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1)화 (31/96)
  • 31. 난 계속 진심이라 전하는데, 넌 매번 아니라 하는구나.

    두화는 제 발로 갈 수 있는 걸 보여주려고 벌떡 일어났다. 하나 전날 삐었던 발목이 욱신대어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넘어지려는 찰나 어느새 자한의 품에 안기었다.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저, 저하!”

    “잠시만, 이대로… 있자꾸나.”

    품에 안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

    이대로 그녀를 취해 제 여인으로 만들어 이곳에 묶어버리고 싶다. 하나, 아직은 그녀를 지킬만한 힘을 가지지 못한 제가 과연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부터 그녀를 지켜낼 수 있을까?

    찰나 든 오만가지 생각에 머릿속이 뒤엉켜버렸다.

    “널 어찌하면 좋을까?”

    “…또 제가 뭘 잘못했어요, 저하?”

    “잘못이라… 했지. 그것도 아주 큰 죄인 것을 아느냐?”

    “예?”

    “감히 세자인 날 네게 옭아매지 않았더냐?”

    낯간지러운 말에 두화의 두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자한은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었다. 순간 입맞춤이라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란 두화가 두 눈을 꼭 감았다.

    “내가 두려우냐?”

    “…아니요.”

    “하면 내가 싫더냐?”

    “…아니요.”

    “하면… 너 또한 내가 좋으냐?”

    “…그건 모르겠어요.”

    하문할 적마다 얼굴에 닿는 그의 숨결에, 두화는 괜히 심장이 콩닥거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난 네가 좋다, 두화야.”

    “…!”

    “이젠 보내주기 싫으니 어찌하냐?”

    “…그건 안 돼요. 저하.”

    “안다. 아는데도 널 곁에 두고 싶구나.”

    “저하….”

    자한은 애처롭고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눈빛이 마주치자, 두화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숨결이 조금씩 가빠질 때, 두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그때!

    “저하, 돌아왔나이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사림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떨어졌다. 애먼 곳만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고쳐 정리했다.

    “흠흠, 들어오너라.”

    방에 들어온 사림은 멀찍하니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혹 싸웠습니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묻는 사림에게 자한과 두화가 동시에 소리쳤다.

    “아니거든요!”

    “아니니라!”

    아니면 아니지, 뭘 또 저렇게 정색하여 소리 지를 건 뭐람. 괜히 머쓱해진 사림이 헛기침하더니 간밤 알아 온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 무사합니다. 다만 방년(20세 전후의 나이)의 처자만 목숨을 잃은지라 이상하여, 조사를 하던 중 백 장군을 만났습니다.”

    “…백 장군도 무사하던가?”

    “예. 그 명성대로 백 장군에게 잡힌 자객들의 몰골은 처참했습니다. 과연 전쟁의 살인귀라 불릴만했습니다.”

    “음. 해서 다른 건?”

    자객들 또한 만만치 않은 고수들이었건만, 그들을 처참히 도륙했다니 역시 거슬린다.

    “백 장군이 자객 한 놈에게서 알아낸 것이… 음.”

    말하기 곤란한 듯 두화를 눈치 보던 사림의 모습에 자한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사림이 작게 속삭였다.

    “자객의 정체가 내시였답니다. 또한 그 배후가….”

    “누구라더냐?”

    감히 저를 노린 자의 배후가 궁 안에 있다.

    자한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자객을 이끈 자는 내시였으나, 나머지 자객들은 모두….”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듯 사림은 말이 쉬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모습에 자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궁 안에 배후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다.

    “나를 노린 자의 배후가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군.”

    “맞습니다, 한데 그들이 노린 것은 저하가 아니오라, 저 여인이옵니다.”

    “뭐라!”

    의외의 소리에 자한의 언성이 커졌다.

    다소 떨어진 곳에 있던 두화가 의아하며 쳐다봤다.

    “왜 그러세요, 저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니라.”

    자한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사림에게 물었다.

    “누구냐, 두화를 노린 괘씸한 것들이!”

    “자객 대부분은 모두 좌의정의 사병이었고, 그들을 이끈 내시는… 대비궁 사람이옵니다.”

    “…좌의정과 할마마마라고?”

    자한의 이마가 꿈틀 찌푸려졌다.

    “백 장군에게 잡힌 몇몇은 심한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실토한 것 같습니다. 실토한 이들도 심한 고문 때문인지 반 시진도 못 되어 모두 죽었다 하옵니다. 부상 당했으나, 살아남은 몇몇 또한 독을 삼켜 자결하였다 하옵니다.”

    “…고생하였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어느새 다가온 두화가 사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그곳에 계신 분들 무사하다 하였는데, 혹 제 오라버니도 보셨나요?”

    “무사합니다. 백 장군과 오라버니라는 분이 낭자의 소식을 궁금해하여, 안전한 곳에 있다고만 알려 드렸습니다.”

    “아, 다행이다.”

    걱정 가득하던 두화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퍼졌다. 두화는 연신 사림에게 감사하다고 허리를 숙였다.

    안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미 자한의 머릿속엔 장기 말판이 그려졌다.

    어떻게 하면 이 판에서 졸보다도 못한 그녀를 구해낼 수 있는지 홀로 심각했다.

    ‘한데 할마마마께서는 두화의 존재를 어찌 아셨을꼬?’

    설마….

    ‘제길!’

    자중하지 못하고 두화가 보고 싶어 출궁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책망했다. 평소 저답지 않게 두화에게 몰두한 나머지 뒤따르는 자들을 읽지 못했다.

    ‘젠장!’

    몰래 출궁하는 횟수가 늘수록 대비궁에서도 사람을 붙였으리라. 해서 제가 관심을 둔 것이 천하디천한 것이라 제게 흠집이라도 남을까 제거하려 하신 거겠지.

    비록 저를 위한 처사였다고는 하여도 용납할 수 없다.

    ‘이번엔 도가 지나치셨습니다, 할마마마.’

    매섭게 변한 자한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대비궁으로 향할 것만 같았다.

    아까 저를 볼 때와 사뭇 다른 그의 표정에, 두화의 마음은 불안하면서도 어딘지 불편했다. 창가에 서서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뒤에 섰다.

    “저하, 혹 무슨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니니라.”

    ‘좌의정이 개입했다면… 어찌 보면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궁 안에 두는 것이 안전하겠군.’

    “한데 어찌 그리 세상 근심 혼자 진 것처럼 울상이셔요?”

    자신을 걱정하는 두화를 의식해 자한은 뒤돌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언제 울상이었다 그러느냐? 이리 잘난 얼굴이 또 어디 있다고, 감히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느냐?”

    “아, 예. 뭐, 외모가 출중하시긴 하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뭇 여인들에게나 통하시는 거고요. 딱히 제가 원하는 얼굴은 아니라서….”

    이만큼 잘난 얼굴이 어디 있다고, 원하는 얼굴이 아니라고?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간 자한이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뭐라? 그럼, 넌 어떤 얼굴을 좋아하는데?”

    “음.”

    뭔지 모르지만 분명 사림과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부터 저리 근심하고 있다.

    ‘뭘까? 나 모르는 무슨 비밀이기에….’

    눈치 빠른 두화는 전날의 상황을 다시금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자객은 닥치는 대로 죽이지 않았다. 분명 제 또래 여인들만 골라 죽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걱정하셨던 것이 이거였나?’

    저를 노리고?

    하여 제 목숨을 가지고 부친을 겁박하려고?

    ‘아무래도 아버지가 걱정돼. 날 노렸다면 개방 식구들도 벌써 위험한 거 아니야?’

    “두화야?”

    두화는 저를 부르는 다감한 말에 정신을 차렸다.

    “예? 아… 뭐라고 하셨지요, 저하?”

    “넌 어떤 사내를 좋아하느냐 물었다.”

    “음, 사내답지만 다감하고 비록 천것이나 저만 위해주고, 저를 위해서라면 그 끝이 불구덩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내? 뭐, 이런 사내가 좋지요. 세상에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때 사림이 나지막하게 중얼댔다.

    “욕심이 과하군.”

    홱, 자한이 무섭게 쳐다보자 괜히 민망해진 사림은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래? 내 그런 자를 안다.”

    “정말이요? 사내답고 또 다감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며 그가 능글맞게 웃는다.

    “설마 안다고 하신 사내가….”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바로 앞에 있지 않으냐.”

    “저하, 농이 지나치세요. 저번부터 저를 놀리시는데, 자꾸 그러면 진짜인 줄 알고 착각한다니까요.”

    점점 다가오는 자한을 피해, 뒷걸음질하지만 등은 어느새 벽과 맞닿아 더는 뒤로 물러날 수도 없다.

    어느새 제 얼굴 옆, 벽을 짚은 단단한 팔뚝에 두화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젠 그를 피해 옆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난 계속 진심이라 전하는데 넌 매번 아니라 하는구나.”

    “그거야… 저하와 전 하늘과 땅, 아니 땅속… 아무튼 저하께는 천한 저 같은 것보다는….”

    “시끄럽군. 당최 매번 같은 핑계를 대니, 이 입을 어찌 막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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