 누구요?”

    쓱, 모습을 드러낸 이는 세자였다.

    “아, 깜짝이야! 저하?”

    깜짝 놀란 맹지가 숨을 내쉬며 예를 갖추었다.

    “쉿! 잠들었느냐?”

    “…”

    약탕기와 맹지를 번갈아 본 세자의 미간에 골이 진다.

    “한데 이 시각까지 넌 뭐 하고 있는 게냐?”

    “그것이… 흐흡. 저하!”

    참으려 했지만, 너무도 억울하여 울면서 세자에게 울분을 터뜨렸다.

    “맹지야, 네가 이토록 우는 건 처음 보는구나. 무슨 일이더냐?”

    “세자빈 마노라께서 우리 마마를… 저, 저하!”

    자한은 맹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침소로 뛰어 들어갔다.

    낮에 서로 감정만 상한 채 헤어진지라 내내 마음이 걸렸다. 더구나 오늘 두화의 가짜 신분을 만들어 주었다. 불편하지만 또 가짜 신분을 만들어 준 것이 당분간 그녀를 안전하고 당당하게 해줄 것 같아 기쁘기도 하였다.

    하나, 낮의 일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산보라도 할까 싶어 나왔거늘 저도 모르게 동백궁까지 오게 되었다.

    한데 세자빈이 그녀에게 뭘 어찌했길래 맹지가 저리 눈물을 흘리는 건지.

    벌컥 열어젖히자 천을 감싼 종아리를 드러낸 채 엎드려 잠든 그녀가 보인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였다. 잡은 문이 손아귀에서 부서져 떨어질 것 같다. 종아리에 피가 밴 천을 본 자한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애써 참으며 다가가 앉았다.

    조심스레 천을 풀자 매질에 터져 검게 변한살이 피떡이 되어 굳어 있다.

    ‘쳐 죽일!’

    금방이라도 이리 만든 자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만 같다.

    부아가 치민 자한의 입술이 분노를 참느라 짓이겨졌다.

    그때 탕약을 가지고 맹지가 들어와 뒤에 섰다.

    “누가 이랬다고?”

    몇 번 보지 못한 세자의 분노 섞인 냉랭한 음성에 순간 맹지는 소름이 쭉 끼쳤다.

    “세자빈 마노라께서 버드나무 가지로 훈육하셨나이다.”

    “언제?”

    “낮에 연무장에서 동백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길에서 그랬나이다.”

    “뭐라, 길에서? 그래, 대체 몇 대를 맞았기에 살이 이 지경이 된 것이야?”

    조금 전까지도 노기가 실린 음성이었거늘, 지금은 감정이 하나 묻지 않은 차가운 음성이다.

    맹지는 제가 모시는 웃전을 이리 만든 세자빈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이때만큼은 차라리 입 싼 궁인들처럼 본대로 모조리 고하였다.

    “몇 대가 아니라, 버드나무 열 가지가 부러질 때까지 맞으셨사옵니다.”

    “뭐라!”

    홱 고개를 돌린 자한은 괜히 맹지에게 분을 터뜨렸다.

    맹지는 그 자리에 엎드려 잘못을 고하였다.

    “소인이 미흡하여 마마를 제대로 못 모셨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저하.”

    “어의는?”

    “저하, 그 또한 소인이 내의원으로 달려갔지만, 신 어의께서는 자리에 없었고, 다른 어의는 누구도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사옵니다. 그저 세자빈 마노라께 불경을 저질렀다고 대비궁에서 내린 명이라고만….”

    “괘씸한지고!”

    분노하는 세자에게 반 시진 전에 누군가 최고급 약재를 놓고 갔다는 말을 조심스레 올렸다.

    그대로 일어난 세자가 동백궁 입구에 서서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에 복면을 쓴 두 사람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소훈이 저리될 동안 너희는 뭘 한 것이냐?”

    싸늘한 세자의 하문에 두 명의 세자익위사가 고개를 숙였다.

    “저하, 소신들은 나설 수가 없었나이다.”

    “안다. 하나! 즉시 내게 와 알렸어야지!”

    “…그 시각 편전에 계셨나이다.”

    두 사람은 세자가 편전에 나오면 바로 알리려 했지만, 마침 대장인 좌익위의 호출로 잠시 자리를 비우느라 동백궁 후궁에 관한 일을 고해야 한다는 것을 이때까지 망각하였다.

    “그래도!”

    버럭 세자가 호통쳤다.

    “죽여주시옵소서.”

    “나와 헤어진 후 모든 것을 보고하라.”

    두화가 오후 내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데는 겨우 차 한잔 마실 시각도 못되었다. 검게 변해 터진 살만 봐도 그 상처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이 가지 않는데, 모진 회초리질을 당하면서도 신음은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난다.

    그녀를 핍박하며 모질게 군 세자빈도, 제때 제게 알리지 않은 세자익위사들도 그리고 세자빈 편에 서서 내의원에 손을 쓴 할마마마에게도 화가 났다.

    “누가 약재를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냐?”

    “대전 상선이 놓고 갔습니다.”

    “상선이?”

    부왕의 명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상선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부왕도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저와 두화를 주시하고 계셨음이다.

    “향후 또다시 이런 일이 있을 땐 즉시 내게 보고하도록 해야 할 것이야. 오늘처럼 굼뜨면 알아서들 하거라.”

    “예, 저하.”

    “물러가라.”

    어둠 속으로 숨어든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자한은 동백궁 침소로 들어섰다.

    맹지에게 기대어 겨우 약을 먹고 있던 두화는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세자를 보고 일어나려 했다.

    자한은 성큼 다가가 그런 두화를 잡아 제품에 기대게 하였다.

    곁에 있던 맹지는 조용히 일어나 침소 밖으로 나갔다.

    “괜찮은 것이냐?”

    차갑게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두화는 겨우 답하였다.

    “예. 괜찮아요.”

    “…정녕 괜찮은 것이냐?”

    이번엔 아주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묻는다.

    “예.”

    그녀가 괜찮다 하는데도 저는 왜 이리 화가 날까?

    저도 모르게 안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잡아 저를 바라보게 했다.

    “내 눈 보고 다시 말해. 정말 괜찮은 것이야?”

    “…예.”

    볼 위로 눈물이 주룩 흐른다.

    “괜찮다면서… 눈물은 어찌 흘려.”

    꼭 같이 울 것처럼 자한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에게 아무리 괜찮다고 말하였어도, 그의 품에 있으니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나 보다. 두화는 멍하니 제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훑어내렸다.

    그런 그녀를 자한은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 하구나.”

    “왜 저하가 미안해해요?”

    “…널 힘들게 만들었어, 내가.”

    “…!”

    어깨에 닿은 부분이 조금씩 축축이 젖는다.

    “저하, 지금 우는 거예요?”

    “…미안하다, 두화야.”

    “됐어요. 뭐가 자꾸 미안하다고 하세요?”

    “네가 좋아서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 자꾸만 차올랐다. 그날 네가 다쳐 혼절했을 때, 시전의 의원을 찾아도 되건만 난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궁으로 데려왔지. 어쩌면 내가 널 마음 가득 채웠듯 이곳에 있는 동안 너도 날 마음에 채우지 않을까 기대했다.”

    어깨 위로 스며드는 그의 눈물과 진심이 열릴락 말락 한 제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버렸다. 자신을 안고 있는 따뜻한 그의 등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래서 지금은 기대… 안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사내가 벌써 포기하는 것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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