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2)화 (32/96)
  • 32. 후궁으로 삼고 싶습니다.

    순간 두화의 턱을 잡아 올린 자한의 눈빛이 이글댔다.

    차갑고 어딘지 위험스러운 수컷의 향기를 짙게 뿜어낸 표정이다.

    “저하.”

    살포시 내뱉어지는 숨과 가녀린 목소리는 밤새 참았던 자한의 인내심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저를 애타게 찾는 그녀의 소리를 모조리 잡아먹었다.

    저 자신조차도 제게 이런 집요함이 있는지 몰랐다. 그녀의 숨 한 자락까지 모두 제안에 가두고 싶다.

    정신이 아찔해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자한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알게 되었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갈증이 이는 탓에, 어느새 제 욕심을 채우기 급급했다.

    “…저하, 살려주세요.”

    겨우 숨을 토해내며 두화가 앞섶을 잡고 매달렸다.

    “두화야, 나야말로 살려다오.”

    다시금 겹쳐 드는 입술에 두화가 너른 가슴팍을 툭탁거리며 반항했다. 하나, 단단한 손에 잡혀 의미 없는 반항은 이내 또다시 시작된 입맞춤에 멈추고 만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잡으려 감히 세자의 앞섶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그렇게 자한이 욕심을 채워갈 때쯤 밖에서 사림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저하, 저하! 중전마마 납시었습니다.”

    순간 조금 전까지도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그녀를 탐하기 급급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자한은 냉기를 뿜어냈다.

    순식간에 바뀐 세자의 표정에 두화는 흠칫 놀랐다.

    “넌 예서 꼼짝하지 말아라.”

    “예.”

    밖으로 나가는 세자의 뒷모습에 두화는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를 바라보는 그 눈빛만큼은 먹잇감을 앞에 둔 짐승 같을지언정 입술을 탐할 땐 세상 다정하고 따뜻하였다. 한데, 조금 전 순식간에 바뀐 세자의 표정은 좀 놀랍고 당황스럽다.

    “저리 정색하니 완전 무섭네. 그나저나 이젠 어째야 해?”

    퉁퉁 부은 제 입술을 매만지던 두화의 볼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었다.

    한편 밖으로 나가던 자한은 마침 제 침소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중전과 함께 오는 세자빈과 마주쳤다.

    “이곳까지 기별도 없이 어찌 오셨나이까?”

    예를 갖춘 세자를 향해 중전은 세자빈과 함께 앞으로 다가왔다.

    “내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

    “이상한 소문이라니요?”

    “세자빈도 아닌 여인을 세자가 침소에 들였다고, 그것이 요물이 아니냐고 지금 궁 안에 소문이….”

    “…”

    자한은 무표정으로 중전과 세자빈을 바라봤다.

    중전은 차갑기만 한 세자의 표정에도 말을 이었다.

    “하여 사실이라면 궁의 법도가 있으니!”

    “중전마마, 웬일로 소자에게 과한 관심을 주십니다.”

    중전의 도발에 세자는 도발과 함께 공격했다.

    “뭐요?”

    곁에 세자빈도 있는데 제게 이런 수치를 주다니, 중전의 얼굴이 분하여 붉어졌다.

    “세자의 일이니 당연히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지요. 해서 지금부터 세자를 홀린 여우 같은 요물을 봐야겠습니다. 길을 트세요.”

    중전이 한 발 앞으로 나서려 하자 자한이 피식 웃으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제 침소에 요물이든 동물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키우지 않사옵니다, 중전마마.”

    “세자! 비키라 하였습니다.”

    “중전마마, 지금 한낱 소문만 듣고 오셔서, 이 나라 세자인 절 시험하시는 겁니까?”

    감히 이 나라 다음 보위의 주인인 저를 하찮게 보고, 시험하느냐 돌려 질책하였다. 중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세자가 바른길로 갈 수 있게 웃전인 이 어미가….”

    “중전마마, 소자는 효를 행하고 싶습니다. 하니, 소문 따위보다는 소자를 믿으시고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주강에 늦지 않게 준비해야 하옵니다.”

    어서 돌아가라고 쫓아내고 있다.

    중전은 세자의 강경한 거부에 결국 발을 돌려야만 했다.

    곁에 있는 세자빈에게 면이 서지 않는다. 예까지 오면서 오늘에서야 콧대 높은 세자를 제 앞에 무릎 꿇리는구나 싶었는데, 제 바람은 무너지고 말았다.

    중전에 오른 지 10년이나 되었건만, 저 냉철한 세자에게 모후 대접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괘씸한지고!’

    “어마마마, 송구하옵니다. 저 때문에….”

    “…이것이 어찌 세자빈 탓이겠느냐. 세자 뒤에서 숨어 있는 여우 같은 요물 때문이지.”

    “저 때문에 어마마마께서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눈물을 보이는 세자빈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까지도 수치심과 창피함 때문에 세자빈을 보기 민망하였는데, 지금은 세자빈이 가엾기만 하다.

    하도 철저하게 감추어 세자에 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해도, 세자빈에게 차갑게 군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해서 달래며 제 곁을 내주었다. 한데 몇 년이 지나니 것도 정이라고 마음이 이리도 쓰인다.

    “아니니라. 내 기필코 우리 세자빈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한 원흉을 족칠 것이야. 빌어먹을 요물 같은 년!”

    이때 박 상궁이 안절부절 다가와 조용히 아뢰었다.

    “중전마마, 소리를 낮추소서. 누가 들을까 염려되옵니다.”

    “아, 흠흠. 알겠느니. 중궁전으로 돌아가자.”

    가끔 흥분하면 사가에서 철없이 지낼 때 썼던 험한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하곤 한다. 아직까진 제 사람들 빼고는 누구에게도 들킨 적이 없으니 다행이라고나 할까.

    빠르게 중궁전으로 향하는 무리의 뒤를 보며, 바로 전까지도 세상 애처롭고 안쓰럽게 눈물을 흘리던 세자빈의 얼굴엔 표정이 사라졌다.

    “초아야, 우리도 가자. 아무래도 아버지께 서신을 보내야겠구나.”

    “예, 마노라.”

    ***

    늦은 밤, 중전은 세자빈 앞에서 모욕당한 것에 분하여, 왕에게 눈물을 보이며 세자를 깎아내렸다.

    “전하, 세자에게 미움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도 아프옵니다. 신첩은 그저 세자에게 흠이 될까 싶어 어미로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나이다. 한데 세자빈도 있는 자리에서 신첩을 모질게 내치다니요. 어미로서 신첩은 세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훌쩍이며 왕의 품으로 안기지만, 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 어찌 아무 말씀도 없으시옵니까?”

    “음. 세자에게 신경 쓰느라 곤했을 터인데 그만 잡시다.”

    중전의 베갯머리 송사에 왕은 대화를 단절했다.

    힐끗 올려다본 왕의 알 수 없는 표정에 중전은 세자에 대한 말을 더는 꺼내지 못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 더 입을 놀려봐야 나만 손해일 것 같구나.’

    ‘이대로 당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지. 어찌해야 할까?’

    ***

    다음 날 아침, 왕과 조반을 마친 중전은 간밤 떠오른 계책 때문에, 서둘러 중궁전에 들러 몸단장을 끝내고 작은 함을 준비해 대비궁으로 향했다.

    준비한 작은 함 속에는 사가에서 들여온 귀한 사향을 담은 향갑 비취 노리개가 들어 있다.

    여인이라면 최고급 사향을 몸에 지니고 싶어 한다. 평소엔 은은한 향을 뿜어내지만, 사향과 박하를 섞으면 어딘지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한 향을 뿜어내고 두통을 없애기도 한다. 하여, 부호의 부인이나 귀족과 왕족일수록 최고급 사향을 값비싸게 주고서라도 몸에 지니려고 한다.

    중전은 자신이 쓰려고 아껴둔 이것을 대비에게 바치고 세자의 콧대를 눌러놓을 셈이다.

    ‘세자, 아무리 세자가 발버둥 쳐 보세요. 이 사람이 중전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세자의 어미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중전의 발걸음이 사뭇 가볍기만 하다.

    대비궁에 들어 고하였다.

    안으로 들라는 대비의 명에 중전은 밝은 미소로 준비해온 함을 들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중전. 내, 그렇지 않아도 중전을 부르려고 했습니다. 앉으세요.”

    반갑게 맞는 대비보다도 그 앞에 이미 와 앉아있는 세자와 처음 보는 여인 때문에, 중전은 당황하여 미리 생각해둔 말들을 죄 잊고 만다.

    ‘내 앞에서는 꼭꼭 숨기더니, 여길 찾아와! 하아. 세자가 이 어미를 아주 제대로 농락하는구려!’

    가만히 곁눈질로 대비 앞에 앉아있는 수수한 차림의 두화를 훑은 중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밀조밀 작은 이목구비에, 초승달 같은 눈썹과 반듯한 이마만으로도 상당한 미색이다. 한데, 꾸민 것 같지 않은 얼굴임에도 뺨과 입술이 복숭앗빛을 닮은 붉은 기운을 띠었다. 또한 칠흑 같은 머리카락엔 윤기가 흘렀고, 목이 길어 수수한 의복을 입었음에도 귀티가 흘렀다.

    ‘흠, 뭐… 천박하게 생기진 않았네. 한데 저런 것들이 머리가 빈 것들이 많다지.’

    “어마마마, 찾지 않으셔도 제가 문안 오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거.”

    작은 함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요즘 후원의 꽃이 지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하여 사가에 부탁하여, 들여온 것이니 받아주시옵소서.”

    함을 열자 작고 새하얀 백옥함을 본 대비의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옥 종류를 좋아하는 대비에겐 사향보다도 작고 아기자기한 백옥함이 더 좋은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

    대비의 미소를 본 중전이 미소를 띠며 백옥함을 열어보라 부추겼다.

    “이건, 노리개이지 않습니까?”

    “예. 꽃이 지니 향낭 주머니가 성행하는 시기지 않습니까? 노리개 속에 질 좋은 사향이 들어 있으니, 몸에 지니면 은은한 향으로 두통도 사라지고, 산보하실 적에 뱀으로부터 몸 또한 보호할 수 있어 준비했나이다.”

    대비는 기쁜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며 중전의 손을 잡았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니, 이 어미가 어찌 우리 중전을 귀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흡족해하시니 기쁘옵니다.”

    중전은 세자 보란 듯이 대비 앞에서 웃음을 흘렸다.

    “아, 중전도 아시오? 세자가 여인을 데려왔다는구려.”

    “예? 아….”

    알긴 알되 면전에서 쫓겨났으니 안다고 고할 수도 없어 말을 흐렸다.

    “세자빈과 데면데면한 것 같아, 우리 세자는 아예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이리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려.”

    웃으며 말하지만, 말속에 가시를 알아챈 자한은 한 번 더 제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맞겠다 생각했다. 좌의정과 손잡고 죄 없는 두화를 죽이라 하시고는 내색하나 변하지 않고, 인자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대비가 소름이 끼쳤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두화에게는 미리 언질을 주지 않고, 급한 대로 얌전한 의복을 구해 입혀서 대비궁으로 데려온 것이다.

    이번 자객 소동의 배후가 할마마마와 좌의정이라면, 이대로 두화를 밖으로 내보내도 위험은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궁 밖에 내보내느니 제 곁에 두어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낫겠다 여겼다. 하여 두화가 안전해질 그때까진 주변인들을 속여야 한다. 해서 속전속결로 진행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대비궁을 찾았다.

    “할마마마, 소손 청이 있어서 왔나이다.”

    대비의 눈빛이 찰나 날카롭게 두화를 노려보다가, 평소대로 부드러운 눈빛이 되어 자한을 바라봤다.

    “청이요? 말하세요.”

    “이 아이를 후궁으로 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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