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7)화 (37/96)
  • 37. 난 아팠다, 그날

    반 시진도 넘게 서 있었다는 말에 화가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

    분명 답은 맹지에게 하였으나, 그 차가운 눈빛은 세자빈을 향하였다.

    련하는 싸늘한 지아비의 눈빛에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차라리 허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서였을까?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댔다.

    초아가 냉큼 다가와 부축하였다.

    “내 그동안 세자빈을 오해했나 보군.”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말에 련하는 가슴이 욱신대며 옥죄였다.

    “저, 저하. 저는….”

    “되었소. 어느 때는 말이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도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고 했소. 내 지금 그것을 실감하게 되었소.”

    아니라고, 모든 것이 오해라고, 련하는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떼려 하였다. 하지만 세자는 더없이 냉혹한 눈으로 저를 바라봤다.

    “그래도 그대는 권세만 쫓는 그대 부친과는 다르겠지, 하여 그간 표현하진 않았으나, 그리 믿고 싶었소. 한데 이 아이가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무 힘없는 후궁을 투기하여 이런 모습이 될 때까지 훈계해야만 했소!”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너무도 확고한 세자의 냉혹한 눈빛에 말문이 터지지 않는다. 결국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하! 누가 보면 더없이 지고지순한 세자빈을 한낱 후궁을 총애하여 구박하는 세자로 보겠구려.”

    “저, 저하!”

    제발, 제 말 좀 들어 달라고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채 올려다봤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어느새 넘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제야 후궁을 안고 멀리 사라지는 세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찌 제게 이리 박정하게 구시옵니까? 저 아이의 무엇이 그리도 관심이 가십니까? 그저 한낱 계집일 뿐인데, 세자빈인 제 앞에서 꼭 그러셔야 했습니까?’

    채 마르지 않은 눈빛은 어느새 표독스럽게 바뀌고 있었다.

    ***

    두화의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세자의 얼굴이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동백궁의 침소다.

    “괜찮으냐? 어의 말로는 심신이 약해진 상태에서 너무 오래 햇볕에 노출되어 그렇다고 하더구나.”

    일어나 앉았다.

    어의 말대로 너무 오래 햇볕에 서 있었나 보다. 어지럼증이 확 느껴 이마를 짚자,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지려 한다.

    순간 그가 부드럽게 몸을 감싸 품에 기대게 하였다.

    “아직도 어지러운 게냐? 맹지야, 약을 들이거라.”

    잠시 후 맹지가 탕약을 가져왔다.

    자한은 손수 한 수저 떠 두화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리 주셔요. 제가 먹을게요.”

    “나도 되었다. 어서 아 하거라.”

    “저하.”

    “이렇게 내빼는 건 너답지 않다.”

    입술에 닿은 수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쓴맛 때문에 인상을 확 찌푸리자 그가 작게 웃는다.

    “다 먹으면 당과를 내주마.”

    “제가 뭐 아이입니까?”

    이제야 평소처럼 툴툴대는 그녀로 돌아왔다.

    자한은 약을 한 수저씩 떠먹이면서도 낮의 일을 떠올렸다.

    세자빈도 좌의정과 다를 바가 없다고 결론이 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아이가 뭘 어쨌다고 불러 괴롭히냔 말이다.

    만약 그때 중전이 세자궁을 찾지 않았더라면….

    두화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거나 더한 핍박을 당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또 어쩐 일이시옵니까?

    -아들을 보러 오는데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한답니까? 세자.

    여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중전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불편할 뿐이다.

    -중전마마, 갑자기 이리 친근하게 대하시니 소자 무섭습니다.

    -이런, 내 좋은 마음으로 왔거늘, 세자는 여전히 날 내치십니다. 그려.

    -그럴 리가요. 좋은 날씨에 괜히 소자 때문에 기분을 망치실까 봐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중전마마.

    -그래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해서 내 덕을 좀 베풀까 해요.

    -제게 말이옵니까?

    -조금 전 내,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고 와서 말입니다. 이 모후가 무엇에 그리 흥미로웠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세자?

    이때까지만 하여도 자한은 중전이 쓸데없는 소리로 자신과 입씨름을 하려고 왔겠거니 여겼다. 한데!

    -우리 여리고 온화한 세자빈의 새로운 면모를 봤습니다, 그려. 세자빈도 여인은 여인이구나 싶은 것이, 처음 맞이한 연적에 아주 독기를 내뿜더군요.

    -… 설마, 그 아이에게 해코지라도 한 것입니까?

    -글쎄요. 난 좀 전에 나와서 지금은 어찌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솔직히 의외였다.

    중전과 저는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다. 한데 지금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조금은 당황스럽다.

    -제게 알려주신 연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땡볕에 서 있던 그 아이가 그냥 좀 가여워 보여서 말입니다.

    가여워 보일 정도로 그녀를 핍박하고 있던 것인가, 세자빈은!

    그때부터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두화가 다치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세자빈궁을 향해 뛰었다. 세자궁과 비교적 가까운지라 금세 도착하여 본 것에, 자한은 세자빈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감히 아랫것에게 두화를 손찌검하라 시키다니!

    역시나 좌의정 가문과는 절대 섞여서는 안 된다.

    아까의 일을 떠올린 자한은 문득 중전이 왜 제게 귀띔해 주었을까에 대해 또 의문이 든다.

    “저하, 저하?”

    “아, 그래.”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내 좀 더 네게 신경을 써야 했거늘… 그랬다면 아까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저를 걱정하는 그를 보자니, 마음이 싸하게 아리는 것이 이상하다.

    ***

    “그 일은 어찌 되어 가느냐?”

    “저하, 오늘 중으로 완성된다고 하옵니다.”

    사림의 말에 자한은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데 이러다 발각되면….”

    당연히 사림 저는 엄한 벌을 받을 것이고, 세자 또한 그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더구나 동백궁 마마는 궁 밖으로 내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있는 네게 시켰고, 너 또한 입이 무거운 자에게 맡겼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만약….”

    “그 전에 발각되더라도 그 모든 걸 무마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지.”

    궁에서 두화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준비를 자한은 조금씩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동백궁에 들른 자한이 두화의 두 눈을 가리개로 가린 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두화는 혹 궁을 나가는 것인가 하여 기뻐 물었다.

    “저하, 드디어 저 나가요?”

    “…아니니라.”

    ‘넌 아직도 나갈 생각만 하는 것이냐, 두화야?’

    “그럼, 어딜 가는데 눈까지 가린답니까?”

    출궁하는 줄 알았는지 실망한 듯 말하는 두화 때문에, 자한의 얼굴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의 눈을 가렸으니 망정이지, 그 두 눈을 보며 나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그녀를 마음 가득 담아 은애하는데, 왜 그녀에게서 제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 땐 서운함을 넘어 이토록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서로 은애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 것이냐?’

    씁쓸한 기분을 속으로 삭였다.

    그녀를 이끌어 그 장소까지 가는 내내, 자한은 부러 주변에 보이는 것들을 말로 설명하여 주었다. 그러자 차츰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흐른다.

    “다음날은 저 앞에 보이는 화영전에서 차를 마시자꾸나. 주위에 꽃과 작은 못도 있어 눈이 제법 즐거울 게다.”

    “화영전하니 풍시전이 생각나요.”

    “그래?”

    “그때… 풍속범 잡을 때 저하는 누각에서 보고 계셨죠?”

    “…어떻게 알았느냐?”

    부드럽게 올라간 입술에 시선이 머문다.

    붉은 과실을 깨문 듯한 입술이 벌어진다.

    “이래 봬도 저 자신은 지킬 수 있을 만큼 무예는 하거든요. 그런데 그때 다 보셨으면서도 제게 왜 그렇게 모질게 구셨는지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저하.”

    “내가 모질게 굴었다고?”

    그날의 일이 아직도 가슴에 콕 박혀 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심장을 콕콕 찌르는 이상한 기분 때문에, 지금도 답답하여 두화는 뽀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군님하고 배에서 내려 저하랑 마주했을 때, 아니 그전에도 유독 그날따라 차갑게 천것이라고 몇 번을 부르셨잖아요. 아, 물론 제가 천것인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저하의 차가운 말 때문에 그날 젖은 몸이 더 추웠어요.”

    “…!”

    저를 생각하였다는 말과 같다.

    자한은 가만히 두화를 바라보다가 잡은 팔을 당겨 품에 안았다.

    “저, 저하!”

    “해서 마음이 조금은 아팠냐?”

    “예? 제가 왜 마음이 아파요?”

    “난 아팠다 그날. 아무리 풍속범을 잡으려고 해도 그렇지, 민망하게 벗은 몸으로 백 장군의 의복을 걸치고 있던 것도 화가 났고, 무엇보다 내겐 가르쳐주지도 않았던 네 이름을 백 장군이 부르더구나.”

    “아… 그건!”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내와 말 섞는 것조차 싫다. 그게 백 장군이라면 더더욱 싫고.”

    “예?”

    당황스럽다는 듯 되물어오는 그녀의 입술에 벌처럼 빠르게 입맞춤을 하였다. 뒤따르던 궁인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몇 발 뒤로 물러났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정말?”

    ‘남사스러워 죽겠네, 정말. 침소도 아니고… 아니, 그게 아니잖아 지금!’

    궁 한복판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요!

    풍속범이 달래 풍속범이냐고요?

    길 한복판에서 이런 남사스러운 짓을 하는 것도 풍속범과 뭐가 다르냐고요, 저하!

    “보면 좀 어떠하냐?”

    “…저하.”

    ‘전 나가야 해요. 아니, 반드시 나갈 거예요. 한데 왜 자꾸 제 마음을 벌집 헤집듯 헤집으셔요? 왜 자꾸 꿀처럼 달곰하게 대해주시는 건데요?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면 저는 어쩌라고….’

    “거의 다 왔으니 얼른 가자.”

    덥석 손을 잡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잡힌 손에 열감이 피어오르는 건 순전히 제 착각이겠지.

    왜냐면 지금 그의 온기가 닿은 손에서부터 얼굴까지 열이 오르니까 말이다.

    두화는 그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어 심란하기만 하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다 왔나 보다.

    제 양어깨를 잡은 그가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시야가 주변을 담아 서서히 적응할 때쯤 이곳이 연무장에 딸린 활터라는 것을 알았다.

    “반 시진 동안은 이곳에서 놀자꾸나. 궁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다가 동백궁에만 갇혀 있으려니 답답할 듯싶어, 이곳에서 활이라도 쏘면 좀 어떨까 하여 왔다. 한데 활은 쏠 줄 아느냐?”

    ‘자꾸 이러시면 저도 제 마음을 마음대로 못 잡아요, 저하.’

    감히 넘볼 수 없는 분이거늘, 어쩌자고 일을 이리 키우십니까?

    어쩌자고 자꾸만 제 마음을 흔들어 놓으십니까, 저하.

    그와 있으면 설레는 동시에 답답한 마음에, 벌써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활쏘기라… 그냥 노는 건 재미없고, 내기를 걸면 어떨까요?”

    “활도 쏠 줄 알고, 제법이구나. 한데 내기라. 감히 날 상대로 말이냐?”

    “자신 없으세요?”

    도발하는 두화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튕긴 자한이 먼저 활을 잡았다.

    “세 발을 쏘아 높은 점수를 낸 사람의 소원 들어주기니라.”

    “소원… 좋아요, 저하. 지금 한 약조 꼭 지키셔야 해요.”

    “물론! 너야말로 지키거라.”

    조금 전까지도 장난기 가득한 그가 이내 진중하게 과녁을 보고 활시위를 팽 놓았다.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력으로 날아간 화살이 과녁 정중앙을 꿰뚫었다.

    “와, 잘 쏘시네요.”

    으슥한 자한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두화에게 활을 넘겼다.

    “내가 이정도니라.”

    “그럼, 저도 간만에 힘 좀 써보지요.”

    자한은 솔직히 두화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제 앞에서 허세를 부린다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여인들은 활을 잡지도 않거니와, 활을 쏠 줄 아는 여인이라도 웬만해서는 좀 더 가벼운 각궁을 쓴다. 하여 그녀의 부질없어 보이는 만용에 웃음이 났다.

    ‘이리 당차면서도 귀여우니 내 어찌 네게서 눈을 떼겠느냐 말이다.’

    한데 그것은 제 오만이었다.

    힘껏 활시위를 당겨 쏘아낸 화살은 정확히 제가 날린 화살 바로 옆에 꽂혔다.

    “보셨지요? 저도 정중앙에 쏘았네요, 저하?”

    “…우연인 게지?”

    “보셨으면서 그러세요? 하면 제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드릴게요, 저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