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세자빈의 훈육
세자빈궁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는 기운에 맹지는 멀지 않은 세자궁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저하께 알리고 와? 아니지. 그러다 우리 마마만 들어가시고 난 못 들어가게 문을 잠가 버리기라도 하면 어째? 아, 진짜! 저하도 참. 그러게 진작 사람 좀 더 보내주시지.’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일 궁인 하나 보내주면 좀 좋을까, 속으로 세자에게 툴툴대며 걸었다.
잠시 후 세자빈궁에 들어선 맹지는 결국 제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소문도 다 거짓부렁이지. 사람이 온화하고 좋긴 뭐가 좋아! 우리 마마를 이리 잡는 걸 저하도 아셔야 하는데…’
세자빈궁에 들어선 두화가 땡볕에서 서서 기다린 지 벌써 반 시진은 된 것 같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자, 곁에 선 맹지가 비단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침소 밖을 지키는 궁인에게 재차 물었다.
“소훈 마마께서 오셨다고 웃전에는 고하였는가?”
“아까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초아가 들어갔으니 좀 더 기다리시지요.”
“이이!”
두화는 화를 내는 맹지의 팔을 잡아 말렸다.
“아무래도 날 길들이려는 모양이야.”
아무렇지 않게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는 웃전의 모습이 안쓰럽다.
“마마.”
“휴, 뭘 이렇게까지 한담. 난 곧 나갈 사람인데….”
“마마, 그런 말씀은 마시어요. 소인이 다시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
“됐어. 잠시 기다려라를 벌써 세 번이나 들었잖아. 뭐, 그냥 햇볕 좀 쐰다고 생각하자. 얼굴 그을기밖에 더 하겠어.”
이리 착한 분을 괴롭히다니!
더욱이 맹지는 그간 세자빈을 안쓰럽게 봐왔다. 기품은 물론 온화한 인품에 선함까지 갖추신 분이 어찌 저하에게 미움을 사는지 몰라서, 매번 세자빈궁에 들 때면 자신이 더 죄송하여 고개를 숙이곤 했다.
하여 맹랑한 초아에게 그 구박까지 받아도 세자빈 마노라는 미워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인제 보니 저하께서 사람을 잘 보신 게다.
‘저러니 냉혈한 세자 저하께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것이겠지.’
맹지가 침소 쪽을 노려보는 그때 침소 쪽에서 인기척이 나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내, 오늘 우리 세자빈에게 좋은 차를 대접받아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어마마마께옵서 흡족해하시니 저도 좋습니다.”
“어쩜 이리 말도 어여쁘게 하는지… 응? 누구?”
뜰에 서 있는 두화를 본 중전이 강한 햇살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 이런. 어마마마와 함께 있던 시간이 워낙 즐거워, 저 사람이 왔다는 것도 잠시 잊었나 봅니다. 이번에 든 동백궁 후궁이옵니다.”
“…그래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두화는 속으로 두 사람을 씹어 재꼈다.
‘뭐래, 저 아줌마는! 대비궁에서 봤으면서 모른 척하기는. 그리고 여기 온 지 벌써 반 시진은 넘은 것 같은데, 처음듣는 것처럼 뭐라는 거야? 나 왔다고 말할 때마다 기다리라고 한 사람은 거기 없었나 보지? 아무래도 여기 세자빈궁에는 귀신도 같이 사는가 봐?’
빤히 바라보는 두화를 본 중전이 근엄하게 호통쳤다.
“어디 웃전을 올려다보는 게냐? 웃전을 뵐 때는 예를 먼저 갖추고!”
카랑한 중전의 목소리가 이어지기도 전에, 두화가 먼저 선수를 쳐 바닥에 엎드렸다.
“소인이 아직 궁중 법도에 미흡하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렇다고 저리 바닥에 엎드리기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싶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던 중전은 세자빈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흠! 그냥 두시옵소서, 어마마마.”
제 곁에서 마치 제 행동을 질책하듯 헛기침하는 세자빈의 행동에, 중전은 이내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여 머리를 매만지는 척했다.
‘내 한마디에 저리 겁먹는 걸 보면 아예 싹수없는 것은 아닌가 보네. 근데 요것 봐라. 조금 전 세자빈 요것이 내게 분명….’
참하고, 온화하며 예를 알기에 좀 예뻐해 줬더니, 조금 전 제 행동을 감히 헛기침으로 만류해?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온다.
엎드린 소훈을 고고하고 차갑게 내려다보는 세자빈을 바라보는 중전의 눈빛이 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어마마마, 소훈이 예법을 익히지 못한 듯하오니, 제가 내명부의 규율과 함께 궁중 예법에 대해 훈육해도 되겠는지요?”
좀 전 싸늘하게 소훈을 내려다본 세자빈은 어느새 나긋나긋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찰나지만 의복 속에 감춰진 팔뚝에 소름이 훅 끼쳐 중전은 힐끗 세자빈을 바라봤다.
‘인제 보니 요것이 보통이 아니구나. 저 아이와 세자빈이라… 하면 세자는 어찌 대처할까? 앞으로 좀 재미있으려나?’
궁 안 생활은 늘 똑같은 일상이다.
정변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크게 바뀌지 않는 일상은, 아무리 호의호식을 누려도 지루함을 안긴다.
사가에서 두 오라버니와 검술도 하고, 때때로 오라버니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까지 다니며 화월국의 여인으로서/ 드물게 자유분방하게 지내던 중전이었다. 그런 중전이 10여 년 동안 궁 안에서 얌전히 지내려니 삶이 인형과 다를 바 무엇인가.
가끔 저를 경계하는 세자와 툭탁거리는 것이, 어찌 보면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라 재미있기도 하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놀이와 같은지라, 늘 세자를 몰면서도 끝까지 가진 않는다.
왜?
중전의 자리가 딱히 나쁘진 않았거니와 가문의 존폐와도 연관되었으니, 세자와 완전히 척지는 것은 앞날을 생각하면 제게 불리했다.
그런 제게 세자의 후궁의 등장은 꽤 흥미롭다. 한데, 거기에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세자빈의 참모습을 보았으니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세자빈이 내명부의 규율을요?”
‘훈육을 해도 내명부의 수장인 내가 해야지, 네가 왜?’
“예. 어마마마. 하여 오늘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누가 보더라도 나긋나긋한 미소로 말하는 세자빈은 흠잡을 곳 없이 기품있는 모습이다.
‘여우는 너 같은 것을 두고 여우라고 하는 것이란다. 어디 벌써 내명부 수장 노릇을 하려고. 음, 어디 한번 지켜볼까.’
“그리하세요. 단,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마세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자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아닙니까, 세자빈.”
중전은 부러 세자의 총애를 언급하며 세자빈을 내려다봤다.
‘겨우 이 한마디에 표정부터 바뀌면서, 어찌 아랫사람을 다루려고 그러느냐? 쯧쯧,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속내를 간파당해 결국 무너지게 될 텐데. 어찌 되었든 잘해 보거라.’
중전의 말에 련하는 속이 부글거렸다. 나긋나긋 미소 짓던 세자빈의 입가가 일자로 굳어진다.
세자의 총애.
세자빈인 자신을 외면하고 다른 여인을 데려온 세자에게, 장차 내명부 주인의 위엄을 보여주리라.
련하의 이마가 찰나 구깃거리다가 이내 되돌아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명심하겠나이다.”
세자빈의 손을 잡아 다독인 중전이 히죽 미소를 짓더니, 계단을 내려와 아직 엎드려 있는 두화 머리맡에 섰다.
“그만 일어나거라.”
“감사하옵니다.”
두화에게 가까이 다가간 중전은 뒤에 있는 세자빈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소곤거렸다.
“어쩌다 저 아이에게 미움을 샀을꼬. 잠시만 견디거라.”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은 중전은 이내 두화를 스쳐 세자빈궁을 나섰다.
두화는 멀어져가는 중전을 힐끗 쳐다보며 조금 전 제게 한 말을 되새겼다.
‘잠시만 견디라고?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건가?’
“꿇어라!”
앙칼진 세자빈의 목소리에, 생각에 잠겼던 두화가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초아가 재차 소리쳤다.
“마노라께서 꿇으라 하지 않습니까?”
두화는 아무것도 모른 척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소인이… 무얼 잘못하였는지 감히 여쭙지요.”
“몰라 묻느냐?”
“일러주시면 고치겠나이다.”
계단을 내려온 련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 태도가 짜증이 났다.
‘저하의 총애를 업고 감히!’
더욱이 조금 전, 중전에 대한 태도와 달리 절 어려워하지 않는 태도에 사정없이 뺨을 내려쳤다.
‘윽! 꽤 아프네, 이거! 근데 내가 왜 맞아야 해?’
찰지게 맞은 것 같은데도 멀쩡해 보이는 표정에 더 화가 난 련하는 트집을 잡았다.
“감히 네깟 것이 날 빤히 바라보는 게냐?”
“…송구하옵니다.”
“웃전에서 찾으면 그 어떤 상황이라도 웃전을 기다리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한데 넌 핑계를 대며 내 아이를 때렸다지?”
“…아.”
찾았기에 바로 왔건만 이건 뭐, 작심하고 절 잡으려고 안달이 난 거다.
“아? 초아야.”
자신의 심복인 초아를 부른 세자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명하였다.
“널 때린 저것에게 똑같이 해 주거라.”
순간 두화는 맹지를 바라보다가 세자빈 곁에 있는 초아를 쳐다봤다.
히죽 웃으며 맹지를 노려보는 초아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두화는 왠지 맹지에게 큰 사달이 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오늘과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너른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두화는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였다.
곁에 있던 맹지는 분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맹지를 보고 다가온 초아가 빈정대었다.
“수규, 소인도 어쩔 수 없음을 아시지요. 웃전의 명이라서….”
“네년이 감히!”
맹지가 이를 갈며 낮게 윽박지르자, 초아가 히죽대며 중얼댔다.
“그러길래 분수도 모르고 날뛸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지 생각했어야지요, 수규.”
“너!”
“수규라 하여 다 똑같은 수규인 줄 알았다면 오산입니다. 모시는 웃전에 따라서 수규라 하여도 무수리만도 못할 수 있답니다.”
자신뿐 아니라, 소훈 마마까지 업신여기는 초아의 말에, 맹지는 주먹이 올라가는 것을 이를 악물며 참았다. 여기서 제가 대응하면 후폭풍은 오롯이 제가 모시는 웃전이 감당해야 하기에, 서럽고 분한 마음에도 참아야 했다.
부들부들 떨며 분해하는 맹지의 모습에 초아는 키득거리며 때릴 준비를 했다.
곁에 있어, 초아의 오만불손한 말을 다 들었기에, 더는 참을 수가 없던 두화가 불쑥 맹지 앞으로 가 초아를 막아섰다.
“마노라, 이 아이를 때리라 명한 것은 소인입니다. 하니, 벌은 소인에게 내리세요.”
“그래? 아주 재미있구나.”
“…!”
“그래라, 그럼. 초아야, 저리 원하니 해 주거라. 단 더도 덜도 말고 네가 맞은 그대로 때려야 하느니.”
“예, 마노라.”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초아가 손을 쳐들어, 두화의 뺨을 내려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뭔가가 날아와 초아의 손등을 때렸다.
“악!”
한참이나 굴러간 그것은 주먹만 한 돌멩이였다. 발갛게 부은 손을 잡고 쓰러진 초아를 본 련하가 돌멩이가 날아온 곳을 홱 노려봤다.
“저, 저하.”
이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세자가 냉랭해 보일 정도로 굳은 얼굴로 성큼 걸어온다.
“저하께서 어쩐 일이시옵니까?”
세자는 차갑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웃으며 인사하는 세자빈을 박절하도록 매몰차게 지나쳐 갔다.
분명 같은 하늘,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세자는 자기 빈을 본체만체 후궁에게 갔다. 세자빈은 가슴이 졸아들고 누가 제 심장을 꼬집어 천천히 상처를 들쑤시는 기분이다. 아랫것들도 있는데 무시당한 련하는 울컥 치미는 모멸감에 그저 세자의 뒷모습만 원망스레 바라봤다.
세자빈을 쳐다도 보지 않고, 그대로 두화 곁으로 간 자한은 그녀의 몰골에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이며 의복 위로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고, 그 모습이 얼마나 괴롭힘을 받았는지 엉망인 얼굴은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괜찮으냐?”
“…괜찮아요, 전.”
실은 괜찮지 않다.
땡볕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도 맹지 앞에서 강한 척하느라 웃었지만, 진즉부터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차라리 검술을 배우며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낫지, 땡볕에서 같은 자리에 정자세로 서 있는 건 여태 몰랐지만, 무척이나 힘든 고문이었다.
두화가 그를 따라 한걸음 옮기는데 순간 비틀댔다.
찰나 몸이 허공 위로 들리더니 어느새 단단한 그의 품에 안겼다.
“맹지야, 소훈이 얼마나 이러고 있었느냐?”
냉랭해진 얼굴빛으로 그가 노기를 띠며 하문하자, 맹지는 은근슬쩍 세자빈과 초아를 힐끗대다가 큰 소리로 고하였다.
“반 시진도 더 훌쩍 넘게 있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