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왜 이제야 오십니까?
두화가 터덜터덜 걸어 먼 거리를 걸어오니 어느새 유시(17~19시)가 되었는지, 석양이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움막으로 향하는 언덕 나무 아래 도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그 아래로 더럽고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움막이 보이고, 천하디천한 거지들이 있는 곳임에도 도헌은 그 자리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아니, 저물어가는 석양을 등지고 선 모습이 커다란 나무와 동화되어 마냥 바라보게 된다.
“이제야 오느냐?”
낮지만 부드럽고 울림 있는 그 목소리에 두화는 정신을 차리고, 입고 있는 의복과는 어울리지 않게 뛰어갔다.
“그러다 넘어질라. 천천히 와도 된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다. 나도 좀 전에 왔다.”
“다행이다. 후.”
허리를 접은 채 숨을 내쉬던 두화가 잠시 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도헌 앞에 섰다.
“장군님은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요?”
천진난만하게 묻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도헌의 눈빛이 가늘어지다가 되돌아왔다.
‘눈만 내놓았다고 치면… 흐음.’
“…전날 흠뻑 젖은 채 그리 보내어, 혹 감모는 걸리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아, 전 괜찮아요. 원래 체력 하나는 타고나서 고뿔도 잘 걸리지 않거든요. 근데 정말 제가 걱정되어 찾아오신 거예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 눈동자를 가만히 보던 도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이렇게 여리고 순수한 그녀가 전날 그 자객일 리 없다. 반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명 두화라 확신하는 그 마음에, 예리하게 바뀐 눈빛으로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왜 빤히 보시지? 혹 날 알아본 건가?’
갑작스레 다가온 도헌 때문에 놀라, 숨을 집어삼키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단단한 손이 허리를 가뿐하게 잡아채어 안았다.
석양의 마지막 빛줄기에 그녀의 이목구비가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였다. 유독 붉은 입술은 사내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할 정도로 색기가 흘렀다.
저도 모르게 울대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싶어 심장이 사납게 뛰어댔다.
“자, 장군님?”
살짝 벌어진 입술, 그리고 햇볕에 그을려 건강한 피부를 드러낸 목선에 시선을 두던 도헌의 눈이 찰나 커지다가 되돌아왔다.
‘분명 간밤, 내 검이 닿았던 곳에 남은 상흔이다.’
“장군님, 손 좀 놔 주….”
“어찌해야 할까?”
두화를 바라보는 도헌의 눈빛이 어딘가 달라졌다.
더구나 도헌은 두화가 모를 말만 하고 있으니,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예?”
좀 전과는 다르게 저를 경계하는 두화의 눈빛에 도헌은 당분간 모른 척해주자 생각한다.
‘하나, 감히 내 집을 털어갔으니 조금은 경각심을 심어줘도 되겠지.’
그녀를 놔주는 동시에 제 검이 닿았다가 남은 목의 상흔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흠칫 놀란 두화가 뒤로 물러나며 상처를 손으로 가렸다.
“약만 잘 쓰면 그 정도 상처는 없어지겠구나.”
“…!”
뭘 알고 하는 말일까?
전날 도헌과 겨뤘던 자객이 저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 싶어, 입 안이 마르며 갈증이 났다.
“어쩌다 생긴 것이냐? 여인의 목에 그런 상처가 생기긴 쉽지 않을 터, 무슨 일이라도….”
“별거 아니에요. 그저, 움막 옆 꽃가지를 꺾다가 긁힌 것뿐인걸요.”
“그래? 네가 그렇다 하면 믿어주마.”
“…!”
믿어준다니, 뭘?
아!
‘간밤 복면인이 나라는 걸 안 것이야. 하니, 저리 말하는 거지.’
이젠 컴컴해진 주변 덕분에 자신의 표정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
두화는 도헌을 예리하게 노려봤다. 들켰다면 저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움막에 있는 부친과 거지 삼촌들뿐 아니라 힘없는 아이들까지 죄 위험한 상황이다.
저도 모르게 살기를 드러내었다.
‘저도 이러기 싫지만 미안해요, 장군님.’
저고리 가슴을 여민 부분에서 작은 단도를 은밀하게 빼내려고 했다. 그때 도헌이 나무 아래서 뭔가를 가지고 가까이 다가왔다.
‘위험하다!’
분명 그가 검을 가지고 왔으리라 여겼다.
한데 눈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것은 약재 꾸러미였다.
“뭐, 뭐예요 이게?”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감모에 걸린 것 같아 찾아온 것이라고.”
“…!”
자신이 오해한 것이었나?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가 제 어깨를 툭툭 친다.
도헌이 피식 웃으며 말하는데,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하였다.
“대련을 원한다면 언제고 해줄 터이니, 다시는 여인의 몸으로 담장은 넘지 말아라.”
“…!”
살인하면 안 되지만, 저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이들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 이를 악문 두화가 바로 단도를 빼 들고 고개를 홱 돌렸지만, 어둠 속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 알면서도….”
‘어째서 날 살려주고, 죄를 묻지 않는 거죠?’
두화는 어둠 속에 대고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어 움막으로 향했다.
잠시 뒤 어둠 속 나무 뒤에서 도헌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게 말이다. 어째서 자비심이라고는 일절 없는 살인귀라 불리는 내가, 천한 너 하나 마음대로 벌하지 못하고 있는지 나도 궁금하구나. 감히 내 집을 털었는데도 말이다. 해서 이제부터 알아보려 한다.”
단순한 여인에 대한 호기심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는 것에만 몰두하던 자신이 처음으로 여인 앞에서 웃고,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해서 도헌은 이런 기분이 여인에 대한 호기심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당장 기생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었다. 기생을 품고 두화를 보며 느꼈던 이상한 기분들을 느낀다면 천한 것에 대한 제 호기심은 단순히 그간 무관심하던 여인에 대해 마음이 동해 그런 것이다.
‘이 밤이 지나면 어느 정도 답은 나오겠지.’
기생집으로 향하는 도헌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예리하게 빛을 띠었다.
***
멍하니 생각에 빠져 움막으로 들어서려는데, 제 치맛자락을 잡은 손길에 문득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봤다.
“누나, 이거 먹어.”
귀한 종이에 쌓인 무언가를 내어주는 한돌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두화는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려 쪼그려 앉았다.
“뭐야, 이건?”
“아주 아주 맛난 거. 냄새가 맛있어서 내가 하나 먹고 누나 주려고 남겨놨어.”
종이에 싸인 음식, 거기에 맛있기까지 하단다.
두화의 눈은 속 내용물보다는 그 내용물을 감싼 종이에 더 가 있었다. 음식도 귀하지만 그 음식을 싸고 있는 종이야말로 귀해 보였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설마 훔친 건 아니지?”
아이는 손사래를 치며 억울한 듯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두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울지 말고. 누나는 이 귀한 것이 어디서 난 건가 궁금해서 물은 것뿐이야. 뚝.”
“…줬어.”
“누가?”
“저기서 좀 전까지도 누나하고 말하던 귀족 나리가 줬어.”
“뭐?”
간밤의 자객이 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어째서 당장 추포해가지 않고 여기까지 내려와 음식을 나눠준 걸까?
왜?
의구심과 궁금증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낮에 다른 사람하고 같이 와서는 여기 아이들한테 다 나눠줬어.”
“…방주님도 알고 계셔?”
“아니. 삼촌들하고 일찍 나가셔서 귀족 나리가 여기에 왔을 땐, 아주머니들하고 우리밖엔 없었는걸.”
부친이 안 계시니 음식을 편히 나눠 줄 수 있었던 게다.
부친이 늘 강조한 것이 있다. 아무리 거지라 하나 괜한 호의를 거저 받지는 말아라, 직접 발품을 팔아 동냥질을 하는 것이면 몰라도, 이곳을 찾아 괜한 호의를 베푸는 것에는 대가가 있으니 늘 조심하라고 말이다.
하니, 먹을 것을 가지고 찾아온 장군의 의도를 어찌 의심하지 않을까?
‘간밤의 일을 눈치챈 거야. 그래서 확인하려고 온 거고.’
한돌이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두화의 옷깃을 잡아 흔들었다.
“누나, 그거 먹고 자.”
“그래, 누나 몫도 남겨주고 다 컸네.”
“누나, 난 계속 크고 있고, 몇 년 뒤엔 내가 그 귀족 나리보다도 더 잘나게 될 거야. 그땐 누나 나한테 시집와야 해.”
“또, 또 까분다. 어여 가서 자.”
폴짝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던 두화의 시선이 이내 제 손안에 든 종이 뭉치로 내려갔다.
움막 안으로 들어가 침상에 앉아, 종이 뭉치를 천천히 풀었다. 약과와 말린 과일 정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낮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삼재인가? 그게 아니라면 건드려서는 안 될 주머니들을 털어서 그런가?”
그들의 돈주머니를 훔친 뒤부터 하루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꼬여 버렸다.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성질 더러운 세자는 툭하면 부릅뜬 눈으로 겁박하며 부려 먹는데, 이게 또 가만 보면 고되게 뭘 시키는 것도 아니다. 값비싸고 고운 의복을 사주고 밥을 먹는 게 전부다.
그리고 샌님같이 생겨서는 전쟁터에서 살인귀라 불리는 장군은, 분명 제집을 턴 자객이 저인 줄 알면서도 음식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제 몸 걱정을 하며 약재까지 지어 왔다.
“…정말 올해 운수 사납네. 어쩐지 그날따라 돈주머니가 넝쿨째 들어온다고 하였더니 결국 화가 될 애물단지였던 건가? 이제 어쩌면 좋아?”
뒤늦게 깨달아본들 이제 와 무슨 소용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대로는 매일 피곤해서 못 살 것 같다. 차라리 죄를 자복하고 벌을 받는 것이 낫겠다 싶다.
이미 성질 고약한 세자와 괴한이자 소매치기인 제 정체를 알면서도, 웃으며 약재까지 지어다 준 장군에게 꼼짝없이 묶여버린 신세다.
오늘 세자에게 부탁했지만 되려 겁박당했다. 내일이든 모레든 만나게 되면 애원을 해서라도 그만 오시라 다시 청하여야겠다.
“저하는 그렇게 한다고 쳐도, 장군은 어쩐다? 분명 내 정체를 알고 있는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떻게 해야 두 사내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다음날 꼼짝하지 않고 나무 아래서 기다렸지만, 두 사내는 마치 약조라도 한 듯, 해가 질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만 좀 찾아오라고 청하려던 두화는 어느새 두 사내를 기다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사흘째가 되던 날, 드디어 도헌이 먹을 것을 한 보따리 싸 들고 나타났다.
“왜 이제야 오시는데요?”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두화를 보며, 도헌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놀랐다. 하나, 이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 나갔던 서방님 기다린 줄 알겠구나.”
“무, 무슨 말씀이셔요? 혼인도 안 한 처자에게!”
“말은 그리해도 날 무척이나 기다린 것 같은데 아니냐?”
“…기다린 건 맞지만!”
“기다렸다니, 이거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군.”
기분 좋게 웃는 도헌을 보자니 괜히 낯 뜨거워진다.
“아니거든요! 장군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니 절대 오해 마시어요!”
두화가 발끈하며 따지고 드는 모습을 보자니, 며칠 못 보는 동안 기분이 왜 그리 답답했는지 도헌은 이제야 알 것 같다.
“알았다. 알았으니 이거나 아이들 나눠주거라.”
웃으며 보따리를 가슴팍에 안긴다.