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4)화 (24/96)

24. 며칠 숨자!

신분이 낮은 천한 것들의 삶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위태롭기만 하다. 여노비는 고된 일도 해야 하고, 때때로 주인에게 희롱에 겁탈을 당해도 감당해야 한다. 저 같은 거지는 겁탈을 당해, 관아에 신고하여도 아무도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차라리 어찌 보면 돈을 받고 웃음과 몸을 파는 기생이 낫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만큼 신분사회에서 두화의 처지는 한낱 벌레만도 못한 신세다.

아무리 성품이 이상하여도 간혹 보여준 너그러움과 진지함 그리고 다정한 모습에, 세자는 뭇 귀족들과는 그래도 다른 사내구나 여겼다. 하나 지금 보니 그 또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로서 힘없는 저를 농락하고 희롱할 뿐이었다.

그저 자신은 그에게 심심풀이 장난감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더 화가 나!’

제 첫 입맞춤을 허락도 없이 훔친 그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두화는 그대로 홱 몸을 돌려 움막으로 뛰어갔다.

자한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눈앞에서 멀어지는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다.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이미 그녀가 사라진 방향만 바라봤다.

그날 밤, 두화는 생각하느라 저녁도 굶고 움막 안을 서성였다. 아무리 해도 이렇게 계속 괴롭힘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진짜 죽을 것 같은 그런 괴롭힘은 아니었지만, 부담스러운 시선과 관심은 정말이지 감당하기 불편하다.

“차라리 며칠 숨어 있다 돌아오는 거야.”

결정을 내린 두화가 부친에게 향했다.

“아버지, 저 며칠만 용연사에 다녀올게요.”

“사찰엔 갑자기 왜?”

“그냥요. 불공도 드리고 스님 따라 좋은 일도 좀 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긴 하나, 사찰에 가겠다는 여식의 말에 대충 짐작이 되었다. 일랑은 들여다보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고, 여식을 마주했다.

“두화야,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게냐?”

“예? 아니요, 걱정은 무슨….”

큰 소리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면 되었다. 너를 믿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거 알지?”

“에이, 아버지도 참.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정도로 저 강해요. 웬만한 무뢰배 정도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고요.”

“안다, 네 실력. 하나, 그 상대가 하나일 때와 무리일 때는 다르지. 요즘 곳곳에서 우리를 흉내 내는 질 나쁜 놈들이 있다고 하니, 무영일 데려가.”

“아버지, 저 멀리 가는 거 아니고 겨우 한 시진 거리에 있는 사찰에 가는 거예요.”

두 눈에 힘을 준 일랑이 일어나 두화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내겐 너 하나다. 아무리 개방의 식구들이 많다 하나, 네 어미가 내게 남겨준 단 하나의 보물이란 말이다.”

“아버지.”

“이 아비는 네가 자유롭되,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일랑은 최근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일련의 사건들이 영 마음에 걸렸다. 자신들을 흉내 내며 귀족의 재물을 훔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살인까지 일삼고 있는 강도들의 행보가 신경 쓰였다.

복면을 쓰고 괴한 노릇 하지만, 화월국 곳곳의 다른 정보조직이 마음먹고 캐낸다면 언제고 일랑의 정체는 드러날 수 있다.

혹, 정보조직과 이를 이용하려는 권력가의 악심이 개방을 덮친다면, 제 여식 또한 안전치 못하다. 괴한의 수장이자 개방의 방주인 저를 잡기 위해,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제 여식이 될 테니 말이다. 하여, 여식이 해를 입을까 그것이 가장 두렵다.

10여 년 전 역모죄로 참형을 당하기 전날 구해낸 부씨 가문의 장자인 무영에게 여식의 호위를 맡기었다.

물론 두화는 모른다. 무영이 알게 모르게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해서 이미 세자와 백 장군이 두화 곁에서 맴도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상황을 전해 들으면서도 일랑은 섣불리 세자와 백 장군을 여식의 곁에서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뱃놀이를 하던 상황에서 여식이 여인을 구하고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리에 이를 갈았었다. 세자란 자와 장군이란 자가 거기 있으면서도 어찌 두화가 나서서 일을 해결하게 놔두었단 말인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자칫 세자라는 수풀을 건드려 일을 크게 만든다면, 여식뿐 아니라 개방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의정을 통하여 왕에게 제가 살아 있음을 넌지시 알렸으니,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나, 아직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여 여식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참고 넘겼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지금은 최대한 지켜보는 것이 최선책이었기에, 마음은 무겁지만, 두화가 목숨을 잃을 상황이 아니라면 나서지 말라고 무영에게 명했다.

무영은 듬직하게도 제 말을 잘 따르며 두화에 관한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해서 지금도 왜 사찰로 도피하듯 가려는지 짐작은 하고 있다.

‘아비가 당장 해결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나, 네가 정말 위험해진다면 그땐 아비가 직접 나서마.’

방주 자리에만 있지 않았어도 여식을 데리고 잠시 먼 곳으로 가면 그만인데. 여식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여 일랑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런 제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인지 두화가 품으로 뛰어든다. 일랑은 품에 안긴 여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

새벽 일찍 봇짐을 맨 두화가 움막에서 나왔다.

“아버지, 다녀올게요.”

부친의 움막을 향해 작게 소곤거린 두화는 언덕길을 빠르게 올라갔다.

“헉, 깜짝이야.”

그곳엔 대나무를 든 무영이 서 있었다. 대나무로 보이지만, 그것은 무영이 직접 만든 검을 위장한 것이다. 예리하게 갈린 검날은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

“날 밝으면 출발하지, 야반도주하는 것처럼 어딜 가?”

“저승사자처럼 기다리고 있어 왜, 사람 놀라게. 아버지한테 다 들었으면서 뭘 또 모르는 것처럼 물어? 용연사 가는 거 다 알면서.”

“…”

아직 어두워 무영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두화는 부친을 돕고 때때로 저를 보호해 주는 무영이 고마우면서도 점점 날카로워지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근자에 들어서는 마냥 어려서처럼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친이 무영을 딸려 보내는 이유를 아니까, 걱정시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동행해야 한다.

“안 갈 거야? 빨리 가서 스님이 해주시는 아침 공양 먹고, 해야 할 일이 태산이야.”

홱 돌이켜 빠르게 걷자 조금 떨어져 걸어오는 무영이 느껴져 두화는 고개를 절레거렸다.

처음엔 억울하게 역모에 휘말려 귀족의 신분에서, 죽을 위기의 순간 부친이 거두어 거지가 되어 버린 무영이 안쓰럽고 뭔지 모를 동병상련을 느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수차례 내던지는 밥그릇에도 두화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찾아갔다.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못해, 버티던 그가 닷새 만에 결국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날 이후 두화는 무영에게 자신이 배운 검술을 때때로 가르쳐 주었다. 워낙 서책만 읽던 도련님이라 그런지 엉망이었지만, 해가 바뀔수록 여인과 사내의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젠 검에 있어서는 누구도 쉽게 그를 꺾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한참을 걸어 막 먼동이 떠오를 때쯤 산 중턱까지 올랐다.

숨이 턱까지 막혔지만, 기분이 좋다.

분명 오늘이고 내일이고 찾아올 두 사내가 자신이 그곳에 없음을 알고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니, 괜히 골탕 먹이는 기분이라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헛걸음했다고 나중에 배로 당하는 거 아닌지 몰라. 에잇, 몰라. 난 자비로운 부처님께 불공드리러 가는 것뿐이야. 두 분이 언제 올 줄 알고, 일일이 허락을 어떻게 받아? 그렇지요, 부처님?’

키득거리며 웃던 두화는 이내 발걸음을 재게 놀려 뛰어 올라간다.

그런 두화를 보던 무영의 입꼬리가 찰나 올라간다.

역시 그녀는 어두운 얼굴보다는 해맑게 웃는 것이 어울린다.

‘넌 내게 살아갈 명분을 주었다. 누구든 널 해하려 한다면 기필코 내 목을 먼저 쳐야 할 것이다. 넌 내가 지킨다, 두화야.’

손에 든 대나무를 꼭 잡아 쥔 무영의 시선은 내내 두화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덧 다다라 사찰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비질하고 있던 주지 스님이 두화를 알아보고 반갑게 웃어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아가씨.”

“스님도 참. 또 아가씨라 하시네요.”

“…오늘은 어쩐 일로 모습을 드러내셨네요, 뒤에 같이 오신 분.”

고개만 홱 돌려 무영을 보고 다시 스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두화가 활짝 웃었다.

“예. 이곳에서 며칠 지내면서 불공도 드리고, 스님 하시는 일 좀 같이 거들려고 왔어요. 괜찮지요?”

“나야 그래 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지요. 이리 일찍 오셨으니 아직 아침 전이지요?”

기다렸다는 듯 두화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활짝 웃었다. 주지 스님은 두화에게 방에서 기다리라 하고는 부엌으로 향하였다.

두화는 짐을 내려놓고 냉큼 주지 스님에게 향했다. 다른 스님들이 시주해온 공양미에 간단한 채공과 갱두가 전부였지만 모두 한 자리에서 맛있게 먹었다.

“며칠 뒤 다른 마을에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서 소승은 약초와 야생화를 뜯으러 가야 합니다.”

“저희도 도울게요.”

“산을 타는 것이라 힘들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부처님도 뵙고, 스님께 도움도 드리고 싶어 온 것이어요. 힘은 넘쳐나니 어떤 일이든 시켜만 주세요.”

잠시 후, 주지 스님을 따라 두화 역시 망태기를 들고 따라나섰다. 물론 무영 역시 검 대신 호미를 들고 뒤따랐다.

꽤 오랜 시간 약초를 캐고, 야생화를 뜯어 사찰로 돌아오니 벌써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산을 타고 오르내리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다.

오래간만에 뭔가에 몰두하여 시간을 보냈더니 두화는 뒤늦게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저도 이럴진대 저 때문에 종일 고생한 무영은 괜찮나 싶어 방문을 두들기고 말을 걸었다.

“있잖아, 오라버니.”

“…왜, 배고파? 아깐 생각 없다더니.”

하여간 걱정돼서 물어보려던 것도 저리 까칠하게 구니 말이 쏙 들어가고 만다.

“그게 아니라… 에잇, 사람이 말을 하는데 문은 좀 열고, 얼굴 좀 보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무영은 방문 밖 그녀의 표정이 상상되는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맨날 보는 얼굴, 지겹게 또 보고 싶냐?”

“허, 누가 보고 싶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칫.”

토라진 그녀의 말에 천천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두화는 오래간만에 무영의 귀티 나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을 날리며, 작은 마루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고개만 돌려 두화를 바라봤다.

“사람을 불러놓고 왜 보기만 해?”

벌써 씻었구나.

멀끔하니 수려하게도 생겼네 정말.

“어? 아… 그냥.”

“싱겁기는.”

늘 무뚝뚝하지만 이젠 거지들과 움막 생활에 익숙해진 무영을 보며, 문득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잊을 수 없는 과거와 또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어떤 기분이 드는지 이해하면서도 궁금했다.

“오라버니는 소원이 뭐야?”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은 무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냥… 오라버니도 사내니까 예전에… 그리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관직에 나가….”

“예전의 부씨 가문의 장자는 그날 죽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난 그냥 무영이다.”

차가운 목소리엔 한이 서려 있었다.

그 아픔을 저라고 어찌 모를까.

다만 자신은 뿌리만 귀족일 뿐, 태어나기를 움막에서 태어나 무영만큼 가슴에 한을 품고 있지는 않다. 간혹 부친께서 자신의 곧은 성정 때문에 모친이 그리 일찍 갔다고 남몰래 자책하는 것을 몰래 엿봤을 때, 그때만큼은 왕이 원망스럽고 철저한 신분사회인 화월국이 싫었다.

“맞아,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야.”

두화는 부러 활짝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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