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3)화 (23/96)
  • 23. 내 마음을 어찌 네 멋대로 멈추라 하느냐?

    고소한 전 냄새가 풍기자 두화는 저도 모르게 코가 벌름거렸다.

    “행여 아이들 것 빼앗아 먹을 생각 말고, 어여 나눠 주고 오거라.”

    “누가 코흘리개들 것을 빼앗아 먹는답니까? 참 내.”

    뽀로통한 얼굴로 언덕길을 내려가는 두화를 보며 도헌은 피식 웃었다.

    부친을 도와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와 그 자제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다. 전날까지 지방에서 올라온 서신을 살피며 그들을 가려냈다. 아침 일찍 그들을 잡아 의금부로 이송하라는 왕의 명을 전하고 나서야 제 할 일을 끝냈다.

    몹시도 피로하여 답답한 가슴에 앞뜰을 바라보는데, 얼마 전 저곳에서 자객과 검을 겨루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객의 정체도 분명 알건만 왜 추포하지 않았을까?

    그런 제 행동에 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분명 두화에 대한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기분 때문에, 처음으로 홀로 화월국 최고의 기생집인 송월관에 발걸음까지 하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사내를 홀리는 사향까지 풍기며, 아리따운 미색과 요염한 색기로 미혹하는 기녀들에게는 하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자리가 불편하기까지 하여 금세 나와버리고 말았다.

    “난감하군. 하고많은 여인 중에 하필이면 천것에게….”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타인의 눈이 두려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은 아무 감정 없이 적을 베고 죽여야만 제가 살고, 화월국을 지킬 수 있었기에 세상 두려울 것 없이 피 칠갑하며 살아왔다.

    하나, 만약 제 곁에 여인을 두게 된다면 그것은 저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백씨 가문의 일원으로 며느리 자리까지 소화해 내야 하는 자리다. 감히 천것이 들어올 수 없는 자리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도헌의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정말 난감하군.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건만 나 혼자 뭣 하는 짓인가? 설마하니 내가 천것을 마음에 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래, 그 아이가 워낙 뭇 여인과는 달라서… 호기심에 그런 것 일게야.”

    당치도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한 제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한데 생각을 떨쳐내도 뽀로통해진 얼굴로 꼬박꼬박 대들던 모습, 그리고 나비 같았던 그때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흠. 당장 뭘 어쩌자는 것이 아니니, 얼굴은 잠시 봐도 되는 거잖아.”

    헛기침한 도헌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부엌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을 준비하는 상에서 전과 굴비 그리고 떡을 종이에 한꺼번에 싸서 방으로 가져왔다. 개중에 맛나게 생긴 것으로만 따로 종이에 싸서 소매 춤에 넣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두화에게 달려온 것이다.

    다른 이들은 감히 살인귀라 하여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건만, 역시나 두화는 달랐다. 제 앞에서 억척스럽게 쫑알댄다.

    제게 이리 대하는데도 웃음이 나는 것을 보면, 저 모습이 보고 싶었나 보다.

    막 언덕 위로 올라온 두화가 가자미눈을 하며 씩씩거렸다.

    “장군님, 왜 자꾸 먹을 걸 가지고 오시는데요?”

    “그러면 안 되느냐?”

    “딱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대관절 왜 그러시는 건데요?”

    감히 제게 짜증스러운 말투로 대꾸해도 도헌은 이상하게 괘씸하지 않다.

    “내 맘이다. 옜다!”

    주먹만 한 뭔가를 던져서 급히 받긴 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저기… 이제 오지 마셔요.”

    몸을 돌려 가려던 도헌의 입가에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뒤돌아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쳐다봤다.

    “하면 네가 올 테냐?”

    “예?”

    “어두운 밤에도 와 봤으니, 낮에는 더 잘 찾아올 듯싶어 물은 것이다.”

    두화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확실히 도헌은 그 밤, 영의정 저택을 턴 괴한이 두화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데 왜 제게 잘해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그가 선한 마음에 혹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음식을 가져오지만, 저리 제 실체를 다 알고 있으니 경계하게 된다.

    더욱이 그의 눈웃음 속에서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낀 두화는 정색하며 굳은 얼굴로 청하였다.

    “장군님, 천것 중에서도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 비렁뱅이거든요. 한데 그런 제게 왜 잘해주셔요? 이미 짐작하신 듯한데, 제 실체를 아시잖아요. 그냥 당장이라도 추포하세요!”

    “내 언제 널 잡아간다더냐?”

    “하면 더는… 예 오지 마시어요. 높으신 분께서 이런 곳에 자주 오시는 거, 장군님 아시는 나리 중 누구라도 볼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이에요.”

    “그것을 왜 네가 걱정하느냐?”

    가만 듣자 하니 도헌도 오기가 생긴다.

    제게 약점까지 잡혔으면 더 고개를 숙이고, 제 앞에서 꼼짝 못 해야 하는데 오히려 당당히 잡아가라 한다.

    ‘그래. 이거였군, 네가 뭇 여인들과 다른 점이. 넌 차라리 잘못했다 울며 애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것인데. 한데 이젠 늦어 버렸구나. 이미 난 그런 네게 흥미를 넘어 이젠 갖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장군님!”

    답을 재촉하는 두화에게 도헌은 여전히 웃으며 제 할 말을 했다.

    “내가 오든 말든 그것은 내 마음이다. 더구나 넌 내 소중한 물건까지 훔쳐 가질 않았더냐?”

    “언제 적 일을! 아니, 그리고 그건 이미 돌려드렸잖아요?”

    “오로지 내 손만 타야 하는 물건에 네 손이 닿았으니 이미 그 값어치가 떨어졌다. 더구나 며칠 전 그 밤, 내 집 담을 넘은 것이 비단 너 하나만이 아니었을 텐데?”

    찰나 마지막 그의 말에 서늘함이 느껴진 것은 비단 제 착각이었을까?

    그의 말속에 뼈가 숨어 있다.

    두화는 입속이 말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깨물며 불안한 심리를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그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면, 저 아래 움막에 있는 자들 모두 잡아갈 것이라 그리 겁박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찌하면 되는데요, 제가?”

    낮은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은 원망과 불안감으로 휩싸였다.

    “오늘처럼 내가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주기나 해.”

    “…?”

    “뭐 가끔은 네가 와도 좋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그의 말이 편하게 들리지 않기에 두화는 정색했다.

    “아휴, 됐거든요! 그냥 장군님이 오셔요.”

    두화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헌은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려 말 위로 단번에 올라탔다.

    먼지만 남기고 금세 사라진 그 길을 보던 두화는 손에 들린 종이를 펼쳤다.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던 전과 떡이 가지런히 있었다.

    “불편해서 먹다가 체해 죽겠네, 정말.”

    터덜거리며 움막으로 향했다.

    그러나 반 시진도 못되어 두화는 또다시 언덕으로 올라와야만 했다.

    이번엔 세자가 뒷짐 지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운 의복을 입으니 행동거지가 자연스레 조심스럽게 된다.

    세자 앞에 가서 예를 갖추자 세자가 의외라는 듯 눈동자가 커지다가 되돌아왔다.

    답답한 제 마음이 그녀를 보면 이상스럽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해서 감히 제 주머니를 털었음에도 이 몸이 직접 만나러 오는데, 그마저도 하지 말라 하더니, 거기에 도헌 그자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갚겠다고 하여 순간 화가 났었나 보다.

    다음날 다시 와 뱃놀이라도 하며 기분을 풀어주려 했었다. 하나, 세자빈의 탄일에 참석하지 않고 근래 궁 밖 출입이 잦다 하여 대비마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여, 세자궁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다.

    지금도 몰래 출궁한 것이지만, 저 대신 사림이 제 역할을 잘해 내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 오길 잘하였다.

    고운 의복을 입고 제 앞에 조신하게 예를 갖추는 모습에 조금은 놀랐지만, 그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오셨사옵니까?”

    “경계하는 듯한 그 말투는 무엇이냐? 내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말투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리해주시면 좋겠어서… 돈을 갚겠다 하였어도 싫다 하시고, 저는 이런 자리가 무척 불편하고 싫사옵니다.”

    꿈틀, 자한의 이마가 순간 사납게 움직였다.

    “그리 불편하고 싫으면 애초 남의 주머니는 털지 말았어야지, 안 그러냐 두화야?”

    좀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냉랭한 말투였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되는 그와의 대화는 늘 이렇게 제자리다. 그래도 두화는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건 제가 잘못했어요. 하여 지금은 누구의 주머니도 훔치지 않고 있으니 저하, 제발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그만 저 좀 놔 주시면 안 될까요? 열심히 장사라도 하여 돈은 꼭 갚을게요, 네?”

    애원하는 두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자한은 부채를 접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

    “두화야,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아무리 지금은 아니라고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을 네 무슨 수로 되돌리겠느냐?”

    ‘네게로 향한 호기심이 이젠 단순함이 아님을 나 또한 깨우쳐 버렸으니. 두화야, 이미 늦었느니라. 네게로 향하는 내 마음을 네 무슨 재주로 이제 와 방향을 틀어 버릴 수 있겠느냐?’

    며칠 보지 못하는 사이 두화에 대한 마음은 더욱 커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제 마음이 그녀에게로 향하였다.

    아무 때고 떠오르는 그녀 모습에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하다못해 국을 먹으려고 할 때도, 감히 툴툴대며 제 앞에서 무례한 짓을 했던 모습이 그려지고, 해맑게 웃는 모습에 결국 저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맹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의를 부르려고 했을까.

    한데 이런 제게 더는 오지 말라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그냥 데려다 옆에 둘까?’

    대비마마와 호시탐탐 저를 뒤흔들려는 세자빈과 좌의정의 눈길에서 과연 궁 안에서 두화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아직은 제가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 분명 사달이 나도 크게 나, 결국 다치는 것은 그녀일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섣불리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하오나 저하,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으나 멈출 수는 있잖아요? 저하만 멈추어 주신다면….”

    “그만! 잘못은 저가 저지르고 어찌 감히 내게 멈추라 하느냐?”

    ‘넌 모른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어찌 네 멋대로 멈추라 하느냐? 나조차도 멈추지 못해 이리 또 오고 만 것을….’

    굳은 자한의 얼굴을 고스란히 올려다보던 두화는 결국 세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겠다고 여겼다. 더는 세자의 얼굴이 보기 싫어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두화의 모습에 자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이젠 보는 것조차 싫어 눈을 감아버려! 못된 것, 내 저를 어찌 생각하는데!’

    이마 위로 닿는 촉촉한 감촉에 두화는 숨을 집어삼키었다. 조금은 거친 숨결이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놀라 두 눈을 번쩍 뜬 두화는 감히 그의 가슴을 두 팔로 밀어냈다.

    “이게 무슨! 왜 이러세요?”

    정색하며 자신의 입술을 벅벅 문지르는 두화를 보고 나서야 자한도 당황했다.

    “…!”

    자신도 의도하고 저지른 일이 아니기에 금세 얼굴이 굳었다.

    정말 순간이었다. 두 눈 꼭 감은 두화를 보자니 화가 나는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붉은 그 입술을 탐하고 싶다는 강한 집념이 찰나 들끓었다.

    ‘내 어쩌자고….’

    부르르 떨면서도 두 주먹 꼭 쥔 두화가 원망하듯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천것이지만… 누구도 저를 함부로 탐할 순 없거든요!”

    제 이마에 온기가 닿았을 때, 처음엔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놀랐고, 그다음엔 다감함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눈빛을 본 순간 수치심이 들었다.

    ‘마음대로 농락해도 될 만큼 천한 신분이긴 하나, 그런데도 나는 나란 말입니다. 그 누구도 날 함부로 할 순 없어요. 비록 이 나라 세자인 당신일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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