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0)화 (40/96)
  • 40. 위기를 기회로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분해서 맹지가 격양된 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하아, 아니 우리 마마께옵서 뭘 그리 잘못하셨다고!”

    “난 모르겠네. 우리야 뭐 웃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 별수 있나. 안 그럼 쫓겨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것을.”

    어이없는 말이지만 궁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맹지는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웃전의 명을 받아 행하는 저들에게 뭐라 더 말할 수가 없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받아든 약을 챙겨 동백궁으로 뛰었다.

    ‘앞으로는 내가 우리 마마를 지킬 것이야.’

    침소에 들어간 맹지는 여전히 혼절한 채 깨어나지 못하는 두화의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닦아내고 약을 발라 천으로 감쌌다.

    후원으로 나가 약재를 달이면서도 억울해서 좀처럼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

    한편 연무장에서 편전으로 향하며 사림에게 뭔가를 받아든 자한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세자 저하, 납시옵니다.”

    안쪽에서 들라는 왕의 명이 떨어졌다.

    웅장한 편전의 문이 열리자, 양쪽으로 나뉜 대신들이 헛기침하며 세자의 등장이 못마땅하다는 표정들이 역력하였다.

    이들이 뭘 그리 못마땅해하는지 익히 알기에 자한은 곧장 중앙으로 가 예를 취하고는 고하였다.

    “지금 편전에서 논의되는 것이 신의 일이라 알고 있사옵니다.”

    “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한데도 왔더냐?”

    파벌싸움을 하며 정치를 논하는 이곳 편전은 그야말로 칼만 들지 않은 전쟁터와 다름없다. 그 어떤 것이라도 논란이 되어 저들의 입을 통하면, 갈기갈기 찢겨 결국 파면당하고 귀양을 가거나 심지어는 그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그런 자들 속으로 네 어찌 무모하게 왔느냐, 왕은 제 아들에게 돌려 물었다.

    “성덕이 높아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시고, 높은 업적으로 작금에 이르러 태평성대를 이루신 아바마마의 아들로, 또한 이 나라 국본으로 소자 이때까지 세자의 위치에서 틀린 것을 행한 적이 없사옵니다. 하니, 무에 두려워 오지 못하겠나이까?”

    자신을 추켜세우며 본인은 한 점 부끄럼 없다고 말하는 아들의 말에 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단히 준비해 온 것이구나. 그래, 그럼 한번 해 보거라.’

    “자, 대신들은 하던 논의를 마저 하시오. 조금 전까지 편전이 떠나가라 고하던 사람들은 어디 갔소이까?”

    대신들은 자신들을 비꼬듯 내리는 왕의 말에 언짢은 기분을 헛기침으로 여기저기서 드러냈다. 개 중 좌의정을 따르는 무리의 한 대신이 고하였다.

    “전하, 아까도 고하였지만, 왕가의 체통을 지켜주시옵소서.”

    “맞사옵니다. 어찌 현숙하고 자애로운 세자빈마마를 두고, 일개 평민도 아닌 천한 노비보다도 못한 거지를 궁에 들인답니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선조들께서 아신다면 분개하실 일이옵니다.”

    도를 넘는 언행에 자한의 굵은 눈썹이 삐딱하니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그대로 뒤를 돌아 조금 전 입을 연 대신 앞에 섰다.

    그리고 그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내려다봤다.

    세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에 눌려, 대신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선조들께서 아신다면 분개하실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마, 맞는 말이 아니 옵니까, 저하!”

    “음. 그래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

    낮게 떨어지는 그 목소린 상대를 압박하면서도 주위를 차갑게 만들었다.

    “소훈은 본래 오씨 가문의 외동딸인 화연으로, 어릴 적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지닌 재물을 동원하여 여식을 찾는데 여러 해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해 그 부모들 역시 지금까지 죽은 딸로 여기고 살았다 합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 하십니까?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증좌가 없지 않습니까?”

    반박하며 눈을 부라리는 대신 앞에 자한은 미리 준비한 종이 한 장을 펄럭였다.

    매섭게 대신들을 노려본 자한은 이내 왕을 향해 몸을 홱 돌려 준비한 종이를 두 손으로 바쳤다.

    그것을 왕이 받아서 읽어보니 세자가 말한 내용이 들어있었으며, 오씨 가문의 행적과 아이가 납치되어 관아에 고발됐던 고발장까지 함께 있었다.

    “비록 등등한 세도가는 아니나, 이름있는 귀족 가문이로군. 하면 이때 사라졌던 아이가 지금 세자의 후궁이라는 것이냐?”

    “예. 최근 신이 출궁을 자주 하였던 것도 화연의 진짜 신분을 찾아주고 싶어, 백방으로 수소문하느라 그랬던 것이옵니다.”

    “그랬던 것이로군. 음.”

    “하옵고, 그러던 와중에 먼젓번 풍속범으로 추포한 서도풍을 잡은 것도 화연의 기지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옵니다. 이는 백 장군도 그날 함께 있었으니, 불러 하문하시면 증언해 줄 것이옵니다.”

    한참 사리사욕만 채우는 비리에 관련된 대신들을 잡아들여 모두 몸 사리던 때가 있었다. 그들을 추포한 것이 사헌부와 영의정 그리고 그 아들인 줄만 알았는데, 한낱 계집이 도왔다고 하니, 대신들은 당황스럽고 기가 막힐 뿐이다.

    이런 대신들을 본 자한은 이때다 싶어 왕에게 청하였다.

    “전하, 소신 청하옵니다. 화연이 소훈이긴 하나 아직 내명부의 직첩을 받지 못하였나이다. 세운 공을 봐서라도 화연의 신분을 복권시켜 주시옵고, 승휘로 승격시켜 주시옵소서.”

    세자의 말에 좌의정 세력들은 웅성거리며 이 사태를 막으려 했다. 조금 전에도 반박하던 대신이 목청을 높이며 반대했다.

    “전하, 아니 될 말이옵니다. 어찌 거지를!”

    “닥치시오! 분명 본래의 신분이 있다 하지 않았소! 조금 전 함께 들어놓고도 그딴 소리를 한다면 그대는 귀가 먹은 것이오? 정말 그렇다면 인제 그만 요양이나 즐겨야지, 더는 편전에 들어 정치를 논하면 아니 되지 싶은데!”

    세자의 뼈있는 말에 대부분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좌의정 세력들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하, 소신 아뢰옵니다. 잃었던 신분을 복권하는 일은 그렇다 쳐도, 회임하여 왕자를 생산하지도 않은 후궁을 종4품 승휘로 승격하는 것은 너무도 이례적인 일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좌의정 세력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자한은 왕의 허락하에 재차 발언하였다.

    “후궁 첩지는 내명부 수장이 본래 내리는 것이지만, 특별한 사안이 있는 경우 전하의 수락하에 직첩을 승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모르오?”

    “…!”

    “소훈이 비록 회임하여 왕자를 생산한 것은 아니나,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궁핍하게 만든 파렴치한 권세가들을 소탕하는 데 기지를 발휘해 일조하였소. 그럼, 누가 말해 보시오. 그대들 중 그들을 잡아 옥에 넣은 자가 누구라도 있소이까?”

    대신들 누구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본래 이들은 이런 자들이다. 출세하고 권세를 높이는 데만 열을 올리는 자들이다. 그 외 것들은 모두 물어뜯고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쁜 입만 산 자들이다. 아마, 죽어 저승에 간다면 입만 동동 살아 나불거릴 위인들이다.

    “조사하여 보니 가관이었습니다. 특히 호조판서의 자제는 감히 이 나라 국본인 내게 하극상을 일으킨데다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들을 하였었지요. 이는 호조판서도 이미 알지 않소이까?”

    “마, 망극하옵니다. 저하.”

    호조판서는 자리에 엎드려 읍소했다.

    분명 호조판서도 비리가 넘칠 터인데, 자식 관리도 못 하면서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과분한 자리에 어찌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자한의 눈초리가 가늘어져 호조판서의 정수리를 노려봤다.

    ‘그 어떤 비리도 증좌를 남기지 않은 게지. 하니, 옥사가 아닌 편전에서 이리 있을 수 있는 게야 감히!’

    못마땅함에 분을 겨우 삭인 자한은 대신들을 쓱 훑어보고는 왕에게 고개를 숙이며 재차 청하였다.

    “부디 화연의 공을 생각하시어 허해 주시옵소서!”

    “좋다. 동백궁의 후궁을 종4품 승휘로 승격하라. 또한 본래의 신분을 돌려주도록 하라.”

    “전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자한은 저들을 상대로 첫 번째 싸움에서 이겼다. 위풍당당 걸어 나갔다.

    세자가 편전을 나서매 왕은 편전 회의를 파하였다.

    모두 편전에서 나가자 그때 잰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온 상선이 뭔가를 고하였다.

    “전하, 오늘도 세자빈 마누라께옵서 동백궁 후궁을 벌하셨다 하옵니다.”

    “하, 맹랑한지고. 제 아비와는 다를 줄 알았더니 슬슬 머리를 드는구나. 그래, 오늘도 땡볕에 세웠다고 하더냐?”

    왕은 궁금해 미칠 표정이다.

    여인에게 관심조차 없던 세자가 갑자기 궁 밖에서 여인을 데려왔다. 처음엔 내칠 생각이었으나, 표정이 바뀌고, 웃기까지 하는 제 아들 모습에 잠시 두고 보자 여겼다.

    문제를 일으키면 그걸 빌미로 그때 내쳐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해서 지켜보는데, 문제는 딴 곳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참하고 온화하다고 여겼던 세자빈이 투기하며 드러낸 참모습이 꽤 발칙하다.

    “아니옵니다. 그것이….”

    조금은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는 상선의 모습에 왕의 주름이 금세 좁혀졌다.

    “응? 어찌 말을 못 해?”

    “버드나무 가지로 그것도 길가에서 종아리를 쳤다 하옵니다.”

    “뭐라?”

    “한데, 한두 대가 아닌지라 상황이 좀 그러하옵니다.”

    “뭘 얼마나 회초리질을 했길래 그러느냐?”

    상선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작게 고하였다.

    “부러진 버드나무 가지가 수북하게 쌓였는데, 그 개수를 세어보니 족히 열 가지는 되어 보인다고 했사옵니다.”

    “이런. 그 아이는 괜찮다 하더냐?”

    “맞는 동안 신음 한번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하옵니다. 한데 내의원에서 어의가 모두 모른 척하여 동백궁 수규가 약만 겨우 받아다 돌아갔다고 하옵니다.”

    “이런 괘씸한 것들. 감히 세자의 후궁이건만!”

    노기 서린 왕의 말에 상선은 더욱 고개를 몸을 수구려 왕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 부분은 누구의 입김이 닿은 것인지,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사옵니다.”

    “그리하도록 하고, 상선이 직접 상처가 난 곳에 좋은 약을 지어 동백궁에 몰래 전하고 오거라.”

    “예, 전하.”

    상선이 물러가자 왕도 왕좌를 털고 일어섰다.

    “고약한지고. 후궁이 몇이나 되는 것도 아닌 것을. 벌써 저리 투기한다면 장차 중전의 자리에 오르면 내명부가 시끄러워지겠군. 하여간 못돼먹은 것이 좌의정을 쏙 닮았구나, 세자빈. 좌의정의 그 피를 물려받았는데 내 망각하였어.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겠군.”

    ***

    궁 밖 좌의정 가택에 모인 몇몇 대신들은 오늘 편전에서 있었던 일을 불만해 토로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설변도가 손 안에서 굴리던 호두가 아작 으스러졌다.

    “음, 내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고 전하께서 이 사람을 업신여기는구려.”

    “대감, 이대로 있어도 되는 겝니까? 이러다 동백궁에서 먼저 후사라도 얻으면….”

    꽝!

    책상을 내려친 그의 주먹에 요란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곳에 모인 대신들은 모두 좌의정을 따르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라, 본인들 앞날이 창창해지려면 어떻게 해서든 세자빈에게서 후사가 태어나야 한다.

    “그리되면 안 되지, 천것이라 하였거늘… 분명 세자의 농간이 있었을게요. 이는 뒤를 더 파야 할 것 같소이다.”

    설변도는 자신의 여식을 찬밥신세로 여기는 세자가 괘씸했다. 어지간해서는 입궐한 제가 찾아가도 만나지 않는 여식이 서신을 보내왔다. 제가 조정에 나가지 않는 동안 세자가 깜찍하게도 계집을 데려왔단다. 한데 그 계집 때문에 여식이 힘들어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대비의 명으로 일전에 천한 거지를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계집이었다. 그때 제 수하가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면, 그 계집이 궁에 들어갈 일도 제 여식이 마음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자란 놈들이 그깟 계집 하나 없애지 못해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만드는구나.’

    분명 계집을 처리한다고 나간 사병만 족히 열댓 명은 될 터인데, 여태 돌아온 놈들이 없다. 계집과 노승 하나만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어떻게 살수와 같은 제 사병들을 뚫고 살아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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