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세자빈의 횡포
설변도는 심기가 벌써 불편해졌다.
‘감히 내게 고개만 까딱여?’
어딘지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내의 어조에,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하나, 내색하지 않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소이다. 자, 이리로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 사내가 가볍게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그의 뒤 어둑한 공간에서 검은 복면을 쓴 호위들이 절도 있게 차를 준비해 탁자에 내려놓았다.
“성라국의 최상급 연잎 차입니다. 들어보세요.”
설변도는 마시는 척만 하고 내려놓았다.
그것을 예리하게 본 진여가 피식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왜요? 독이라도 탔을까 염려됩니까?”
“음. 성라국의 실세인 부마가 나 하나 중독시켜 얻을 것이 무에 있다고. 하나, 그런데도 이 사람은 만사에 조심을 기하는 성품인지라… 부마가 이해해 주시오.”
둘러대는 설변도의 말에 진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들은 것보다는 훨씬 더 신중한 분이군요, 설 대감께서는. 음, 차도 마시지 않는다고 하니, 하면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설변도는 뒤에 서 있는 병조판서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병조판서는 자신이 들고 있던 함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별것 아니나, 작은 제 성의입니다.”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놀란 얼굴로 함을 열어본 진여가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그 모습에 설변도는 내심 속으로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럼 그렇지. 햇병아리 같은 것을 상대하려면 그에 맞는 것을 준비해야지.’
하지만 설변도의 웃음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이런, 정말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려.”
“…부마, 지금 내 성의를 무시하는 게요?”
바로 불쾌함을 드러내자, 진여는 함의 뚜껑을 손가락으로 톡 내렸다.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거칠게 닫혀버렸다.
이내 의자에 거만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진여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달리 뱀처럼 가늘어졌다.
“설마, 그대가 향후 얻게 될 막대한 부당 이득을 이깟 것으로 퉁 치려고 가져온 겁니까? 별것도 아닌 이딴 것으로 내가 뭔가를 해주길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뭐 하는 게요? 우린 서로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거래를 하러 온 줄 아는데?”
“거래라… 처음 내가 설 대감에게 서신을 보낼 때만 하여도 거래라고 생각하였지. 하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뒤바뀐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 게요?”
꽝!
탁자를 내려치며 설변도가 흥분하자, 이내 진여의 뒤쪽에 있던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이런, 이런. 설 대감, 흥분하지 마시오. 그대가 흥분하면 내 호위들은 더 흥분한다오. 내, 빈말이 아니라 이들이 흥분하면 나도 막지 못한다오.”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진여가 미소를 짓자, 설변도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분명 전해 듣기론 성라국 부마란 자는 사내치고 곱상하게 생긴 얼굴로 공주의 환심을 사, 지금의 부마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 그가 무슨 재주로 3년 사이 조정을 장악하고, 그 실세가 그들의 왕을 넘어섰다고 들었다. 하나, 그래봤자 조정에서 세월을 보낸 제 앞에서는 그저 하룻강아지 같은 자다. 해서 다루기 쉬운 상대라 여겼거늘, 제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 말이 도는지, 몇 마디 나눈 대화만으로 알 수 있겠군.’
“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린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하기로 하였소. 잊은 게요?”
설변도도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차분하게 그를 회유하려 했다.
“잊지 않았소이다. 하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여식인 세자빈을 위해 또 그대의 이익을 위해 화월국을 내게 팔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팔다니! 거, 같은 말이라도 흐음… 난 그저 화월국과 성라국이 돈독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조금씩 서로에게 양보하자는 취지로….”
궤변을 늘어놓는 설변도의 말에 진여는 차가운 실소를 지었다.
저라고 이런 자를 처음 보겠냐마는.
‘좌의정이나 되는 인물이 어딘지 좀 맹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덜떨어진 것 같군.’
그래도 성라국 대신들은 재물과 권력은 탐하여도, 제 앞에서 나라를 팔자는 헛소리는 늘어놓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드는군.’
진여는 손톱 옆에 자그마한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을 입가로 가져가 뜯더니, 설변도가 보란 듯 그 앞으로 ‘퉤’ 뱉어냈다.
설변도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니 재미있다.
“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 들어나 봅시다, 설 대감.”
점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진여의 언행에 설변도도 조금은 고민하였다.
‘어린놈의 새끼, 싹수가 없이 공대도 하지 않고 너무 시건방지군. 그냥 죽여버릴까?’
그러다 또 다른 이를 물색하려면 재물과 시간을 들여 힘들게 접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참자 생각한다.
“이쪽 변방의 동보성과 매년 비단 300필을 내어주겠소.”
“내어주겠소?”
한껏 비틀어진 눈썹을 금세 풀며 진여가 되물었다.
“…!”
“난 아쉬울 게 없는데, 부탁하는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드는군요, 설 대감.”
여전히 손톱 옆 거스러미를 이로 뜯으며 불만을 드러냈다.
“내 입장도 고려해 주시오. 아무리 내 이득을 취하려 그대와 손을 잡아도 난 화월국의 좌의정이오. 이번 일만 성사되면, 내 그대가 섭섭지 않게 후에 더 많은 선물을 보내드리리다.”
백번 양보하여 땅덩어리도 아닌 성하나를 통째로 주겠다는데도, 거만하고 시건방진 태도에 설변도도 조금씩 인내심을 잃어갔다.
설변도의 제안에도 약 1각 정도의 침묵을 한 진여가 생각을 마친 것인지, 이내 처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화를 더 해봤자, 서로 생각하는 바가 틀리니 이쯤 해서 마무리 지읍시다. 만약 거래에 생각 있다면, 여기에 수결하시오, 설 대감.”
문서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을 들어 읽던 설변도의 눈썹이 불만을 토로하듯 삐딱하니 틀어졌다. 거만한 그의 태도만큼 힘 있는 서체로 채워진 내용은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었다.
“이보시오, 부마도위!”
그도 그럴 것이 진여가 내놓은 조건이 터무니없었다.
난공불락의 성인 동보성과, 수환성 두 개에 매년 화월국의 우수한 비단 500필과 향료 50단지를 원하고 있다.
“싫습니까? 난 그 조건이 아니면 이 거래에 응할 생각 없습니다. 아! 그렇다고 진행하려던 일을 멈출 생각 또한 없습니다.”
씨익 웃는 아름다운 얼굴에 소름이 끼쳤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이가 된 기분이랄까!
“…!”
그의 말에 설변도는 이를 으득 갈았다. 거래에 응한다면 짜고 치는 도박처럼 전쟁을 벌이되, 서로의 이득을 취하는 즉시 전쟁을 멈추겠지만, 자신이 내민 거래조건에 응하지 않는다면 애초 계획했던 대로 실제 전쟁을 일으켜 화월국을 먹어 치우겠다는 속셈이다.
얼굴 가득 못마땅함으로 노려보는 설변도를 본, 진여는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나가려 했다. 설변도의 어깨를 스치던 진여가 그를 힐끗 보고는 나지막하게 한마디 하였다.
“설 대감, 너무 서운하게 생각 마시오. 그대의 검은 속내를 단번에 파악했듯 그대 또한 내가 어떤 이라는 것을 알았을 터인데… 한데 말이오.”
“흐음.”
못마땅하고 화가 난 설변도가 분을 참느라 헛기침을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몇 마디 대화만으로 이미 서로를 파악했다.
“난 그대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무척이나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이라오. 하니, 생각이 바뀐다면 그 문서에 수결하여 보내시오. 하면 나도 수결하여 같은 문서를 보내드리지요.”
“…!”
“참고로 난 인내심이 그다지 없는 사람이니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마치 네가 별수 있겠냐는 듯, 진여는 끝까지 저를 조롱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오두막을 나갔다. 어처구니없는 대우에 설변도는 분노가 치밀어 탁자를 거칠게 밀어 넘어뜨렸다.
“대감!”
병조판서가 다가와 진노한 설변도를 걱정스레 불렀다.
“듣던 것보다도 더 뱀같이 교활한 자로고.”
“대감, 아무래도 전쟁은 포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참에 차라리 국경을 더 강화하여 저들의 횡포를 막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대감의 공이 되니….”
홱 날카롭게 병조판서를 노려보는 설변도의 눈빛이 붉게 변하였다.
“실없는 소리! 1할이나 3할이나 어차피 손해를 봐야 그만큼 이득을 취할 수도 있을 터! 건방진 세자와 여전히 날 멀리하려는 왕의 콧대를 누르고, 우리 사람들로 채우려면 전쟁밖엔 답이 없네.”
‘내어줄 땐 내어주더라도 추후 되찾아오면 그만이다.’
“하나, 그자가 원하는 것이 너무 큽니다. 솔직히 성 하나도 무리이건만, 화월국을 지키는 제일 큰 난공불락의 동보성과 수환성 두 개의 성을 내 줄 수는 없습니다. 추후 저들이 딴마음을 먹어, 화월국을 침략하게 되면 그대로 도성까지 뚫리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병조판서의 염려에도 설변도는 이리저리 자신이 취할 이득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을 하느라 눈알이 바쁘게 움직였다.
“동보성과 수환성이라….”
조금, 아주 조금 위험한 거래이긴 하다.
두 개의 난공불락의 성을 내어주면, 그리고 병조판서의 말대로 그들이 딴마음을 먹게 되면 화월국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쉬이 포기할 수 없어. 뭐든 때가 있는 법이지.’
자신이 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때,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런 계책 따위 할 수도 없다.
“대감.”
“부마도위에 대해 아는가?”
“듣기로는 고씨 가문의 양자라고 합니다.”
“양자? 양자가 부마도위가 되었다고?”
삐딱하게 고개를 돌린 설변도가 병조판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예. 오래전, 고씨 가문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후처라도 들여야 하나 고민할 때 업둥이로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그 외엔 부마도위가 어찌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는지 모두 쉬쉬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람을 풀어 고씨가문과 부마도위의 과거, 또 지금 벌이고 있는 것들, 약점이 되는 모든 것들을 알아 오게.”
“예, 대감.”
바닥에 떨어진 문서를 집어 든 설변도의 눈빛이 예리해진다.
“일단 돌아가서 신중히 생각해 보세.”
말은 그렇게 해도 설변도의 마음은 이미 넘치는 권력욕에, 진여 그자의 제안에 넘어가고 있었다.
***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은 두화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며 눈물을 흘리던 맹지가 달려와 피범벅이 된 두화의 다리를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다리… 살이 다 터졌사옵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의를 불러… 흐흑.”
고통을 참느라 머리가 흠뻑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린 두화가 엉엉 우는 맹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난 괜찮아. 그만 울어.”
“보는 제가 다 아픈데 어찌 괜찮다고 그러십니까? 제가 얼른 저하를 모시고….”
“뭐 하러 이런 일을 저하께 알려, 됐어. 그냥 상처만 덧나지 않는 약만 가져다줘.”
두화는 오히려 세자빈의 회초리질 때문에, 조금 전 연무장에서의 답답한 기분을 잊을 수 있었다. 일어서는데 훅 밀려드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였다.
‘윽, 더럽게 아프네. 그냥 확 받아버리고 담을 타서라도 나갈 걸 그랬어.’
맹지는 여전히 울면서 두화를 부축해 천천히 동백궁으로 이끌었다.
침소에 들어서자 두화는 맹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역시 방에 오니까 편해서 그런가, 졸리다.”
‘며칠 지났다고 이 방도 익숙해졌네.’
그대로 혼절한 두화를 애타게 부르던 맹지는 다급하게 내의원을 찾았다. 하나, 일전에 후궁 마마를 봐주었던 신 어의는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동백궁으로 가자 하지만, 다들 외면한다. 발을 동동 구르던 맹지가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무엇 때문에 동백궁에 가지 않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럼 상처에 좋은 약이라도 내어 주십시오.”
다들 외면하는 가운데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혀를 차며, 약재와 바를 수 있는 약을 쥐여주었다.
“그러게 왜 웃전에 미움을 받아서… 가지고 가시게.”
“웃전에게 미움이라니요? 그럼, 다들 나 몰라라 하시는 게….”
“대비궁에서 명이 떨어졌네. 세자빈 마노라에게 불경하게 군 동백궁에 달포 동안 그 어떤 약도 내주지 말고, 진맥도 하지 말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