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6)화 (26/96)
  • 26. 널 연모한다.

    주지 스님이 사찰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두화는 안심하였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씩씩하게 짐 싸는 것을 도왔다.

    “이제 얼추 다 쌌으니 출발해 볼까요?”

    “이 정도 짐이면 며칠 걸리겠지요?”

    “사흘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하면 저도 갈아입을 의복만 간단히 챙겨 나올게요, 스님.”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챙겨 봇짐을 멘 두화가 무영을 찾았다.

    주지 스님의 뜻을 전하자 무영은 그 길로 주지 스님의 방으로 가, 커다란 짐을 양손에 들고나왔다.

    “오라버니, 같이 들어. 무겁잖아.”

    혼자 들으려는 무영과 그것을 같이 들으려 실랑이하는 두화를 본 주지 스님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의 앞날에 복을 빌어주는 주지 스님의 염불 소리가 찰나 숲을 울리는 새소리에 묻혀 허공에 흐트러졌다.

    사찰 초입까지도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서로 보따리를 들으려 했다.

    목청 큰 두화가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무영의 무뚝뚝한 농에 크게 웃기도 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무영은 어째서인지 두화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 무슨 일이야, 오라버니?”

    무영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두화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아니, 저 양반들이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굳은 얼굴의 세자와 자신을 가리고 선 무영을 노려보며 궁금해하는 도헌 때문에, 두화는 난감하면서도 당황스럽다. 하지만 저로 인해 주지 스님이 행하시려는 일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이, 무영의 뒤에서 나와 앞에 섰다.

    저들 앞에 나가지 말라고, 무영은 말리려는 듯 팔을 잡았다.

    무영이 두화의 팔을 잡는 순간 자한과 도헌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괜찮아, 오라버니. 내가 아는 분들이야.”

    “…불편하면 내가 해도 된다니까.”

    “…!”

    제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불편하게 한 원인이 두 사내라는 것을 무영이 알고 있다.

    두화는 무영을 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알고 있었어?’

    당황해하는 두화의 눈빛에 무영은 마치 화답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불편한 그것, 네가 못하면 내가 쳐 낼게, 두화야.’

    두화는 무영의 속마음을 읽은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를 찾으러 세자인 제가 산까지 탔는데, 곁에 있는 도헌 말고도 또 다른 사내와 애가 타는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심기가 뒤틀린다.

    두화를 향해 부채를 든 손으로 당장 제 앞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못마땅해하며 걸어오는 그녀의 표정에 덩달아 미간이 좁혀진다.

    가까이 다가와 예를 차리는 작은 정수리를 노려봤다.

    “…여기까진 어찌 오셨어요?”

    “어찌 왔겠느냐?”

    고개를 든 두화가 세자와 장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불공을 드리러 오셨다면 오늘은 날이 아니니, 죄송하지만 돌아가세요.”

    자한은 이곳에 온 연유가 따로 있으면서도 부러 차갑게 되물었다.

    “어찌하여?”

    “저분이 주지 스님이세요. 그리고 스님과 저희는 석장골에 가려고 나서던 중이었고요.”

    두 사내는 마치 짠 듯 동시에 이마가 찌푸려지더니, 눈에 힘을 주어 두화를 바라봤다.

    “잠시 나 좀 보자.”

    자한이 사람들과 좀 떨어진 아래쪽으로 향하였다.

    두화가 따라가려 하자 무영이 길을 막았다. 정말 괜찮겠냐고 눈으로 묻는 그를 향해 괜찮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천히 세자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과 다소 떨어져 커다란 소나무 옆에 선 세자 곁으로 다가갔다.

    “…겨우 도망친 곳이 예더냐?”

    “예?”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은 어찌 알고 왔을까 가슴이 뜨끔거렸다.

    솔직히 좀 전에는 무영이 곁에 있어서 심장이 크게 동요하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좀 놀랐다.

    몸을 돌이킨 세자의 표정에 한겨울 설한풍이 휘 불리는 것처럼 몸이 떨렸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자한이 입술을 떼었다.

    “네 이런 행동이 나를 더 부추긴다는 것을 아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하.”

    “그래. 내 전하지 않았으니 모를 수 있다. 하나, 이제부터는 알아야 할 것이다.”

    대관절 뭘 알아야 한다는 거야?

    “나 또한 인정하기 싫어 그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잠깐 흥미로운 것에 관심이 가는 것뿐일 거라 여겼건만, 어처구니없게도 화월국의 세자인 내가 널….”

    마치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

    “…!”

    “마음에 품었느니라.”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이지?

    그동안 절 희롱하듯 괴롭힌 것이 천한 신분이라서 심심풀이로 그랬던 것이 아닌가?

    도대체 한 나라의 세자인 그가 뭐가 부족하여 제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저하, 이런 장난은….”

    장난은 그만두시란 말을 하려 했지만, 순간 억센 손에 이끌려 너른 품에 안겨 버렸다.

    “헉!”

    “널 연모한다!”

    “저, 저하!”

    “그저 지나가는 흥미라 여겼다. 한데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가슴이 미칠 것 같다. 대관절 네까짓 것이 뭐기에 날 이리 만드느냐?”

    ‘아니, 화까지 내면서 그걸 왜 제게 물으셔요!’

    두화는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올려 반박하려고 하였다.

    하나 눈 깜빡할 사이 내려오는 그의 얼굴에 꼼짝할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그의 숨결이 제 입술에 닿았다. 놀라 말똥말똥 떠진 두 눈이 연신 깜빡였다.

    반항을 하기도 전에 그가 와락 끌어안았다.

    “너는 어떠하냐?”

    “이… 이러지 마세요. 천한 제게 왜 이러세요 정말?”

    “그러니 말이다. 천한 너 때문에 내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다. 하니, 네가 책임지거라.”

    “저하!”

    “내가 원하는 답을 주기 전까진 절대 이 손을 풀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세자의 고백에 정말 난감하지만, 저는 또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 만큼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답… 안 줄 것이냐?”

    “…모르겠어요.”

    “내가 싫은 것이냐?”

    “딱히 싫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에요.”

    “…!”

    두화의 솔직한 답에 자한은 당황했다.

    세자인 제가 연모한다고 하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건만 좋지도 싫지도 않다니!

    “맨날 못살게 구시고 겁박하시고 놀리시고. 솔직히 그런 걸 좋아하는 여인은 없지요. 더구나 아무리 천한 저도… 여인인지라 제게 다정하게 잘해주는 사내가 좋습니다.”

    “그래서 난 아니다?”

    “그렇다고 막 싫은 건 또 아니니, 지금 그게 더 이상해요. 왜 제가….”

    뭔가 말하기 힘든 듯 가슴팍에서 날숨을 연달아 쏟아내는 두화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말하거라.”

    “…아무래도 병에 걸렸나 봐요. 가슴이 너무 빨리 뛰어서 아플 지경이에요.”

    “뭐라? 어디가 아파?”

    놀란 자한은 꽉 끌어안고 있던 두화를 떨어뜨리고, 낡은 저고리 윗부분에 커다란 손을 얹었다. 정말 빨리 뛰고 있다. 하나, 비단 두화만 그리 빨리 뛰는 것이 아니기에 금세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두화가 자한을 두 팔로 밀며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는 것이 아닌가!

    “어찌 여인네 가슴을 함부로 더듬거리셔요? 그것도 세자라는 분이!”

    혹 저 뒤, 누구라도 들을까 두화는 작게 소리쳤다.

    호색한을 보듯 그리 쳐다보는 두화 때문에 자한은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거렸다.

    “아, 아니다! 조금 전 네가 아프다 하니 만져 본… 아….”

    두 눈을 깜빡이던 자한은 제 손바닥을 슬그머니 내려다봤다. 제 손에 그녀의 가슴이 닿아 있었단다. 미처 제가 느끼기도 전에 모든 상황은 이미 끝나 버렸지만 말이다.

    ‘이런, 내 무슨 생각을… 흠.’

    한데 저와 같이 가슴이 빨리 뛴다는 두화의 말에 금세 자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내가 느꼈던 이상한 기분을 너 또한 느낀다는 것은, 네 마음 또한 나와 같다라는 것이다. 딱 걸렸다, 두화야.’

    그대로 그녀를 잡아 도로 제 품에 안았다.

    버둥대며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리 안으면 또 두근거리지 않느냐?”

    “…어찌 아셨어요?”

    “나도 처음엔 이러했다. 지금 넌 모르겠지만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이다.”

    “아니거든요. 전 누굴 연모하고 그런 거 못… 안 해요.”

    “어찌 그리 확신해? 네 멋대로 내 마음에 들어와 놓고는 아니라 하여 도망가면 대수더냐?”

    귓가에 낮게 퍼지는 그의 고백에 두화는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어, 억지세요!”

    “아니다.”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다. 저는 아니라 하는데, 세자인 당신이 제 마음을 어찌 안다고 저리 단정하는지 모르겠다.

    “맞거든요!”

    “설령 억지라 하여도 할 수 없다. 지금도 마치 전에 너와 먹었던 국밥처럼 가슴이 뜨끈뜨끈해서 이대로 데어 죽을 것만 같다.”

    그의 말대로 그날의 국밥이 좀 뜨겁긴 했지….

    ‘아니, 그게 아니잖아.’

    난데없는 그의 고백에 속이 시끄럽고 울렁이고 어지럽기까지 하다. 분명 전 아닌데도 왜 자꾸 제 가슴도 그의 말대로 국밥을 얹어 놓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걸까?

    자한은 답을 해주지 않는 두화를 채근했다.

    하나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모른다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런다고 내 포기할성싶더냐?”

    혼잣말로 중얼거린 자한 역시 그들에게 다가갔다. 두화 곁에 선 사내가 두화와 귓속말로 주고받는 모습이 영 거슬리긴 하나 오라버니라 하니….

    ‘가만, 오라버니라고?’

    슬쩍 훑어보니 기골이 좋고 사림과 같은 기운을 지닌 자다. 처음 봤으나 무예를 단련한 자임이 틀림없다.

    “여기 우리 보살님을 찾아오신 보살님들 같으신데,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보살님과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사찰을 부득이 비우게 되었습니다.”

    주지 스님이 나서자 그제야 도헌과 자한은 어쩔 수 없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두화가 세자 곁을 지나는데 좀 전 그가 제게 보였던 모습 때문에, 괜히 심장이 빨리 뛰는 것만 같다. 냉큼 무영의 팔을 잡고 서둘러 앞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자한과 도헌의 표정이 또 굳어진다.

    별다른 말 없이 산 아래까지 내려온 자한이 사림에게 먼저 돌아가라 귓속말을 하자, 사림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저들이 뭘 하든 두화는 스님과 무영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 시진은 넘게 걸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인데다가 앞으로 두 개의 산을 더 넘어야 해서, 낮것을 먹기 위해 근처 개울가에 앉아 주먹밥을 펼쳤다.

    하나, 주지 스님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두화는 그 이유를 알기에 자신의 주먹밥을 반으로 갈라 멀찍이 떨어져 부채질하는 자한과 도헌에게 나누어 주었다.

    “앞으로 한참은 더 가야 하니 시장하실 거예요. 변변찮지만 이거라도 드셔요.”

    “하면 넌 먹을 것이 있고?”

    자한이 묻자 두화가 뽀로통하게 대꾸하였다.

    “없네요. 그러게 왜 따라오셔서는….”

    “하면 너 먹거라. 난 생각 없다.”

    “되었습니다. 한 끼 굶는다고 배고프지 않….”

    -꼬르륵!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치곤 그 소리가 퍽 컸다.

    금세 얼굴이 벌게진 두화를 보며 자한과 도헌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참으며 헛기침을 한다.

    “웃지 마시지요. 이게 다 두 분 때문이잖습니까? 뭣 하러 따라오셔서는.”

    투박하게 톡 쏘아대는 어투에 자한이 일어나 그녀의 손에 주먹밥을 올려주었다.

    “사내가 되어서 여인을 배곯게 하면 안 되지. 잠시 먹으며 기다리고 있거라.”

    도포와 갓을 벗는 그의 행동에 두화는 의아하게 바라봤다.

    곁에 있던 도헌이 천천히 일어나 물었다.

    “뭘 하려고 하십니까?”

    “우리 두화, 물고기라도 먹이려고 하네.”

    ‘우리 두화!’

    다감하게 두화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 모습에 도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제 신경을 확확 긁으며 거스르는데, 감히 세자이기에 당장 뭐라 반박할 수 없다.

    “…!”

    “할 일 없으면 불이라도 피우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