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5)화 (35/96)
  • 35. 의문의 토굴

    콧잔등을 찌푸리고는 맹지가 정성스레 아궁이에 쌓아 놓은 장작을 죄 꺼내었다.

    그것을 본 맹지는 어리둥절해 쳐다봤다.

    그리 보거나 말거나 두화는 마른 나뭇가지 몇 가지만 넣고, 꺼져 가는 불씨에 ‘후’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렇게 몇 차례 불자 거짓말처럼 불이 살아났다.

    그것이 신기한지 맹지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봐요. 이렇게 빽빽하게 나무를 쌓기만 하면 속에 공간이 없어서, 겉만 타면서 연기만 자욱하게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엔 바싹 마른 나무 몇 가지만 넣어서 불씨를 만들고 그 위에 장작을 올리면 끝.”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하자, 맹지가 감탄을 연발했다.

    “와, 마마. 최고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잘하실 수 있사옵니까?”

    “뭐… 그냥.”

    ‘불피우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닌 것을. 다리 밑 움막에서 살았다고 하면 이 아이도 날 하찮게 보려나. 아, 집에 가고 싶다.’

    이왕 손을 댄 김에 간단한 음식까지 만들어내자, 맹지는 연이어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어찌 그리 잘하느냐 자꾸만 묻는 맹지에게 두화는 얼른 먹으라며 대답을 피했다.

    ***

    한편 궁 밖 다리 밑 움막에서는 두화가 사라짐에, 두화의 부친인 일랑과 개방 장로들의 심각한 대화가 오갔다.

    안전한 곳에 있다 하던 두화의 행적을 추적한 무영에게 들은 장소에 일랑은 격분하여 이성을 잃을 뻔하였다. 쉽사리 드나들 수 없는 곳에 있기에 문제가 되었다.

    “음, 무영과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이번 삭일에 두화를 데려옵시다, 방주.”

    “하지만 나 혼자라면 몰라도 그 아이까지 함께 나오려면 여태 우리가 넘던 담과는 달라 위험합니다.”

    “압니다. 그렇다고 두화를 저리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작 부친인 저보다도 장로들이 더 애를 태우며 두화를 꺼내올 방도를 찾고 있다.

    “좋습니다. 하면 이번 삭일에 두화를 데려오도록 하죠. 다만 그때 좀 더 수월하게 담을 드나들 수 있도록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변방에 있는 개방 식구들에게 자그마한 문제를 일으켜, 병사들을 그쪽으로 보낼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일랑의 계책에 장로들은 무릎을 탁하니 쳤다.

    “옳거니! 좋은 생각이요, 방주. 변방 쪽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분명 왕은 성라국을 의심할 테니, 당연히 병사를 그쪽으로 보내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우리를 넘보는 성라국이니 가능한 계략입니다.”

    “하나, 그 일이 전쟁으로 발발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병사들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전쟁이 일어나봐야 죽어 나가는 것은 불쌍한 백성들뿐이니….”

    “그럼, 그렇게 합시다. 시간이 촉박하니, 당장 소식통을 그쪽으로 보내야겠습니다.”

    곁에서 듣는 무영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하필 마을의 산 중턱에 사는 거동이 힘든 노인을 모셔다드리느라 그날 자리에 없었다. 곁에만 있었어도 두화가 궁에 갈 일은 없었을 것인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세자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두화야. 곧 가마.’

    ***

    두화가 동백궁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사흘째이다.

    심심하면 주변의 풀을 뽑고, 호기심에 구석구석 들춰보고 청소하며 지내고 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기함하며 말리는 맹지지만, 잔소리하면서도 어느새 함께하고 있다.

    차 한잔 마신 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두화가 뭔가 생각난 듯 치마를 들치더니 밖으로 향했다.

    “마마, 어디 가시옵니까?”

    두화는 전날 침소 뒤에서 보았던 넝쿨이 생각났다. 그곳으로 달려가 넝쿨을 가르고 기어들어 갔다.

    뒤에서 맹지가 기겁하고는 주저앉아 다리를 붙들었다.

    “아이고, 마마! 대관절 왜 이러시옵니까?”

    “잠깐만,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아. 이거 좀 놔봐.”

    며칠, 함께 지내며 툭탁거리기를 수십 차례 하자 어느새 서로 친근해졌다. 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은 넝쿨을 뜯어내자, 나무로 만든 작은 문이 나왔다.

    “와! 맹지야, 여기 뭐가 있는 줄 알아?”

    “뭐가 있는데요? 배, 뱀이요?”

    “아니, 작은 문이 있어. 열어볼까?”

    “아니요! 절대 열지 마셔요. 궁금해하지도 마시고요. 궁에서는 호기심이 많을수록 일찍 죽는다고 대전 상궁 마마님들이 그러셨거든요!”

    거의 울기 직전인 맹지가 필사적으로 두화를 꺼내려고 다리를 잡아당겼다.

    “괜찮아. 여기 딱 보니까 안 쓴 지 오래됐던 궁인 것 같던데, 혹 누가 알아? 여기에 보물이라도 감춰뒀을지 말이야.”

    “보, 보물이요?”

    다리를 잡고 끌어내려던 맹지의 손이 아주 잠시 멈췄다.

    “그래. 보물이면 다… 아니다, 반으로 나누자.”

    “참이십니까?”

    “그렇대도. 그러니까 다리 좀 놔 봐.”

    보물이란 말에 맹지도 그제야 잡아당기던 다리를 놓았다. 눈앞의 엎드려 있는 둔부를 유심히 바라봤다.

    문을 잡아 열자 먼지가 훅 끼쳤다.

    두화는 한참을 콜록거리며 제 앞에 뿌연 먼지를 손으로 휘휘 날려 버렸다. 그제야 앞이 보였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입구가 드러났다.

    “맹지야, 가서 불 좀 가져와 봐.”

    잠시 후 횃불을 가져오자 두화는 그것을 들고 작은 입구를 비추었다.

    얼핏 작은 토끼굴처럼 보이는 조금 큰 토굴이다. 호기심에 콧잔등을 구긴 두화는 기어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여야 했지만, 의외로 제법 공간이 넓었다. 천천히 안을 구석구석 비추었다. 제일 안쪽엔 작은 책상과 오래된 듯 보이는 두루마리 그리고 서책 몇 권과 작은 함이 다였다.

    “에이, 별거 없네.”

    그냥 돌아서 나오려던 두화는 그래도 저것들이 뭔지 궁금하였다.

    ‘혹, 저 함 안에 진짜 보물이라도 들어있는 것 아니야?’

    기다리는 맹지를 위해서라도 보물을 기대하고 함을 열었다. 불을 비추던 두화의 눈이 커다래지다가 이내 입에서 투박한 욕설을 쏟아냈다.

    “어느 육시랄 것이 이런 잡짓을 했대?”

    함 속엔 누군가의 머리카락과 손발톱 그리고 짚으로 만들어진 제웅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 함은 누군가를 저주하려 만들어 숨긴 것이다.

    찝찝한 기분에 그대로 닫아 구석에 던져 버렸다.

    그냥 나갈까 하던 두화가 뒤를 돌아봤다.

    “아니, 이곳의 주인은 대체 누가 그리 미워서, 저리 악독한 짓을 했을까?”

    문득 궁금하다.

    해서 혹여 작은 책상 위 널브러져 있는 몇 개의 두루마리 속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횃불을 옆에 세우고 두루마리를 하나씩 펴서 읽었다.

    네 개의 두루마리는 별것 없는 시를 적어 놓은 것이고, 마지막 남은 두루마리는 낡은 부적이 봉해져 있었다. 한데 손을 대자마자, 부적은 마치 먼지처럼 부스스 흩날렸다.

    “뭐야, 이거. 찜찜하게 부적까지.”

    천천히 그림을 펼치자 그 속엔 어린 사내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더러 물기 같은 것에 방울방울 번져 얼룩진 것을 제하면 보존이 잘 된 그림이다.

    “눈이 좀 매서운 것만 빼면 뭐 귀여운 꼬마네.”

    별 소득이 없자, 괜한 짓을 해 힘만 뺀 것 같다.

    나와서 먼지를 털어내는데, 곁에서 먼지를 털어주던 맹지가 자꾸만 넝쿨 안쪽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마마, 왜 그냥 나오십니까? 보물은요?”

    “없더라고.”

    “참말로요?”

    실망감이 가득한 맹지를 보고 돈 밝히는 모습이 저와 비슷하여 웃었다.

    “정말이야. 대신 뭘 발견하긴 했는데 영 찝찝하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

    “이곳을 사용했던 주인, 그리고 행적을 알아 올 수 있어?”

    “뭐, 궁녀들은 모르는 게 없으니까 돈만 좀 쥐여주면 나불나불할 겁니다. 하면 소인이 알아보겠사옵니다.”

    머리며 의복이며 흙먼지가 잔뜩 묻은 탓에, 침소 앞쪽으로 나오면서도 의복 위를 툭툭 쳐내며 걸어왔다.

    그때 동백궁 입구에 궁녀 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화와 마주치자 궁녀들은 아주 성의 없이 고개만 까딱하였다.

    두화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맹지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더구나 찾아온 이들은 세자빈 처소의 궁인들과 세자빈의 수족인 초아였다.

    아무리 세자빈이 웃전이라고는 하나, 두화도 여느 궁인보다는 높은 종5품 소훈이시다.

    ‘예법으로 대해야 하는 것을 어디 감히 사가에서 들어온 본궁나인 따위가 건방지게!’

    초아를 노려보던 맹지는 한껏 고개를 치켜세우고 아랫배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처음으로 맹지가 언성을 높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두화가 흠칫 놀라긴 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그 의도를 알아챘다. 하여 두화 역시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네 이년 맹지! 감히 세자빈 마노라의 측근인 내게 큰소리를 내? 네가 매운맛을 보고 싶은 것이냐?”

    한 발 앞으로 나온 초아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냈다.

    그 모습에 한껏 입꼬리가 올라간 맹지가 그 앞으로 다가가 냅다 초아의 뺨을 내리쳤다.

    “악! 이년이 미쳤나!”

    초아의 악다구니에 맹지는 바로 꾸짖듯 호통쳤다.

    “네 이년! 감히 본궁나인 따위가 어디 웃전인 종6품 수규인 내게 하대하고, 욕지거리까지 하느냐. 네년이야말로 단매에 맞아 죽고 싶은 것이냐?”

    “뭐야? 네깟 것이 언제 수규가 되었다고… 헉!”

    그제야 수규라는 머리 표식과 허리에 찬 노리개를 본 초아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세자빈을 모시는 저도 아직 수규로 승격하려면 기약이 없는데, 저것이 어떻게!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초아는 부들거리면서도 재차 확인하려 들었다.

    그 모습에 맹지가 눈을 부릅뜨고 손을 다시금 치켜올렸다.

    “그래도 네년이 궁중 법도를 업신여기는 것이냐?”

    지금은 억울하고 화가 나도 할 수 없다. 눈앞의 얄미운 계집은 저보다도 한참이나 높은 수규다. 초아는 맞기 직전 냉큼 바닥에 엎드려 사죄하였다.

    “소인이… 소인이 눈이 좋지 못하여 감히… 수규를 몰라뵈었나이다. 부디 너른 아량으로 용서하시옵소서.”

    맹지는 그동안 세자의 심부름으로 세자빈의 탄일 때 서책을 전하러 가면, 같은 궁인이면서도 매번 초아에게 쓴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세자빈의 사가에서 들어온 본궁나인 주제에 세자빈의 권세를 등에 업고 괜한 질타를 받아야 했다.

    제 잘못도 아니고, 세자의 마음이 그런 것을 제가 무슨 수로 세자빈궁으로 납시게 하느냔 말이지.

    매년 당하던 것만 생각하면 밉상이던 초아를 더 혼내주고 싶지만, 냉큼 정신을 차렸다. 초아가 찾아왔다는 건 세자빈이 동백궁 주인을 찾는 것일 터, 부름에 늦으면 그 또한 웃전을 업신여겼다 하여 제 웃전이 쓴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행동거지에 있어 조심하거라. 그래, 무슨 일로 동백궁을 찾은 것이냐?”

    자존심이 바짝 상한 초아는 이를 갈며 대꾸하였다.

    “세자빈 마노라께서 소훈 마마를 찾으시옵니다.”

    고개 숙인 초아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맹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분명 좋은 일로 찾는 것이 아닐 것이야.’

    불길한 느낌에 맹지는 두화의 귀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오늘은 가지 마십시오. 필경 마마를 곤란케 하려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리 팔팔한 모습으로 마주쳤는데 그 핑계가 통하겠어? 아닌 것이 들통나면 그게 더 곤란해질 것 같은데?”

    “하오나.”

    “괜찮아.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어찌 되었든 웃전이니 한번은 봐야 하지 않겠어?”

    ‘곧 나갈 테니 한 번으로 끝나겠지만….’

    닥쳐올 사태에 걱정이 된 맹지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초아에게 다가갔다.

    “마마께서 지금 바로 나가실 상황이 못 된다. 준비가 마치는 대로 갈 터이니 부르심에 응했다고 가서 전하거라.”

    초아는 힐끗 두 사람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두 사람 몰골이 흙먼지 속에서 구른 모양새이다.

    ‘옳거니, 잘 되었다.’

    히죽 입꼬리를 올린 초아가 냉큼 안색을 바꾸어 애원하였다.

    “마마, 당장 모셔오라는 세자빈 마노라의 명에 이년도 걸음을 재촉하여 온 것이옵니다. 예서 더 늦으면 세자빈 마노라의 화를 어찌 피하겠사옵니까?”

    잠시 후, 어쩔 수 없이 두화는 머리에 붙은 잡티와 먼지만 털어내고 세자빈궁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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