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5)화 (25/96)
  • 25. 번거롭고 불편한 것.

    말없이 오가는 눈빛 속에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다를지언정, 분명한 것은 서로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은 같다.

    한 맺힌 과거의 아픔도 두화 앞에서는 손바닥 위로 떨어져 금세 녹아버리는 차가운 눈처럼 잠시나마 사라지고 만다.

    무영은 늘 그랬다.

    한순간 바뀌어버린 현실에 저만 살아 있는 것에 한탄하면서도, 분노와 악만 가득 차버린 제 차가운 심장 안으로 들어와 살아갈 희망을 안겨준 그녀를 남몰래 마음에 품었다.

    그저 곁에서 지켜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근자에 들어 그녀 곁으로 모여든 살인귀라 불리는 백 장군과, 세자의 출현은 달갑지 않았다.

    누가 봐도 거지와 우연한 인연조차 없을 것 같은 조합이다. 더구나 능히 그 목숨을 잃을 만큼의 죄를 지었음에도 두 사내는 두화에게 관대하기만 하다.

    방주는 지켜만 보고 정말 위험할 때만 나서라 명하였지만, 처음으로 반감이 들었다. 점점 더 두화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두 사내 때문에, 곁에서 지켜주기만 하자 하던 마음은 결국 수면 위로 올라오고 만다.

    ‘매일 꿈 꾸었다. 널 지켜주며 내 이 마음이 네 심장으로 스며들기를…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우리의 앞날을 꿈꾸며 같이 헤쳐 나가기를 원했다.’

    하나,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거리를 두는 두화를 보며, 무영은 욱신대는 심장을 숨기며 지켜만 봐야 했다. 저리 환하게 웃는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웃고 싶다.

    무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두화의 정수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뭐든 고민거리가 있다면 내게 말해. 요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 같아. 못생긴 얼굴이 더 못난이 같아.”

    “아니야. 그냥… 번거롭고 불편한 게 있어서 그래.”

    ‘그 번거롭고 불편한 것이 그자들이냐?’

    대놓고 묻지 못 하는 말은 속 깊은 곳에서 튀어나왔으나 결국 울대를 넘지 못하였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멈칫 멈추었다.

    “두화야, 번거롭고 불편한 것이 있다면 때로는 그냥 쳐내도 그만이야, 어렵지 않아 그거.”

    “그게 마냥 말처럼 쉽지 않아서… 마음대로 되질 않네.”

    ‘나도 그러고 싶지.’

    “정 하기 어려우면 내게 말해. 이 오라비가 해주마.”

    가만히 무영을 올려다본 두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냥 두면 제 뿔에 지쳐 떨어질 거야. 원래 나와는 다른 사… 아무튼 다르니까 시간이 지나면 시들 거리겠지.”

    ‘그래, 저하와 장군님은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달라. 그러니까 지금 조금 불편해도 참다 보면 금세 나 같은 거 언제 알았냐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나 같은 건 잊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무영은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하는 두화의 정수리를 한 번 더 어루만져주었다.

    두 사내의 등장으로 혹여 두화가 신분 상승이라도 꿈꿀까, 그들 중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내줄까 싶어 걱정도 했다.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다면 성라국에라도 도망가 신분을 바꿔, 내 너를 그 어떤 여인보다도 행복하게 해주겠다.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두화야.’

    팔을 괴고 하늘에 뜬 별을 보고 있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무영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

    한편 두화가 움막을 떠나고 정오가 가까워질 때쯤, 말을 타고 온 도헌이 음식 보따리를 들고 움막 아래로 내려왔다.

    두리번거리는데 아이 몇 명만 보일 뿐, 두화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얼굴을 익힌 한 아이에게 손짓했다. 쪼르르 달려온 아이는 도헌의 손에 들린 보따리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겼다.

    “두화는?”

    “아… 누이는 지금 없는데.”

    “그래? 어디 갔는데?”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긁어대며 아이는 난처해했다. 이상한 느낌에 보따리에서 떡을 하나 꺼내어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누이에 대해 말해 주면, 이 보따리 너 주마.”

    “참말요? 한데…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방주님이 당분간 누이 여기 없다고, 찾는 사람이 있어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도헌의 미간이 순간 꿈틀 좁혀졌다.

    대관절 어디를 갔기에 비밀에 부칠 정도인가.

    설마!

    또 다른 담장을 넘기 위해 다른 지역에라도 간 것인가?

    다소 굳어진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주면, 내 다음번엔 팽이도 가져오마.”

    “우와 참말이죠? 그럼… 귀 좀.”

    자세를 낮추고 앉자 아이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이가 자주 가는 용연사라는 사찰에 갔대요.”

    “…!”

    용연사라면 자신도 자주 가는 곳이다. 번뜩이는 눈으로 자리를 박찬 도헌은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하나, 용연사로 향하는 도중 자신을 찾는 노비를 만나, 가던 길을 멈추고 아쉽게도 집으로 향하여만 했다.

    도헌이 움막을 찾은 다음 날, 자한도 두화를 찾아왔다. 움막 위 나무에서 두화가 눈에 띌 때까지 반 시진을 기다렸다. 하나 아이 몇만 강가에 모습을 보일 뿐, 두화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도망간 것이냐? 이리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눈에 띈다면 단단히 혼쭐을 내 줄 것이다.

    감히 저를 기다리게 하고 꼭꼭 숨다니!

    그리 벼르며 시간은 자꾸만 흘렀다. 이쯤 되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이 이상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을 처음 해 봐서 그런 것인지, 처음엔 혼쭐을 내주겠다는 마음이 이젠 걱정이 되었다.

    그때 언덕 아래서 꼬마 하나가 엿을 빨며 올라왔다.

    “에이, 난 또 그 귀족 나리인 줄 알았네.”

    자한은 몸을 돌려 내려가려는 꼬마 아이를 불러세웠다. 차가운 눈빛에 꼬마 아이는 조금 겁을 먹었지만, 달곰한 엿을 핥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손에 든 엿을 사려면 네 처지에 힘든 일인데. 어디서 난 것이냐?”

    “이거요? 어제 온 귀족 나리가 준 보따리에 떡이랑 전이랑 이거랑 잔뜩 들어있어서 먹는 건데요.”

    꿈틀, 눈썹이 사납게 휘어진 자한이 고개를 삐끗 꺾어 아이를 내려다봤다.

    “귀족 나리라고? 누군지 아느냐?”

    “몰라요. 그냥 우리 두화 누이 찾아왔는데요. 전날에도 와서 맛난 보따리 주고, 또 그 전전날에도….”

    ‘듣다 보니 누군가가 떠오르는군. 설마 아니겠지.’

    전쟁터에서 살인귀라 불릴 정도로 냉혹하고 냉정한 사내인 백 장군이 손수 음식 보따리를 들고 거지촌을 찾아왔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 그자가 두화를 왜 찾았는데?”

    “것도 몰라요. 그냥 두화 누이 찾으면서 보따리 주길래 알려줬어요.”

    “그럼, 내게도 말해다오. 두화는 어디 있느냐?”

    음식 보따리 준 귀족 나리는 친절하기라도 했지, 눈앞의 귀족 나리는 거만 떨며 무섭게 묻기만 한다. 말할 마음이 없어진 꼬마가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려 했다.

    “조그만 녀석이 계산이 빠르구나. 난 먹을 것은 없다.”

    “…?”

    “다만 그자에게 말했던 것을 말해주면 이걸 주마.”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낸 자한이 주머니를 열어 작은 은덩이를 꺼내 허공에서 살살 흔들었다. 그것을 본 꼬마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 값어치를 잘 모르긴 하나 작은 동전보다도 귀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거 나 주게요?”

    “그자에게 말한 것을 똑같이 말해준다면 주마.”

    빙긋 웃은 꼬마는 도헌에게 말한 그대로 자한에게 다 말하였다. 은덩이를 쥔 꼬마는 신이나 움막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눈빛이 변한 자한은 바로 말 위로 올라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사림에게 용연사로 향하자 말한다.

    사림은 당장 궁에 돌아가야 하건만, 대관절 그 천것이 뭐기에 저리 집착하나 걱정했다.

    요즘 들어 부쩍 세자궁을 감시하는 대비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더구나 갑작스럽게 괴한에게 가산을 털린 좌의정 설변도가 사병을 늘리고 있다. 사림은 상황을 주시하며 세자에게 보고했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는 모습이다.

    늘 저러했다. 가끔은 먼젓번 호조 참판의 자제를 잡을 때처럼 연극을 해가며 좀 즐길 때도 있지만, 순간 돌변하여서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모시는 웃전이지만 정말이지 소름 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고, 나 혼자 걱정한다고 뭐가 당장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용연사로 향하는 산 초입 부분에서 막 위로 올라가려는 다른 이의 말을 보고, 자한도 속력을 높였다.

    누군가 하였더니 도헌이 아니던가.

    “워, 워!”

    또 다른 인기척에 도헌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조금 전에도 없던 세자가 나타나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하나, 표정을 냉큼 숨기고 말에서 내려 세자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말 위에 앉아있던 자한 역시 도헌을 편하게만 보기엔 껄끄러운 마음이 컸다.

    “어딜 가기에 그리 급히 움직이던 중이었나?”

    “…만나야 할 이가 있어 가던 중이었습니다.”

    두루뭉술 넘기는 도헌의 말에 자한의 한쪽 눈썹이 꿈틀, 사납게 움직였다.

    “그래? 이거 참 우연인가?”

    “예?”

    “나 또한 만나야 할 이가 있어 저 위 용연사로 가던 길이었지.”

    용연사로 향한다는 세자의 말에 도헌이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찰나지만 적의가 실린 눈빛을 용케 감추고 담담히 세자를 바라봤다.

    마치 그 공간만 시간이 멈춘 듯 그리 서로를 바라봤다.

    자한은 느낄 수 있었다.

    도헌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것을 말이다. 저를 향한 적의 가득한 눈빛은 처음 충심을 담아 저를 보던 눈빛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자네 또한 나와 같은 연유로 이 산을 오르는 것이겠지? 하나, 난 내 것을 누구와 나눌 생각 따윈 없느니!’

    ***

    한편 그 시각 주지 스님이 두화를 찾았다. 오늘도 산을 타야 하나 싶어 두화는 마음을 다잡고 주지 스님에게 향하였다. 주지 스님은 꽤 큰 짐보따리를 챙기고 있었다.

    두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으로 다가가 거들었다.

    “스님, 사찰을 옮기시게요?”

    항시 느끼지만, 이 보살님은 참으로 엉뚱하면서도 주위를 즐겁게 한다. 평소 그녀가 행한 선한 마음을 알기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다.

    “사찰을 옮기면 거기까지 오시렵니까?”

    “어? 정말 옮기시게요?”

    “왜요? 너무 멀다 하면 이젠 찾지 않으실 겁니까?”

    그러자 두화가 손사래를 치며 작게 소리쳤다.

    “아니요! 주지 스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갈 것이어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한데 정말 옮기시게요?”

    “글쎄요.”

    갑자기 이리 옮기시는 연유가 뭔지 서운한 마음이 더 커, 입을 삐죽거리며 짐 싸는 것을 거들었다. 한데 어째 보따리에 들어가는 것들이 말린 약재와 서책 그리고 무명천이 다였다.

    “스님, 이건 짐이기보다는….”

    그제야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린 주지 스님이 합장하며 부처님을 찾았다.

    간밤 꿈에 승냥이 떼가 눈앞의 보살님을 에워싸는데, 신기하게도 범과 용이 눈앞의 보살님을 보호하였다. 어느 순간 용이 눈앞의 보살님을 물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 꿈에서 깨었으나, 신령스러운 범과 상서로운 용이 나온 꿈은 분명 길한 징조를 암시한다.

    한데 꿈속에서 본 장소가 다름 아닌 석장골이었다. 두화와 천씨 가문에 대해 알고 있기에, 두화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기도하며 그리로 이끌려 조금 서두르는 것이다.

    “실은 모레쯤 석장골에 가려고 했는데, 좀 서두르려 합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보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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