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 이야기는 더는 꺼내지 말아라.
궁에 들어와 처음 보는 두화의 환한 미소에 자한도 덩달아 즐겁다.
그녀가 바로 활을 잡아 들고는 이내 쏘아 날렸다.
날아간 화살이 꽂힌 걸 본 자한은 못 믿겠다는 듯 과녁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때요, 놀라셨죠?”
“허허, 그래. 솔직히 놀랐느니. 활을 들지도 못할 줄 알았건만 내가 날린 화살을 반으로 쪼갤 줄이야 더더욱 몰랐다. 인제 보니 화월국 제일의 명궁수였구나.”
“과찬이시옵니다. 하면 내기엔 제가 이긴 것이죠?”
이 틈에 두화는 확답을 받으려 했다.
“그건 아니지. 세 발 중 한 발을 쏘았으니, 아직 내게도 쏠 기회는 남았다.”
“예. 쏘십시오.”
자한은 그녀의 활 솜씨에 놀라긴 했으나, 그 또한 활쏘기에 누구한테도 져본 적이 없다.
자신만만하게 활을 잡아 쏘았다. 이내 날아간 화살은 두화가 쏜 화살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두화도 조금은 놀란 눈치다. 그리고 이 한발이 두화의 평정심을 흔들어 놓은 모양이다. 마지막 세 발째에서 두화는 정중앙을 살짝 비켜 맞추었다. 그리고 자한은 또다시 정중앙을 맞히었다.
“저하가 이기셨네요.”
풀이 죽어 말한다.
“처음부터 난 이리될 줄 알았느니.”
“예, 예. 하면 저하의 소원은 뭔데요?”
“글쎄다. 이 소원은 좀 보류해야겠구나. 언젠가 말할 테니 꼭 들어줘야 한다.”
“예. 약조는 약조니까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톡톡 땅을 발끝으로 차는 그녀의 모습에 자한은 혼자 피식 웃었다. 궁에 들어와 내내 멍한 표정이던 그녀가 지금은 시시각각 다양한 표정으로 웃고 토라지기까지 한다.
“혹, 말도 탈 줄 아느냐?”
“뭐… 조금요.”
“못 하는 것이 없군. 우리가 처음 봤을 때 말이다. 그저 꽤 왈가닥한 낭자구나 했다. 사내 둘을 때려눕히는데, 그런 모습은 처음 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구나.”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사내 둘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또 낙화놀이 하는 곳에서 그와 다시 만났을 때, 그의 존체에 손을 댔다. 그것도 감히 뺨을 때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저하, 그 이야긴… 하지 마세요.”
고개 숙여 어쩔 줄 모르는 두화의 반응이 그저 재미있다.
“내 얼굴에 손을 댄 여인이 네가 처음인데, 어찌하지 말라 하느냐?”
“죄송해요. 그땐 상황을 벗어나야 했어서….”
“하긴, 내게 덤터기까지 씌워 뺨을 때리기까지 하면서 얼마나 뻔뻔하게 나오던지,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아니, 용서하여 잊은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속에 꽁하니 감추고 있었네그려.
“예, 저는 그리 뻔뻔한 여인네네요. 그런 뻔뻔한 여인네가 좋다고 고백하신 분이 누구시더라?”
삐친 듯 뽀로통한 얼굴로 톡 쏘아대니, 피식 웃으며 두화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간 품까지 거의 안기다시피 하였으나, 자한은 부러 거리를 좀 남겨 두었다.
찰나 놀란 듯 두화의 얼굴은 어느새 붉은 홍조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 사내인가 보구나. 이리 뻔뻔하고, 이 손이 꽤 매운데도 좋은 걸 보면 말이다.”
“…!”
얼굴이 더 벌게지는 걸 보니 농을 더 해서는 아니 되겠다.
“이러다 얼굴이 홍시가 되겠어.”
미소를 지은 자한이 그녀의 콧등을 톡 치며 물었다.
“몸이 날렵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무예도 좀 하는 것 같고, 활도 쏠 줄 알고, 말도 탈 줄 알고 못 하는 것이 없구나. 설마, 검까지 다루는 것은 아니겠지?”
“활보다도 검술을 조금 더 잘해요, 제가.”
놀라 신기하게 바라보는 세자의 모습이 재미있던 두화가 다시금 밝아진 얼굴로 대꾸하였다.
“내친김에 대련 한번 하시겠어요, 저하?”
“그러다 다친다.”
“설마요. 저하께서 저를 다치게 할 것 같진 않은데요.”
‘살인귀라 불리는 백 장군님과도 겨루었던 접니다. 물론 운 좋게 살아 나왔지만….’
“나중에 그만하라고, 부탁하여도 소용없다.”
마치 간식거리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레하는 그녀의 표정에 자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뭇 여인들은 자수나 여인의 덕목을 기르는 서책을 읽지, 사내들이나 즐기는 이런 것은 멀리한다. 한데 두화는 정반대이지 않은가. 하긴, 처음 사내들을 때려눕히는 걸 보고 왈가닥 같은 성격이겠거니 했다.
검 두 자루를 가져온 자한은 이내 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그 차림으로 대련할 수 있겠느냐?”
“그러고 보니 치마를 입고하기엔 좀 그러네요. 음… 아! 이리하면 되지요.”
망설이는 기색 없이 두화는 치마를 훌렁 걷어 올려 허리를 묶던 장식용 끈으로 묶었다.
속바지가 훤히 드러난 모습이 마치 저자의 풍물패나 광대들 같았다. 지척에 있던 맹지가 놀라 하얗게 뜬 얼굴로 달려왔다. 하지만 자한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달려오는 맹지를 손으로 오지 말라 저지하였다.
“뭐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괜찮을 듯싶어서요. 안 돼요?”
두화는 새삼스레 머쓱해서 웃었다.
“된다. 한데 나하고 있을 때만 이래야 하느니.”
“예.”
두 사람은 검을 쥐고 서로를 탐색하였다.
지켜보던 궁인들은 보나 마나 세자가 져주겠거니, 여인이 무슨 검술을 하겠느니 라며 두런두런 속닥거렸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맹지는 행여 다른 궁인들이 이 모습을 보고 또 소문이라도 낼까 그것이 염려되었다. 하여, 계속 두리번거리며 입 싼 궁인이 있나 혹은 염탐하는 궁인이 있나 주위를 경계했다.
챙!
맞닿은 차가운 금속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두화는 오래간만에 푸는 몸에 신이 나기도 했지만, 만만찮은 그의 검술에 지기 싫었다.
‘이리 움직여도 발목에 통증이 덜 한 거 보면 거의 나은 모양이네.’
여러 겹의 의복이 거슬리긴 했지만, 자유롭게 허공을 가르고 날아올라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었다. 발목 때문에 조심스럽게 움직이긴 하지만, 확연하게 줄어든 통증에 두화는 대련에 조금 더 집중해 움직였다.
공격하는 자한과 그걸 또 막은 두화의 시선이 엇갈린 검 사이로 팽팽하게 마주쳤다.
“제법 하는구나.”
“제가 그랬잖아요. 활보다는 검을 더 잘 다룬다고!”
“검을 좋아하는 여인이라. 조금은 무섭구나.”
그의 농에 두화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좀 무서워해 주세요.”
“그래, 무섭다. 되었느냐?”
이마에 땀이 송골 맺힌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면… 내보내 주셔요, 저하.”
‘그 말이 더 무섭구나, 두화야.’
즐겁던 순간이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다.
순간 검을 거둬들인 자한이 몸을 돌렸다.
“저하.”
갑자기 검을 거둬들여 당황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 이야기는 더는 꺼내지 말아라. 내 방도를 찾고 있으니….”
“저하?”
“그만!”
“…말뿐인 건 아니고요?”
홱 돌이켜 성큼 다가온 그가 조금은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봤다.
“내가… 찾고 있다 하였다.”
차가운 눈빛에 지난날, 풍시전에서 겪었던 것처럼 심장이 그냥 욱신거려온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쯤이면 되는데요?”
“넌…!”
조금 전까지도 즐거웠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두 사람 사이엔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때였다.
멀리서 사림이 다급하게 자한을 찾았다. 다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은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저하께서 염려하시던 일이 지금 편전에서….”
“준비하라던 그것은!”
“마침 소신이 가져오는 길에 편전의 일을 전해 받고 곧장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그럼, 되었다. 가자.”
사림과 속삭이던 자한이 두화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이만하자. 맹지야, 소훈을 그만 동백궁으로 모시거라.”
차갑게 말한 자한은 두화의 외침을 무시하고 사림과 함께 연무장을 떠났다.
“답은 주셔야죠, 저하!”
조금은 개운해지던 두화의 기분이 도로 갑갑해진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안고 동백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하기 싫은 사람과 마주쳤다. 두화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세자빈 마노라를 뵙사옵니다.”
“지금 어딜 다녀오는 것이지?”
“답답하여 산보를….”
“감히 이젠 거짓말까지 하느냐?”
순간 고개를 들어 세자빈을 바로 바라봤다.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옆으로 쓰러지고 만다. 생각도 못 한 일을 당한지라 너무도 황당하여 세자빈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저하와 연무장에 있었다면서, 어디서 거짓이냐?”
저하와 그리 헤어져 가뜩이나 가슴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은데, 따귀를 맞고 나니 울컥 속에서 뭔가가 치솟았다. 잘못했다 하면 끝날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두화는 감히 세자빈에게 대들었다.
“예. 연무장에서 나와 지금은 답답하여 산보를 하다가 동백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소인은 결코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어딜 다녀오느냐 하문하시기에 지금 산보 중이니 그리 답을 올린 것뿐이옵니다.”
전보다 제게 날을 세워 대꾸하는 두화에게 련하는 짜증이 확 올라왔다.
“네년이 감히 웃전을 똑바로 보고 말대답을 하는구나. 여봐라, 저년을 잡아라.”
련하의 명에 뒤에 있던 궁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두화를 제압하였다.
‘아… 그냥 확 뒤집어 버리고, 그냥 궁을 나가?’
잠시 그런 고민을 하였지만, 그리되면 맹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고, 궁을 나가기도 전에 잡혀 더 큰 고초를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염병,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네.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걸 보니… 에이, 그래 오늘만 참자, 내가 참는다, 참아!’
맹지가 나서 보려고 했으나, 맹지 역시 궁인 둘에게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초아야, 저기 버드나무 열 가지를 꺾어 오거라.”
잠시 후 초아가 열 개의 나뭇가지를 꺾어왔다.
개 중 튼실한 나뭇가지를 들어 올린 련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품위 있게 몸을 돌린 련하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장차 내명부 주인이 될 내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감히 눈 똑바로 보고 말대답을 할까? 해서 이제부터 나의 지엄함을 보일 것이니. 여봐라, 저년의 치마를 들쳐 맨다리를 보이게 하여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속바지까지 걷어 올려 두화의 맨다리가 드러나자, 그 모습에 입꼬리를 끌어올린 련하가 느릿하게 다가갔다.
이내 두화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쫙! 쫙!
종아리에 회초리가 닿을 때마다 파열되는 그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하나, 두화는 비명은커녕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만 해도 벌써 여섯 가지째.
‘이래도! 그래, 네년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꾸나.’
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는 모습에 련하는 화가 나 더 힘껏 내려쳤다.
담담한 표정의 두화를 보며, 오히려 제가 더 마음이 초조해지고 분해서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이젠 제 팔이 더 아플 지경이다.
‘독한 것!’
마지막 열 개의 회초리가 모두 부러지고 나서야 거친 숨을 내뱉은 련하가 비틀댔다. 냉큼 초아가 부축하였다.
“앞으로 내게 거짓도 말대답도 아니 된다. 장차 내명부 주인인 내게 어찌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하여라. 오늘처럼 멍청하게 굴면 네 몸이 혹사당할 것이야.”
시야에서 세자빈이 사라지고 나서야 두화는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
한편 설변도와 병조판서는 밤새 말을 타고 이동하였다.
산기슭에 말을 세워두고 약속된 장소로 걷기 시작했다.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 우거진 수풀과 나무 때문에, 이동하는 사이 훤한 아침이 되었는데도 귀신이라도 출몰할 듯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드디어 도착한 오두막 앞에 선 병조판서가 조금 긴장한 듯 설변도에게 붙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감, 정말 괜찮을까요? 자칫 우리를 치기라도 하면!”
그런 병조판서가 마음에 안 든 설변도가 낮게 윽박질렀다.
“사내가 되어 이런 일에 배포가 그리 작아서는 어찌 이 사람과 일을 도모하겠다고!”
“아니 난… 흐음, 알겠습니다. 나야 뭐 대감만 믿고 따릅니다, 그려.”
혀를 낮게 찬 설변도가 앞장서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병조판서도 손에 든 함을 꼭 들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내부는 희미한 촛불 하나 켜져 있을 뿐, 무척 어두웠다.
탁자 앞으로 가서 서자,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사내가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면사로 가려진 방립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희미한 촛불에 그의 귀와 목에 걸려 있던 장신구가 번쩍거렸다.
조금은 과할 정도로 화려한 사내의 외모에 설변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 대감이지요? 이리 보는 것은 처음이군요. 나, 성라국 부마인 진여라 하오.”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